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을 벗어난 삶은 과연 나쁘기만 할까
“지훈아, 서울대는 가 봐야지.”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내 어깨에 얹은 주름진 손에서 풍기던 은은한 담배 냄새를 기억한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와는 담을 쌓은 채, 문학에 빠져 살던 나는 첫 평가원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온 날 하루아침에 우등생이 됐다. 운 좋게도 늘 책을 읽어왔던 내게 B4 용지에 빼곡하게 적힌 지문과 문제지가 낯설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던 속담이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내 모의고사 성적표는 정년을 앞둔 지방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희망이 됐던 것 같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랐던 내게 쏟아진 관심은 ‘가뭄에 단비’였다. 그러나 이 관심은 비로 치자면, 여름철 마른 땅에 쏟아지는 폭우와 같았다. 칭찬에 들뜨던 내가 금세 말라붙는 선생님들의 관심을 되돌릴 유일한 방법은, 이를 악물고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일 년 뒤 치러진 시험에서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았다. 학생부 전형에서도 내세울 게 많았다. 지역 교육감상, 전국대회, 교내 수상실적을 모두 합쳐 2년 동안 상장만 24개를 받았다. 소위 ‘모범생’이었던 내 앞에는 ‘좋은 대학’에 가는 길이 펼쳐져 있었다.
탄탄대로 같았던 길에 올라타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은 2012년 6월이었다. 전형적인 사춘기 청소년이었던 나는 ‘우등생’이기는 했어도, ‘말 잘 듣는 학생’은 아니었다. 수업 내용을 따라기는 대신 늘 공상에 빠져 살았고, 진도를 나갈 땐 ‘쓸데없는’ 질문을 던져 선생님을 난처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집을 풀기보다 시와 수필을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불현듯 머릿속에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장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서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여름 방학을 2주 앞둔 그해 7월 2일, 영영 돌아오지 않을 학교 정문을 나섰다. 그때 학교 밖에도 다양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학교를 뛰쳐나오자마자 박스 공장에 들어갔다. 최저임금보다 20원 많은 돈을 받고 3개월 동안 매일 상자 천 개를 접어야 했다. 이주 노동자들보다 손이 느렸던 나는 ‘공부도 못 하는 애’라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는 홀로 43일짜리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서유럽 각국의 어둑한 광장 가로등 아래에서 거지나 집시 무리와 밤새도록 어울려 놀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 수능을 쳐야 할 시기가 됐을 땐, 이 이야기들을 만화로 그려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렇게 이력서를 쓸 때마다 인사 담당자의 눈길을 잡아끄는 특이한 대학교 전공이 탄생했다.
‘고졸 검정고시’ 출신에 ‘직무 연관성’이 한참 떨어지는 전공을 보유한 나는 보수적인 국내 취업 시장의 이단아다. 일 분 남짓한 대답으로 이 모든 경험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면접을 준비할 때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막막할 때가 많지만, 난삽한 내 이력이 싫지만은 않다. 사회 제도를 따라 성실하게 살아온 삶은 그 사람의 ‘성실함’을 보증하지만, 규범을 벗어나 흘러온 내 과거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이 자연법칙을 이해하는 데 안정적인 고전역학보다, 역동적인 양자역학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만 봐도 그렇다.
양자 물리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는 ‘예측하는 일은 어렵다, 미래에 대해서는 특히.’라고 말했다.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혁신은 기존과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예측 불가능하게’ 종횡무진 횡보해온 내 삶을 지극히도 ‘미래 지향적’이면서도, ‘혁신적’인 것으로 감히 정의해 본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이들이여, 시대가 그대를 울릴지라도 삐뚤빼뚤한 발자취를 걱정하지 말라. 고된 길은 참고 완주하라. 미래는 오고야 말리니.’ 푸시킨의 시 첫 행을 개사한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