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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과 '카키토크래시'

거인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에 대하여

by 전지훈

저널리즘을 공부하면서 꼭 알아야 하는 이름을 하나만 꼽으라면, 뉴욕타임스 주필 ‘폴 크루그먼’을 들 수 있다. 경제부터 사회, 정치 분야를 아우르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는 불완전시장에서의 국제무역을 연구한 공로로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랬던 그가 지난달 뉴욕타임스에 고별 칼럼을 기고했다. 활동을 시작한 지 23년 만이었다. 거인은 믈러나는 글에서 세계가 양분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카키토크래시(kakitocracy: 악인에 의한 지배)’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뉴욕타임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의 ‘전쟁’을 선포한 상황을 고려하면, 그가 고별 칼럼에서 언급한 ‘카키토크래시’는 새로운 행정부의 폭거를 의미하는 듯싶다. 미국 저널리즘 업계에서 트럼프는 ‘공공의 적’이다. 그는 12월 14일 ABC가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의 ‘성폭행’ 전력을 언급한 일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했고, 16일에는 선거 기간에 상대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가 트럼프보다 우세하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보낸 신문사 ‘디모인 레지스터’를 고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미국 언론계는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권에 도전하는 그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한국 언론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동안 계속된 언론 장악 시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박민 전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임명해 KBS를 장악했고, 방송통신위원회에 이동관, 김홍일, 류희림 위원장을 차례로 임명하며 MBC를 장악하려 했다. 또, 공영방송 체제로 운영되던 YTN이 유진기업에 매각되며 민영화되기도 했다. 권력이 헌법에 명기된 언론의 자유권을 위협하는 관행이 만연한 세상이 도래한 셈이다. 언론을 위협하는 지도자가 백악관에 들어서기를 기다리는 미국에 비해 12.3 내란으로 통수권자를 탄핵한 국내 사정은 그나마 나아 보인다.


그러나 언론이 ‘카키토크래시’가 정의하는 악을 ‘권력자’로만 해석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언급했듯, 우리가 모두 ‘악인’이 될 가능성이 현저하기 때문이다. 광화문에서 ‘대통령 수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그 증거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분명 위헌이다. 한남동 관저에 틀어박혀 재판 일정을 지연시키고, 위기 때마다 대국민 담화와 편지를 공개하는 태도 역시 의도가 투명하다. 그런데도 일부 시민은 그를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합리적인 이성 대신, 종교적인 광신에 사로잡힌 탓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 국가 시스템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모습을 ‘시민 종교’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광화문에 나선 사람들은 권력자를 신으로, 그에 대항하는 세력은 사탄으로 여긴다. 이들의 세계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메시아라면, 미국은 하나님이 된다. 때문에, 극우 단체 시위에서는 광신적인 기독교 성향이 물씬 배어난다. 광적인 믿음이 맹목적인 신앙관에서 비롯한다는 부분을 떠올리면 이런 기현상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성경 속 예수는 이 같은 믿음을 ‘죄악’이라고 규정했다.


안타깝지만, 우리도 ‘악인’이 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소셜 미디어가 제공하는 알고리즘을 따라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과만 교류하고, 의견이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소거하려 드는 모습은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진영 논리의 벽을 세우고 외부 세력을 정죄하면서도 내 생각만큼은 옳다고 믿는 치졸함은 이미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의 전형이 아닌가. 사회가 남발하는 ‘법대로 하라’라는 말에는 ‘네 말을 듣지도 않겠다’라는 의미가 담겼다. 다시 폴 크루그먼의 칼럼이다. 그의 ‘카키토크래시’는 무엇을 의미하나. 분명 같은 단어인데,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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