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로 읽어낸 자화상
최근 우리나라는 국내에서 중국의 생성형 인공지능 딥시크(DeepSeek)의 사용을 금지했다. 개인 정보를 과도하게 수집해 중국 국영 통신사인 ‘차이나텔레콤’과 틱톡의 모회사인 ‘바이트댄스’로 전송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수집 범위를 찾아보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수준이었다. 통상 구글이나 메타, 오픈 AI의 인공지능 서비스가 이용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계정이나 입력했던 정보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만, 딥시크는 이를 한참 넘어 키보드를 치는 패턴까지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정보 수집 과정에서 익명성을 뚫고 개인을 특정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키보드를 치는 습관을 분석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동이 지문이나 홍채, 머리카락처럼 고유한 특성을 보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도 이 말은 맞는 듯싶다. 대학교 1학년 시절 MT 첫날 밤, 술자리에서 학과장님을 마주하고 술을 마셨던 적이 있다. 한두 순번 술이 돌았을 때쯤, 느닷없이 교수님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너 정시로 들어왔지?’ 교수님이 점집 점쟁이처럼 던진 갑작스러운 물음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실제로 정시로 대학에 갔으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이번에는 내 그림 내용을 읊기 시작하셨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에, ‘그림에 직선이 많더라. 딱 봐도 그린 놈이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게, 꼭 너일 것 같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내 그림을 남에게 잘 보여주지 않게 됐다. 교수님이 그림으로 날 꿰뚫어 봤듯, 누군가 내 창작물을 보고 내 성격을 낱낱이 파악하게 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글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조금 더 옛날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고등학생 때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의 보라색 스웨터가 ‘복선’이었다는 교과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어 국어 담당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가 딱 걸렸던 적이 있었다. 필적 대조를 피하려고 일부러 워드 프로그램을 사용했지만, 편지의 문체가 교내 백일장에 제출했던 글의 문체와 겹치는 바람에 덜미를 잡혔다는 사실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창작자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본인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나는 완벽함을 지독하게 추구하는 성격이다. 그림을 그릴 때는 한 장에 지우개를 반 개씩 썼고, 글을 쓸 때는 한 문장을 너덧 번씩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또, 난해하고 심오한 것만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뒤틀린 미학도 있다. 그래서 언제나 대중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복잡하고 어려운 글을 썼다. 여기에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생각도 한 몫 거들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학창 시절 내내 내가 만들어낸 창작물에는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복잡한 평가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매일 글을 쓰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 내 생각을 알아주기를 내심 바라면서도, 그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여겨질까 두려워했다. 글은 ‘또 다른 나’다. 그동안 내가 써 온 글 속에는 현학적인 문체로 생각을 꽁꽁 싸매 감추면서도 누군가 그 속에 묻어둔 메시지를 읽어주기를 바라 온 ‘미성숙’한 내가 있었다. 나만큼이나 미숙한 글을 휘갈겨 쓰고는, 부족해 보일까 봐 무서워 서랍에 감춰 두기를 거듭하기도 했다. 위선을 혐오했으면서도, 누구보다 위선적이었던 나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오늘 쓰는 이 글이 참회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는 이 나쁜 습관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미숙하면 좀 어떤가. 어차피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나. 벌려 놓은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하다, 어색하고 궁색한 변명 두 마디를 덧붙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