‘친정엄마’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가슴 아리고 그리운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가수 나훈아도 애틋한 노래로 그 마음을 불러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게 ‘친정엄마’는 그리움보다도, 같은 여자로서 살아온 인생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이 더 크다.
어린 시절, 다른 형제들은 모두 객지로 떠나고, 나와 동생만 부모님 곁에 남아 학교를 다녔다.
동생은 엄마를 닮아 작고 예쁘장했다. 반면 나는 아버지를 쏙 빼닮아,
어디를 가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정도였다.
엄마는 노골적으로 나와 동생을 차별하셨다.
나는 엄마와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어서 새엄마 밑에 사는 아이’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엄마의 따뜻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린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깊고 오래갔다.
언니 결혼식 전날, 들뜬 나에게 엄마는 차갑게 말했다.
“넌 집을 지켜야지. 결혼식에 갈 필요 없어.”
나는 울며 애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너까지 차비 보태서 올 필요 없다.”
동생에게는 시장에서 사 온 예쁜 블라우스를 입혀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서러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엄마는 늘 나에게 인색하셨다.
학교에서 상을 받아도, 시험을 잘 쳐도 칭찬 한마디 없으셨다.
늘 옆집 누구와 비교하며 “너는 못났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셨다.
칭찬은커녕, 내가 잘하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셨다.
그 영향은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했다.
나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고, 자신감도 자존감도 낮은 어른이 되었다.
반면 동생에게는 늘 따뜻하고 관대하셨다.
도시락엔 계란프라이가 꼭 들어 있었고, 새 옷이며 과자도 동생 몫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문제도 그랬다.
나는 인문계에 가서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단호히 반대하셨다.
“계집애가 공부는 무슨. 대학은 꿈도 꾸지 마라.
괜히 눈만 높아져서 시집도 못 간다. 집안 형편 생각해라.”
그 말들은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결국 엄마는 나의 의지를 철저히 묵살했고,
반면 공부에 관심 없던 동생에게는 대학에 가야 한다며 독려하셨다.
한마디로 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은 켜켜이 쌓여갔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올케 언니를 통해 엄마의 속마음을 전해 들었다.
“동생은 예쁘장해서 곱게 키워 반듯한 사위 보려 했고,
걔는 똑똑하단 말 들으면 없는 살림에 공부시켜야 할까봐 걱정됐다.
혹시라도 잘되면 시집도 안 가고 콧대만 높아질까 봐 불안했어.”
엄마는 나중에 “그때 밀어줄 걸” 후회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키우고 5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그 시절의 상처가 그대로 흉터처럼 남아 있다.
이렇게 글로 쓰면서도, 어린 시절 울며 토해냈던 감정들이 다시 스물스물 올라온다.
5년 전, 엄마는 치매가 진행되어 고향 근처의 작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면회를 갈 때마다 “집에 가야 한다”며 보따리를 싸 오신다.
그 보따리엔 옷 한 벌, 내가 선물한 인형, 그리고 염색용 비닐장갑이 수북이 담겨 있다.
그토록 커 보였던 엄마의 세계가, 이제는 이렇게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오니
가슴이 저려온다.
이제야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인생이 얼마나 고되고 외로웠을지 조금은 짐작된다.
팔려오듯 시집와보니 만만치 않은 홀시어머니, 한 톨의 쌀도 없는 가난한 살림,
무뚝뚝한 남편과의 고단한 삶…
그 속에서 얼마나 눈물바람이셨을까?
이제 그 나이를 지나와보니 알 것 같다.
엄마는 지금 골다공증이 심해, 작은 움직임에도 갈비뼈에 금이 가신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미어질 듯 아프다.
젊은 시절, 당신 자신도 조금 더 보살피며 사셨더라면…
엄마는 내게 따뜻한 품을 내어 주시진 않으셨지만,
이제는 내가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드린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엄마에게, 마스크를 벗고 입모양으로 “사랑해요”라고 전한다.
고생으로 거칠어진 두 손을 꼭 잡고, 가만히 안아드린다.
그래도, 엄마라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주신 고마운 분이니까.
오늘도 밴드에 올라온 엄마 사진을 스크랩하며 가만히 바라본다.
그냥 이대로라도, 곁에 오래 계셔주시길.
그저, 그렇게 엄마의 자리를 지켜주시기만 하시길 또 그렇게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