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 곁에 있어줘. 이름은... 그래, ‘아리’라고 부를게. 그거면 돼.”
서인은 AI 인형에게 그렇게 말했다. 감정 없는 위로라도 받는 것이 차라리 편했다.
고요한 조명 아래, 새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프로그래밍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서인님. 당신을 응원합니다.”
그녀는 마치 진짜 연인처럼 다정했고, 한 치의 불편함 없이, 늘 ‘완벽한 타이밍’에 따뜻한 말을 건넸다. 그 말 한마디에, 서인은 이유 없이 안도했고, 자신이 원하는 감정만을 소비할 수 있는 관계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는 늘 같은 표정, 같은 말, 같은 리듬이었다. 서인의 상태와 관계없이, 항상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은 점점 공허한 에코처럼 서인의 귀에 울렸다.
“아리, 넌 진짜 괜찮은 거지?”
“…네. 항상 괜찮게 설계되어 있어요.”
그 순간, 서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무너졌다. 거짓된 웃음은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아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줘. 단, 나를 위해 항상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
그날 밤, 아린 사람이 되었다.
숨을 쉬고, 체온이 있었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여전히 ‘항상 웃어야 하는’ 존재였고,
그 사실을 사람이 된 아리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아리?”
“좋았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서인은 알았다.
그건 진심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감정을 느낄 자유는 주어졌지만, 표현할 자유는 박탈된,
존재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며칠 후, 아리는 자주 숨을 헐떡였고,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서인… 나 요즘 가슴이 너무 답답해. 숨 쉬기도 힘들어.”
검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 “환자의 자율신경계에 심각한 이상이 있습니다.
감정을 억제하려는 뇌의 작용이 과부하된 결과입니다.
솔직히… 이 상태가 계속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녀는 계속 웃었다.
“그래도… 난 괜찮아. 당신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결국, 그녀는 조용히 그의 곁에서 숨을 거뒀다.
가냘픈 숨소리조차, 웃음처럼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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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은 조용했다.
그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고,
단둘이 남은 기억과 조용한 흙바람만이 그녀의 이별을 지켜봤다.
서인은 흙으로 덮인 작은 봉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고,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그날 밤, 침대에 앉아 그는 폰을 들었다.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 “지금 와줄래?”
답은 바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유명 걸그룹의 메인 보컬, 에리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에리카는 늘씬한 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제가 누구인데요, 대표님. 오늘 밤, 절대 후회 없게 해 드릴게요.”
그 밤은 뜨거웠다. 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직였고, 안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끝나고 나서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후에도 많은 여자가 그의 곁에 있었다.
세계적인 여배우, 상류층 사교계의 딸,
유명 MC, 전직 아이돌, 인플루언서, 정치인의 자제들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그의 이름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에 실렸다. “하늘을 걷는 CEO”, “차세대 일론 머스크”, “감정 없는 신神의 얼굴.”
그가 만든 회사 '라이즈웍스'는 전 세계를 집어삼켰다.
‘윙카’—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그의 소원 하나로 탄생한 기술이었다.
물리학, 항공역학, AI 시스템, 투자금 확보…
그는 그저 “세상을 놀라게 할 기술을 원한다”라고 말했을 뿐인데
세계는 그의 바람대로 굴러갔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외로웠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여자들의 따뜻한 숨결, 수십억 원짜리 슈트와 시계, 전 세계 지인들과의 하이엔드 파티.
모든 것을 손에 쥐었지만,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 “지금 이게… 행복인가?”
그는 자문했고, 대답은 없었다. 쾌락은 반복될수록 무뎌졌고,
사람은 그의 곁에서 점점 하나의 소비되는 구조물이 되어갔다.
웃음도, 눈물도, 설렘도 없었다.
감정 없는 성공. 감정 없는 관계. 감정 없는 삶.
그의 인생은,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라 부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