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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국민, 그리고 국가의 질서

같은 단어를 바라보는 세 시선

by 전지훈

일 년 전, 아버지가 혈당 관리를 시작하기 전 우리 가족은 사흘에 한 번꼴로 야식을 즐겼다. 해가 지고 거실 벽에 걸린 시계 시침이 10을 넘긴 시간, 가족 중 누군가 ‘출출하다’라며 운을 떼면 야식 시간이 시작됐다. 메뉴는 계절에 따라 달랐다. 요즘 같은 겨울엔 집 앞 포장마차에서 맨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붕어빵을, 잠 못 이루는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엔 마찬가지로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포장지에 서리가 잔뜩 서린 '캔디바' 아이스크림을 찾았으니 말이다. 매번 다른 간식을 사러 나가는 사람은 늘 나였다.


고등학생 시절, 부모님이 자정이 넘어 학원이 끝나고 귀가하던 나를 목격한 게 계기였다.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도로에서, 신호등의 붉은 빛이 초록으로 바뀔 때까지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이 꽤 신뢰를 줬던 듯했다. 원리원칙주의자이자 준법 시민이었던 나는 그렇게 밤마다 가게에서 집으로 군고구마부터, 과일, 과자, 빵을 실어나르는 짐꾼이 됐다. 어쩌다 동생이 나 대신 심부름을 하겠다며 나선 적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철통같은 신뢰는 가족의 허기를 달래는 신성한(?) 의무를 제삼자가 이행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국회는 어제 헌정사상 세 번째로 대통령을 탄핵했다. 헌법이 규정하는 계엄 요건을 어겼음에도 자신은 떳떳하다며 물러설 의사를 밝히지 않은 탓이었다. 여당은 헌법을 어긴 대통령이 자진해서 하야하기를 바랐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한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도대체 그들이 이야기하는 ‘질서’란 무엇인가. 법치주의 국가에서 ‘질서’는 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절도나 강도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데서부터 한밤중 홀로 건널목 신호를 지키는 행동까지가 모두 모범적인 '준법 사례'의 근거 아닌가.


사회는 각 구성원이 양심껏 규칙을 지킴으로써 유지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게 ‘질서’다. 헌법을 어긴 대통령이 즉시 물러나지 않는 모습과 그를 지지하는 정당이 그의 의지를 받들어 집권 정당이 되려는 모습은 국민이 생각하는 ‘질서’의 정의와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준법 사회 구성원이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대통령은 위법한 행동을 했다고 자각한 순간 물러났어야 했고 여당 역시 그런 그에게 퇴진을 권유했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두 집단은 위헌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행태를 ‘질서’란 글자로 포장하려 들었다. 명백한 기만이다.


언론도 반성해야 한다. 언론진흥법 10조 1항은 언론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현저히 침해하는 보도를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했다. 이런 근거에서 언론은 여당 대표의 ‘질서 있는 퇴진’이라는 발언을 받아쓰기보다 ‘퇴진’이나 ‘하야’를 요구한다는 표현을 사용했어야 했다. 나아가, ‘국민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수준에 한참 떨어지는 추태를 보이는 이들도 비판했어야 했다. 언론은 사회 위기마다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집단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언론이 권력의 언어가 아닌, 국민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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