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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Dec 12. 2024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유진목/ 파르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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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거 알지

저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도와줘

저 사람이 나를 죽였어요

그는 죽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해가 지고

해가 뜨고

나중에는 날짜를 세는 것도 잊어버리고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돌아가고

시간이 갈수록 너무 끔찍해서

내가 죽은 걸 아무도 모르길 바랐어

살아있을 때도 살은 계속 살펴야 하잖아

더러워지면 씻고

상처가 나면 치료를 하고

하지만 죽었는데 어떡해

뼈는 희고 깨끗해서

나는 빨리 뼈가 되고 싶었어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한번은 이제 태어나나 보다 하면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가

생각한대로 잘 되지 않았다

한번은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이리 도망치고 저리 도망치다가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구나 했다

지난번에 태어났을 때는 불편한 게 너무 많았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그래도 어떤 건 옛날이 그리워요

한번은 너무 금방 다시 태어나서

내가 살던 집이 생각이 나더라고

집에 가고 싶어서 악을 쓰고 울었지

그러면 엄마가 와서 젖을 물리고

나는 혀로 밀어내고

두고 온 사람이 보고 싶어서

울다 까무러치고

울다 까무러치고

그래서 그 다음에는 너무 금방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치고 그랬던 거지

한번은 한참을 죽어서 있다가

당신도 죽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함께 마루에 앉아 저녁을 먹었던 거

손을 잡고 걸었던 거

늙은 몸으로

젊은 몸으로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던 거

옛날에 그는 지금과는 다른 여자였다

짙은 눈썹에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졌고

취미로 화분을 가꾸거나

지루한 시간을 잊기 위해 담배를 피웠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며

먼 곳의 소식을 궁금해하지만

가까운 이의 속내는 알고 싶지 않았다

섹스를 하더라도

대화를 하지 않는 방식

그는 지금과는 다른 언어로 말하고

좀 더 아는 것이 많았지만

사랑할 줄은 몰랐다

남자들이 그에게 사정하는 것이 좋았다

그는 지금 전쟁을 겪지 않아서 좋다

그는 지금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그가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그는 꿈에서도 그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고

아까 죽었는데 왜 또 살아났는지

눈을 뜨자마자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길에서 여자가 강간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길에서 여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여자인 것을 확인하고

여자로 사느니 즉사하고 싶었다

그는 여러 번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한번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한번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파르카이)


유진목 시집, <식물원>, 아침달, 2018



2020년 12월 11일. 이 시집을 처음 읽은 날의 일기를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어두운 초록의 표지, 절반은 흑백사진, 절반은 시로 구성된 독특한 편집, 시가 끝난 뒤에야 알 수 있는 시의 제목. (덕분에 나는 제목을 알고 시를 읽으면 시의 해석에 제한을 받지만, 시를 읽은 뒤 제목을 알게 되면 제목에 쓰인 단어의 관념적 틀이 깨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시집을 전자레인지 위에 오래 두고 들여다 보았다. 어떤 날은 가방에 넣어 출근했다. 펼쳐보지 못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려운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프고도 좋았다.


'파르카이'는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파르카이'를 읽고는 앞에 시들이 모두 하얗게 날아가버렸다.

-이른 아침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전 생애를 지나버린 한 사람이 나오고 있다.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얇디 얇은 시집 한 권이 한 사람의 압축된 생애처럼 보였다. 고요히. 잠들어 있는.


'파르카이'가 뭔지 몰라 찾아보았다. 로마신화 속 '운명의 여신들'이라고 한다. '노나'는 운명의 실을 뽑아내고, '데키마'는 인간에게 그 실을 나눠주고(탄생, 운명을 배당하고), '모르타'는 운명의 실을 가위로 끊어내는 (죽음)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미술작품에서는 젊은 처녀로 표현되고 있으나, 전설에서는 무섭게 생긴 노파에다 절름발이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운명의 걸음걸이는 무거운 것이라 해석된다고.


운명의 무거운 걸음걸이... 이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읊조려보다 다시 한번 시로 돌아간다. 나는 이런 순간이 좋다. 몰랐던 것을 알고 난 뒤 좋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보는 순간.


여러번 죽고 살아도, 심지어 이전 생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다시 태어나도,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 막지 못한다는 말이,

여전히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슬프다.

그러나 그것이 운명이겠거니 생각한다.

운명이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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