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사랑법
사랑은 통념상 ‘미(美)’로 여겨지지만, 그 본질은 추악함을 넘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만화 <빈란드 사가>는 들판에서 썩어가는 충신의 ‘시체’를 사랑으로 묘사한다. 현자는 그를 바라보며, 생전의 그가 보여 준 사랑을 ‘차별’이라고 평가한다. 대상을 정해 마음을 쏟고, 몸을 헌신하는 모습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던 반면, 시체는 그 몸을 뜯어먹는 들짐승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 어떤 식물에 양분을 공급할지를 가리지 않기에 ‘평등’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 아름다움을 강조할수록, 그 사랑이 본질에서 멀어진다는 주제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는지 묻는다.
인간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형사법은 사랑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문유석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가 언급한 대로 그 원칙이 ‘최소한의 선의’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사랑과 연결돼 있다. 한국 형사소송법은 두 가치 위에 서 있다. 사회 구성원이 저마다 지위를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원칙에 동의한다는 ‘무지의 베일’과, 최대 수혜자의 권익 추구 이전에 최소 수혜자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이 그것이다. 한국 사법체계가 피의자를 전제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공정한 처벌 방법을 고민하고, 피의자의 권익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해 합의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우리나라 법 질서가 ‘사랑’의 가치를 준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가치는 예술의 영역에도 적용된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은 오늘날 목가적인 분위기로 사랑받는 작품이지만, 처음 작품이 공개되었던 19세기에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남의 밀밭에 들어가 이삭을 무단으로 줍는 ‘약탈자’들을 미화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야마다 무네키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평등주의 시대에 모두에게 헌신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마츠코가 독자에게 구시대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강요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이 추하며,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려 혐오스러운 두 작품이 ‘진정한 사랑’을 설파하는 주체로 기능한다는 역설을 낳는다.
예수의 사랑도 이와 같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긍휼함을 받을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사랑은 모두에게 평등하면서도 끝없이 베푸는 ‘아가페’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이 같은 원칙을 지향해야 하지만, 이는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오르고자 했던 ‘율법의 산’처럼 이룰 수 없는 목표다.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은, 불완전하게나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에 최소 수혜자에게 줄 수 있는 몫을 남기는 ‘차등의 원칙’을 적용하면 된다. 유한한 삶 속에 원수를 위한 짬을 내는 식으로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들이 사는 세상에서 모두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총량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봤음을 드러낸디.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길거리 편의점 앞에 ‘사랑을 전하세요’라는 문구 아래 초콜릿 상자들이 쌓여 있는 풍경이 눈에 띄는 일이 늘었다. 초콜릿이 상징하는 자유 시장경제 시대의 달콤한 사랑은 아름다울지언정 배타적이고 차별적이라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온 사랑은 대부분이 ‘화려한 사랑’이기보다는 ‘혐오스러운 사랑‘이 아니었던가. 진정한 천국이 죽어서야 도달한다는 휘황찬란한 금빛 유토피아여야만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자. 모두가 가슴 한켠에 최소한의 선의를 품고 산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미 천국이다. 설령 그 모습이 들판에서 썩어가는 가신의 시체처럼 추한 모습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