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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환 Sep 07. 2023

난 왜 시계에 미쳐있는가

BLANCPAIN X SWATCH

기다렸다. 두 회사의 협업 뉴스가 인터넷에 쌓이는 것을 지켜보며.

굵직한 인플루언서들의 보도에도 귀를 기울였고, 꼬리 물듯 달린 익명의 사견들 하나하나에도 집중했다. 신선한 새로움을 한껏 만끽하며 기쁨에 요동치는 심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곧 사유의 장이다.

무엇이든 기다려 본 사람은 생각이 기다림이란 과정 속을 알알이 채우는 경험에 고개를 끄덕일 거다. 그 생각의 종지부를 찾을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의 기다림에선

‘난 왜 이 바이오세라믹 시계에 기뻐하는가’부터

‘왜 난 시계에 미쳐있는가’까지 원론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그래서 원하는 답을 찾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찾았고, 이 시계 속에 있다.

어머니 손을 끌고 코엑스 앞 피프티패덤즈의 3차원 광고를 보며 어떤 시계인가 침을 튀기며 설명하던 과거와 시계 속에 푹 빠져 출판까지 준비하는 오늘.

그간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총 다섯 개의 시계를 전개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살구색 시계. 오대양 중 가장 작고, 얼음처럼 찬 북극해Arctic Ocean다. 친환경 소재와 시스템51 오토매틱 무브먼트 넣어준 거 대단하고, 고맙다.

근데 그거 말고 봐야할 건 시계 중앙부. 반나절 가량 이어진 사유의 매듭이 이 ‘방사능 로고’에 있어서다.

다음 사진을 보면 비슷한 로고가 박힌 피프티패덤즈가 있다.

블랑팡 트리뷰트 투 피프티패덤즈 노 래디에이션 Blancpain Tribute To FiftyFathoms No Radiation(2021). 복각된 한정판 시계다. 이름이 길어 ‘No Rad 노 래드’로 불리는데, 로고는 다이얼에 방사능 야광 물질인 라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


라듐은 자연 발광하는 성질 때문에 20세기 초부터 많은 분야에서 쓰였는데, 손목시계 역시 그중 하나. 라듐이 내뿜는 방사선이 상당히 강력했지만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해 별도의 보호장치 없이 시계를 제작했다. 작업공들이 사망하는 경우까지 생겨 점점 위험을 인지해 결국 삼중수소로 대체되었고, 1950년대 이후로 시계에서 라듐을 찾아볼 순 없게 되었다. 시류를 파악한 블랑팡은 1960년대 피프티패덤즈에 ‘노 래디에이션’ 로고를 사용했다고.


라듐 걸스Radium Girls는 미국 라듐 제품 제조 공장에서 시계 야광판을 칠하던 중 피폭당한 여성 노동자를 의미한다. 라듐의 위험성을 알리는 계기는 물론 미국 내 노동 환경 개선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라듐 걸스와 ‘노 래드’는 인류 역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건이고, 로고다.

과거의 아픔이 오늘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것, 아픔을 곱씹어 한 발 앞서 나가는 것은 인간이라 가능한 거다. 피폭된 여공들의 상처는 인권과 여권 신장을 위한 양질의 거름이다.


수십만 원 스와치와 천만 원대 블랑팡 속 ‘노 래드’. 우스운 장난감 시계로 보일 수 있고, 사치품이라며 눈을 흘길 수 있지만 로고 속 역사를 기억하자는 숭고함을 뭉갤 순 없을 거다.

가벼움 속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진중함.

시계에 미쳐있는 이유다.


그리고 방구석 그들. 집에서 그러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이 시계 한 번 차 봐라.

본받고 싶은 게 여권 신장을 위해 힘쓴 순교자들이지 분탕질에 열심인 훌리건은 아닐 거 아니냐. ‘노 래드’ 로고부터 배우고, 무엇이든 주장하려거든 여기서부터 시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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