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독서생활을 반성하며
구차한 몸부림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다
요즘 김훈 작가 소설에 재미를 붙였다. 문장은 짧고, 표현은 담백하며, 묘사는 생생하다. 책을 읽노라면 왜 그를 흠모하는 사람이 많은지 알 만도 하다. 김훈 작가가 쓴 글은 치밀하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으로 이어지는 연작은 모두 사료에서 시작한다. 몇 줄짜리 기록이 김훈을 만나 다시 태어난 결과다. 그러다 보니 작가가 만든 순수 창작물이 궁금했다. 다행히 자전적 소설 격인 <공터에서>가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를 관통하는 데는 삼대면 충분하다. 일제 강점기에서 근현대사를 거쳐 현대로 들어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딱 그 정도다. 굳이 따지자면 김훈은 해방기와 근현대사를 지나는 시대 언저리 세대다. 소설 대부분이 그 즈음을 다룬 이유다. 주인공은 글쟁이에서 배달부로, 배달부에서 무역업자로, 무역업자에서 다시 배달부로 직업을 바꾼다. 작가는 소설 말미에 소설이 어느 정도 자전적임을 시인한다. 책을 덮을 즈음에야 좋은 글을 쓰려면 다독, 다작, 다상량하라는 고사를 떠올리게 된다.
<공터에서>는 사소하다. 좀 점잖음을 덜어낸다면 구차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매력적인 이유는 가식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모두 가식적이다. 물론 가식은 필요하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가식이 없다면 배려도 사라질 테니까. 그러나 가식적이기만 해선 진심이 사라진다. 최근 신문을 읽으면서 '좀 덜 가식적일 순 없나?'라는 생각을 한다. 바로 가면 납득할 말도 가식을 더하니 어려워진다. 구차할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가 필요한 세상이 됐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깨닫는다.
안다는 오만에 대하여
누구나 아픔을 겪고 살아간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등등. 같은 사건도 누군가에겐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겐 트라우마가 돤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애 행동에 원인이 있단 얘기다. 나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다. 사람 관계가 끝날 땐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동시에 상처에 바를 연고도 준다. 이 책은 꼭 연고 같았다. 사람을 잊고 싶어 읽어 치우려던 책에서 새로운 생각거리를 찾았다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살고, 부모님 직업은 의사다. 이런 가정에 태어났다면 속칭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셈이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긴다. 고등학교 3학년, 친구 관계가 어긋나자 딸이 정신병에 걸렸다. 불안 증세에서 시작한 병은 자해와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다. 7년 동안 시설 입원도 수 차례 반복했다. 정확한 병명을 아는 데만 6년이 걸렸다. 구구절절한 기록은 정신질환자를 가족으로 둔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제 와서 정신질환자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열악한 지원 제도를 논하고 싶진 않다. 내가 고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수록 세상은 조각날 텐데, 얼마나 많은 유사 사례가 일어날까. 내가 당사자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고민거리는 차라리 이 쪽에 가깝다. 남 일일 때와 내 일일 땐 다르지 않나. 책을 덮으니 저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외치는 절규가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인류는 멸망했...나?
드디어 대서사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읽으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기술이 발전해도 사랑이 중요하다'라는 고루한 클리셰를 답습할까봐서였다. 그동안 SF서사에서 인간은 기계의 대척점에 있었다. 따라서 공상과학 장르에서 인간은 늘 기계에서 볼 수 없는 속성을 갖추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엔 재밌는 시도였지만, 수많은 작가가 한 세기 넘게 같은 클리셰를 재탕한 덕에 지금은 지겨움이 앞선다.
인류 대 삼체 문명 사이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 삼체 문명이 태양계를 접수하지도, 인류가 삼체 문명을 패퇴시키지도 못했다. 대신 삼체 문명은 항상계 채로 날아가 버렸고, 인류 문명은 2차원 속에 갇혔다. 사이 좋게 멸망한 셈이다. 그러나 개인 차원에서 인류는 생존했다. 다시 한 번 사랑 덕분에. 고루한 클리셰를 반복한 탓에 소우주를 만들어 빅 크런치를 피한다는 참신한 발상은 빛을 잃었다.
책을 읽는 재미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 재미있다. 문체는 술술 읽을 만큼 단순했고, 몇 발상은 감탄을 내지를 만큼 참신했다. 우주적 관점에서 문명 간 접촉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도 유익했다. 그래서 더 아쉽다. 최근 대중 가요도 수십 년 이어오던 사랑 놀음을 그쳤는데 이젠 공상 과학 장르 소설에서도 다른 이야기를 보고 싶다.
좋은 글은 어떻게 쓰는가?
독서와 글짓기. 방송인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얼마 전부터 활자에 중독됐다. 출근 전에 신문 두 부를 읽고, 퇴근 직후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책 읽기는 재밌지만 글쓰기는 괴롭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이다. 키보드 앞에 앉을 때마다 심금을 울리는 글이 아니면 안 쓰겠다는 고약한 심보와 사투를 벌인다. 그러다 보니 느는 건 필사뿐이었다. 퓰리처상. 타고난 글쟁이들 가운데 탁월한 글쟁이가 받는 상이다. 그런 글을 파헤친다니. 홀릴 이유는 충분했다.
언론사 시험 합격자들은 평범한 주제로 평범하지 않은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의사 협회 파업 사태를 다루면서 우리나라 산업 구조 문제를 다루거나, 남북한 갈등 문제를 다루면서 기후 변화를 함께 다루는 식이다. 간단해 보여도 어렵다. 평소 사회 문제를 많이 접하면서 본인 생각을 계속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사 입사 시험이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이유다. 저자는 책에 그런 글을 쓰려면 어떤 연습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써놓았다.
논작문을 처음 준비할 때 '모든 글은 같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땐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목적에 따른 글짓기는 분명 구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좋은 글은 보여주는 글이다. 기사를 읽든, 소설을 읽든 결국 현장이 보여야 한다. 경지에 이르면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했던가. 아직은 멀었지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알겠다.
열은 사라지지 않는다
올해 초 이언 어비나가 쓴 <무법의 바다>를 읽었다. 저널리즘은 언제나 불편한 진실을 까발린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도 기억난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선하고,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악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마주하면 불편하다. 이런 점에서 기자는 현대판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인에게 진리를 설파하다 독주를 마셨다. 기자도 대중에게 진실을 설파한다. 설령 독주를 마시게 될 지라도.
이런 점에서 폭염 살인은 저널리즘의 본질을 꿰뚫은 책이었다. 여름은 해마다 더워진다. 20년 전, 여름 기온이 처음 30도를 넘었을 때 나는 이 이상 기온이 올라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엔 여름이 되면 기온이 40도 가까이 오른다. 여름이 더워지는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면? 아마 열에 아홉은 화를 내겠다. 불편한 진실이다. 많든 적든 전기를 사용하고 자동차를 타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온난화에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책임만 강조하면서 양비론을 펼치면 저널리즘이 아니다. 책은 거시적으로 에너지원을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고, 탄소 포집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미시적으론 자원을 소비하면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앎과 실천은 다르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재선이 유력해졌다. 한 달쯤 남았던 지구 멸망을 내일로 앞당기는 소식이다. 이제라도 폭염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야 한다. 죽기 전에 대멸종을 보고 싶지 않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