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사나이의 초상

by 시칠리아노

지금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을 듣고 있습니다. 2악장입니다. 당연히 아다지오지요. '느리게 조금 활기있게'라는 악상기호가 붙어 있는데 베토벤의 모든 곡 중 가장 우아한 곡입니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꺼냈습니다. '자화상. 2000. 겨울'이라는 시인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초나라에 한 사나이가 살았다

서안으로 가려고 말과 마부와 마차를 샀다

길을 나서자 사람들이 말했다

이보오.

그쪽은 서안으로 가는 길이 아니오

사나이가 대답했다

무슨 소리요?

말들은 튼튼하고 마부는 노련하오

공들여 만든 마차가 있고

여비도 넉넉하오

걱정 마시오. 나는

서안으로 갈 수 있소


세월이 흐른 뒤

저문 사막 가운데

먹을 것도 돈도 떨어지고

마부는 도망치고

말들은 죽고 더러 병들고

홀로 모래밭에 발이 묻힌

사나이가 있다


마른 목구멍에

서걱이는 모래흙.

되짚어갈 발자국들은

길 위의 바람이 쓸어간 지 오래

집념도 오기도 투지도

어떤 치열함과 처연한

인내도

사나이를 서안으로 데려다주지 못한다


초나라의 사나이,

먼 눈

병든 몸으로 영원히

서안으로 가지 못한다


자화상이니 자신의 상황을 우화로 말하는 시입니다. 2000년 겨울이면 세기말이고 한강 나이 29살입니다. 29살에 삶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며 영원히 서안으로 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한강의 서안은 무엇이었을까요? 29살이면 많이 살았다고 착각하기 쉬운 나이인데 한강도 그러했나 봅니다. 시작도 안 한 나이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잘못든 방향은 결혼과 육아일 수도 있을까요? 글을 읽고 쓰는 삶을 살고 싶은데 이제는 그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궁금합니다. 29살에 '영원히 서안으로 가지 못한다'라고 절망했던 한강은 50대인 지금, 서안에서 살고 있을까요?


'집념도 오기도 투지도 어떤 치열함과 처연한 인내도' 방향이 잘못 되면 소용 없음이 화자가 말하려는 것일 텐데 반백을 살아보니 '집념도 오기도 투지도 어떤 치열함과 처연한 인내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사막을 지나고 있고 평생 사막을 걸어갈 텐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사막의 시린 밤에 바라보는 쏟아질 듯한 별을 본 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채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 아니라 태도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막을 천천히 걸어 갈까요? 까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별만큼이나 반짝이는 뜨거운 모래를 밟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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