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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홧발과 계엄 그리고 탄핵의 추억

아직도 계속되는 추억에 대하여

by 전지훈

첫 탄핵은 군대에서 맞았다. 입대한 지 1년을 막 넘겼을 무렵 상병을 달고 맞은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여느 날처럼 석간조 상번을 했던 그날도 비슷했다. 초소 벽에 매달린 온도계의 붉은 수은은 0도 눈금보다 한참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날숨을 내뱉으면 입김이 솟아올라 눈 앞을 가렸다. 초소 앞으로 길게 뻗은 자모도리는 한밤 어둠에 싸여 적막했다. 저 멀리 콤비 전조등이 희미하게 비쳤다. 늘 짜릿한 순간이었다. 다섯 시간짜리 근무를 마치면, 따뜻한 생활관 취사실에서 맛없는 짬밥 대신 뜨거운 ‘왕뚜껑’ 컵라면 국물을 들이켜 근무 내내 얼어붙은 위장을 녹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콤비를 타고, 상황실에서 하번 보고를 하고, K1A 소총을 반납하고, 스키 파카를 벗고, 마침내 취사실에 들어섰을 땐 깜짝 놀랐다. 팬티 차림에 세면 바구니를 든 까까머리 막내부터, 껄렁하게 깔깔이를 걸친 선임까지 모두 취사실에 있는 벽걸이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홀린 듯 뉴스가 흘러나오는 화면을 보니 국회를 비추는 화면 아래에 붉은 바탕에 흰 자막으로 ‘계엄’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전역을 앞두고 매일 장난을 치던 말년 병장 선임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3일 전 부대로 배속된 막내 얼굴에는 걱정기가 가득했다. 그땐 아직 부대 내 핸드폰 사용이 금지됐던 시기였기에, 부대 안 공중전화 부스에는 밤새도록 집으로, 연인에게 전화하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사흘 뒤,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했다. 덕분에 군인이었던 내가 다른 누군가의 가족이었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군홧발로 짓밟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이 나를 비껴간 지 정확히 8년째 되던 날, 텔레비전에서 ‘계엄’이라는 문구를 다시 만났다. 뉴스 생중계로는 국회 위로 헬기 12대가 날아드는 모습과 국회 앞에서 시민과 군인이 엉겨붙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국회에 난입한 병사들은 하루아침에 ‘계엄군’이 됐고, ‘반란군’이 됐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내란죄로 처벌해야 한다며 언성을 높인다. 일견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그들도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잘못됐음을. 자신들을 막아서는 이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게 군인이라지만, 사실상 항명에 가까울 정도로 태업하는 모습을 보였던 이유도 아마 같은 이유에서 비롯했으리라.


오늘 평소 구독하던 뉴스 앱으로 인생에서 두 번째로 경험하는 탄핵 소식을 들었다. 잘된 일이다. 자신과 아내를 방탄하려 600여 명 젊은이에게 방탄조끼를 입게 한 지도자는 물러나야 마땅하다. 12월 3일 이후로 여당은 지금까지 야당의 폭주로 ‘안보 공백’이 생길지 모른다는 말을 연거푸 쏟아냈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에게 직무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야말로 ‘안보 공백’을 메우는 게 아닌가. 군인에게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안겨 준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선 안 될 말이다. 모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계엄 이후로 국가에 배신감을 느꼈다는 군인이 많다고 한다. 8년 전, 계엄군이 될 뻔했던 사람으로서 지금 군인들이 느낄 여러 실망감에 공감한다. 부디 이번 대통령 탄핵 소식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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