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배움으로 살아낸 사람

by 장은경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

우리 아버지다.


6·25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자랐고

적에 부모를 잃고,
자식 여섯을 둔 큰형 집에서 얹혀 지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 세상은 참 차갑고 배고팠다.

모래 먼지가 일던 시골 마을에서
밥 한 끼 해결하는 것이 하루의 목표였고,
공부는 손에 닿지 않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그 점이 늘 서러웠다고 했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마음속에 더 깊이 남았던 상처—
‘배우지 못했다’는 아픔이었다.


서당 마루에 앉아 붓을 잡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어 서당 밖에 앉아 소리를 듣고,
남이 팽개친 밀가루 포대 위에 타다 남긴 숯으로 글을 쓰고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글자를 따라 쓰셨다고 하셨다.


바람이 스치면 금세 사라지는 글씨였지만,

그때 새겨진 마음만큼은

세월이 흘러도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아주 작은 유산이었지만 큰아버지가 혼자 차지했을 때도
아버지는 오래 원망하지 않으셨다.


“자식이 여섯이나 돼가꼬

입에 풀칠하기도 고될 것인디,

군식구인 나까지 안 내치고

꼬 살아 준 것도 고맙게 생각해야제.”


그 눈빛에는 이해와 용서라기보다
삶을 깊이 바라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넉넉함이 배어 있었다.


“배우는 것이 밥 먹는 것보다
훨씬 귀한 법이어.”

그 말에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만큼은
반드시 대학까지 보내야 한다고 다짐하셨다.


그러나 우리 집은 늘 빠듯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초가집,
초등학생이 되자 슬레이트집,
고등학생이 될 무렵에는 벽돌집으로 바뀌었다.


그 집의 벽 하나하나에는
아버지의 땀과 묵묵함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겨울이면 장작 타는 냄새가 은근하게 퍼지고,
이불 위로 손을 올리면
햇볕처럼 포근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 따스함 한편에서
아버지는 농사일지를 펼쳐 들곤 하셨다.

기록은 아버지의 또 다른 배움이었다.


3년 치를 함께 쓸 수 있는 두꺼운 일기장.
매일 저녁이면 작년, 재작년에 쓰셨던
농사일지를 펼쳐 보며 다시 기록을 이어 가셨다.


‘4월 12일 모판 설치.’
‘5월 8일 비가 적어 논이 말라 물길 새로 냄.’
‘6월 3일 바람이 세서 이삭 눕기 시작함.’


‘올해는 추위가 심한게 작년보다 조끔 늦게
모를 심어야것네.’


아버지의 자세하고 성실한 기록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버지만의 지식이었다.


농촌지도소에서 직원이 찾아와
아버지의 일지를 보고
연신 감탄했다.


“그저… 잘해 볼라고 그런 것인디.”

겉으로는 말수가 적으셨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한 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를 게을리하면
그 따뜻한 손은 단호하게 변했다.


“나는 못 배웠응게
느그들은 끝까지 가르칠랑게.”

매보다 더 깊이 남는 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단순한 농부가 아니었다.


삶을 배우고,
자연을 읽고,
자식들에게 미래를 건네주기 위해
자신의 하루를 통째로 내어놓은 사람이었다.


어릴 땐 몰랐던 그 마음이

이제는 내 안에서
조용한 울림이 되어 살아 있다.


그래서 무엇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곤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평생 살아낸 그 한마디—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 말은 지금도
내 인생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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