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지는 빛의 문장들: 오후 다섯 시와 저녁

오후 다섯 시와 저녁 일곱 시 사이

by 김기수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 옥타브 낮아지고

도시의 그림자가 자신의 키를 끝없이 늘려가는 시간.

창가에 놓인 화분의 잎사귀가

마지막 햇살을 한 모금 머금었다가

툭, 하고 어둠 쪽으로 고개를 떨굽니다.

분명 정오의 나는 단단한 땅을 딛고 서서

논리와 이성의 언어로 하루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기울어진 빛의 각도가 내 방 안 깊숙이 침범하는 순간

내 안의 질서들은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 시간의 공기는 참으로 기묘한 연금술사여서

평범한 커피 잔의 온기조차

오래전 헤어진 이의 체온으로 바꾸어 놓고,

벽지에 비친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떨림으로 오독하게 만듭니다.

기분은 시시각각 색을 바꿉니다.

처음엔 연한 오렌지빛 설렘이었다가

해의 꼬리가 지평선 아래로 잠기면

어느새 짙은 보랏빛 쓸쓸함이 차오릅니다.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 하나하나가

마치 읽다 만 소설의 뒷이야기처럼 궁금해지고,

나만 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묘한 고립감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시간.

무언가가 자꾸만 생각나게 합니다.

성급히 닫아버렸던 마음의 서랍들이

이 느슨해진 빛의 틈새를 타 하나둘 열립니다.


하지 못했던 말들,

혹은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들.

어느 계절의 길목에서 놓쳐버린 인연의 끝자락과

먼지 쌓인 앨범 속에서나 만날 법한

어린 날의 나의 얼굴이 불쑥 고개를 내밉니다.

기억은 먼지처럼 차분히 쌓여 있다가도

이 시간의 미풍에는 속절없이 불려 나와 눈앞을 어지럽힙니다.


성공보다는 작고 소박했던 실패의 기억들이

더욱 애틋한 온기로 다가오고,

가진 것보다는 잃어버린 것들의 이름이

더욱 선명한 문장으로 각인되는 역설의 순간.

하얀 화면 위에

이 정제되지 않은 마음의 파편들을 쏟아 놓습니다.

글자들은 때로 눈물이 되고, 때로 한숨이 되며,

때로는 내일을 살아가게 할 단단한 지팡이가 됩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면

나는 다시 무심한 일상의 옷을 입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밤을 맞이하겠지만,

지금 이 '기울어진 빛' 아래서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영혼이 되어 숨을 쉽니다.

변화무쌍한 기분의 파도를 타며

나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그리워하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잔상(殘像)을 통해 깨닫습니다.


오늘도 이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와

나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입니다.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고,

기울어지는 것은 추락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의 진실을 만나러 가는

아름다운 여정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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