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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 '억울'했나

우리와 사고방식이 다른 이유는 뭘까

by 전지훈

지난해 겨울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스포츠 경기 직관 티켓을 사기 위해 각종 어플을 광적으로 클릭했지만, 대학 시절 수강 신청을 전부 실패했던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시즌이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끝내 서울 학생실내체육관 문턱을 넘진 못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싶은 생각이 치밀어올라 억하심정이 끓어올랐다. 호시탐탐 직관 기회를 엿보다 자리가 남은 구단 경기라도 봐야겠다는 마음에 잠실 실내체육관 경기를 예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해당 구단이 홈구장에서 다섯 경기를 내리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패배요정’이 될 줄은 몰랐다. 참혹했던 기억은 내 인생에서 직관이라는 두 글자를 영영 지워버렸다.


일 년이 지나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매일 읽는 신문 스포츠지면 구석에 농구나 배구 기사가 하나둘씩 실리는 모습을 보고 실내 스포츠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다 모 구단 감독이 선수를 폭행하고 협박한 일로 2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기사를 봤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싶어 구단을 찾아보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작년 그렇게 경기를 보려고 핸드폰 액정을 두들겼던 바로 그 구단이었다. 구단 안팎의 반응도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밖에서는 징계가 너무 가벼워 억울하다 하고, 내부에서는 흔한 일인데 징계가 너무 과해 억울하다고 했다.


국어사전은 ‘억울’이라는 단어를 ‘잘못한 게 없는데도 공연히 꾸중이나 처벌을 받아 분하고 답답함’이라는 뜻으로 규정한다. 결국, ‘무고하다’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단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억울’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알고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육아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싸웠던 아이들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억울하다’라고 말하고, 교도소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범죄자도 철창 너머 PD에게 ‘억울하다’ 하소연하며, 계엄을 저지르고 탄핵당한 대통령도 대국민 담화에서 ‘억울하다’며 읍소한다.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 중 무언가 털끝만큼이라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야 한다.


억울하다는 표현 속에는 ‘그래도 내가 옳다’라는 자기편향이 숨어 있다. 자기 흠결에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조금의 지적도 허용하지 않는 벽을 세우는 마음속에는 자기 과신마저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우리 주변 사회에서 제삼자의 시선에서는 빤히 보이는 잘못을 덮곤 제 눈에 안 보이니 문제없다는 식의 행태가 만연한 이유다. 아집을 내려놓고 깔끔하게 과를 인정하는 게 최선이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일순간 바뀌진 않을 성싶다. 차라리 말이라도 바꾸는 게 낫겠다. 앞으로 무언가 섭섭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억울하다’ 보다는 ‘고깝다’나 ‘섭섭하다’라는 표현을 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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