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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전에 봄. 아폴로 앞에서.

01–릴케의 시와 나의 고요한 변화를 바라보며

by 김기수


《말하기 전의 봄, 아폴로 앞에서》


그는 아직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은 시작되고 있었다.


아침이 창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잎 하나 없는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얼굴을 만지고 간다.


그건 아직 봄이라 부르기엔 이른 온기였지만,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 계절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새 완연한 봄.’

어디선가 시작된 생명의 기척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내 안에도 도달해 있었다.


릴케는 그런 순간을 안다.

《초기의 아폴로》, 그 시에서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의 형상,

말하기 전의 아폴로를 마주한다.



아직 잎이 없는 나뭇가지 사이로

어느새 완연히 봄이 된 아침이 가끔 들여다보는 것처럼

모든 시의 광채가 우리를 거의 쓰러뜨릴 만큼 와 닿는데

그것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이 그의 머리에는 하나도 없다.



나는 이 구절 앞에서 오래 멈췄다.

‘모든 시의 광채’라는 말이,

내 삶에 아직 닿지 않은 말들의 무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자,

아직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였다.


그러나 릴케는 말한다.

그 준비되지 않은 형상조차,

이미 ‘빛’을 품고 있다고.



말이 없는 입.

그 침묵은 허공이 아니라,

속으로 노래를 흘려넣고 있는 상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그 입은 아직도 조용하고,

반짝거리면서 미소와 함께 무엇인가 들이마시고만 있다,

마치 그의 속으로 그의 노래를 흘려 넣는 것같이.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무언가가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음을 느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내 안의 침묵은 단지 고요함이 아니라

‘준비’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은 자꾸 ‘말하라’고 요구한다.

소리 내어 증명하고, 흔적을 남기고,

빠르게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릴케는

그 ‘말하기 이전의 시간’이 얼마나 신성한지를 알려준다.

예술도, 존재도, 삶도

그 침묵 속에서 노래를 받아들인다.



나는 이제 서두르지 않는다.

아폴로처럼, 나도 아직 준비 중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멈춰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으로 스며드는 봄처럼,

말 없는 말들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릴케는 시의 마지막에서

‘꽃잎이 그의 입으로 떨어지는 것은

나중에야 비로소 있을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 ‘나중’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견디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다정한 약속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조용히 노래를 받아들이는 입이 될 수 있다.

말 없는 노래를 기억하는 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봄은, 말보다 먼저 도착할 것이다.




초기의 아폴로

Früher Apollo

R. M 릴케-지음

아직 잎이 없는 나뭇가지 사이로

어느새 완연히 봄이 된 아침이 가끔 들여다보는 것처럼

모든 시詩의 광채가 우리를 거의 쓰러뜨릴 만큼 와 닿는데

그것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이

그의 머리에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아직 그늘이 없고,

그의 관자놀이는 월계관을 쓰기에는 아직도 너무 차갑다.

그리고 그의 눈썹 위에 장미꽃들이 높이 자라나서

풀려난 꽃잎이 한 잎 두 잎

떨고 있는 그의 입으로 떨어지는 것은

나중에야 비로소 있을 일이다.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그 입은 아직도 조용하고,

반짝거리면서 미소와 함께 무엇인가 들이마시고만 있다,

마치 그의 속으로 그의 노래를 흘려 넣는 것같이.


아래에서 이 시의 내용, 시대적 배경, 릴케 자신의 내면, 그리고 전체 메시지를 함께 풀어볼까 합니다.

1. 시대적 배경


이 시는 릴케가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

예술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키우던 초기 형이상학적 전환기에 쓰였다고 여겨집니다.

• 이 시기 릴케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을 여행하며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시 세계를 넓히고 있었어요.

• 특히 파리에서 로댕과 교류하면서 ’형태(Form)’와 ’응시(Blick)’의 중요성에 눈뜨게 됩니다.

• 이 시는 그 이전 단계, 그러니까 릴케가 예술을 ‘이해하려고 하던 시기’의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시의 핵심 구조와 이미지 해석


1연: “아직 잎이 없는 가지 사이로 봄이 들여다보는 아침”

•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는 이미 도착해 있고,

그 ‘가능성’이 희미하게 엿보이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 ‘모든 시의 광채’는 이 봄처럼 우리를 압도하지만,

그것을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 —> 미성숙한 상태의 아폴로


2연~3연: 아폴로의 불완전함

• 그의 머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월계관(시와 예술의 상징)을 쓰기엔 너무 차갑고, 눈에도 아직 그늘이 없다.

• 장미가 눈썹 위에 피고, 꽃잎이 ‘입’으로 떨어지는 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노래하지 않는’, 침묵 속의 신


4연~5연: 입, 그리고 내면의 노래

• 아폴로의 입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즉 아직 말하지 않은, 예술을 시작하지 않은 입입니다.

• 그러나 그는 조용히 무언가를 ‘들이마시고’ 있으며,

그것은 곧 “그의 노래가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3. 릴케 자신의 내면과 상황


이 시를 통해 릴케는 자신을 아폴로에 투사하고 있어요.

즉, 이 시의 ‘아직 말하지 않는 아폴로’는 **‘아직 시를 완성하지 못한 시인 릴케 자신’**입니다.

• 그는 이미 ‘시의 빛’을 알고 있고, 그것의 위대함에 압도당하지만,

아직 스스로 그 빛을 받아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 릴케는 고독한 예술의 탄생을 기다리는 자이며,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말할 것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4. 전체 메시지와 아름다움


이 시는 완성되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말하기 전의 고요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릴케에게 ‘시’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응시와 침묵, 그리고 내면의 노래입니다.

• 이 시는 릴케의 예술론이 서서히 태동하는 지점,

그리고 시인이 되기 위한 준비의 시간, 고요의 시기를 찬미합니다.



당신에게 이 시가 건네는 질문

• 나 역시 내 인생에서 아직 말을 시작하지 못한,

그런 ‘초기 아폴로’ 같은 존재는 아닌가?

•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내 안에 무엇인가가

조용히 자라고 있다는 신호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글은 릴케의 시를 ‘이해’하기보다는

그 시와 함께 머무는 감정을 중심으로 썼다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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