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꽃 — 잊히지 않는 계절에 피는 마음

봉선화꽃 — 잊히지 않는 계절에 피는 마음

by 김기수

봉선화꽃 — 잊히지 않는 계절에 피는 마음


어릴 적, 여름 끝자락의 마당 한구석엔

언제나 봉선화꽃이 피어 있었다.

작고 여린 듯하면서도 선명한 주홍빛, 분홍빛 꽃잎들이

그늘진 햇살 아래서도 또렷하게 피어나는 모습은

아이 같던 나에게도 무언가 오래된 약속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꽃잎을 따서

사랑스러운 손길로 내 손톱에 올려주고,

잎사귀와 함께 돌돌 말아 봉긋한 손톱 위에 얹어주곤 했다.

“이게 붉게 물들면, 그리운 사람이 다시 돌아온단다.”

그 말을 믿고 나는 종일 손을 들여다보았다.

꽃물이 드는 시간은, 어린 내게는

마법처럼 느리면서도 기적처럼 설렜다.


하지만 꽃은 결국 시들고,

손톱에 남은 붉은 자국도 몇 날 지나면 흐려졌다.

다시 돌아올 거라던 그 사람도,

그렇게 꽃잎처럼 희미해져만 갔다.


그 이후로 봉선화꽃은 내게

단지 여름의 식물이 아니었다.

그건 기다림이었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었고,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으며,

한 계절이 지나도 아직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 그 자체였다.


시간은 지나고,

나도 누군가의 이름을 품은 채 살아가게 되었다.

꽃잎 대신 편지를 쓰고,

물들이는 대신 기억을 꾹 눌러 가슴에 담았다.

봉선화꽃처럼 선명하게 피어난 마음은

말 한마디 없이도 누군가의 시간 속에서 피어나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여름,

오랜만에 들른 시골 마당 끝에서

다시 봉선화꽃을 보았다.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이젠 물들이지 않았지만,

그 꽃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오래된 위로를 받았다.

말없이 피어 있는 것,

그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세상은 계속 변해가고,

우리는 더 많은 이별과 더 많은 기다림 속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하지만 봉선화꽃처럼

기억의 한 모서리에 묵묵히 피어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결코 잊힌 것이 아니다.



마무리의 말 — 봉선화꽃, 그 이름 아래


봉선화꽃은 결국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사랑이 있다.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약속이 있다.


손톱 위에 물들이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 꽃이 피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아마, 봉선화꽃은 평생 피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봉선화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말없이 다가와 마음에 색을 남기고,

때로는 그 사람이 다시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는 그런 존재.


비록 붉게 물든 손톱처럼 눈에 띄지 않아도,

우리가 건넨 말 한마디,

내민 손길 하나,

지켜본 침묵 하나가

어떤 이의 하루를 조용히 물들이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봉선화꽃처럼 피어나길 바란다.

누군가의 계절에 작지만 깊은 색으로 남기를.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에 스며들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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