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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술과 AI

불확정성의 바다를 항해하는 현대인에게

by 전지훈

‘챗 GPT로 사주 보는 MZ 세대’ 어제 신문의 경제 지면을 무심코 넘기다 본 기사 제목에 눈길이 꽂혔다. 영화 <극한직업>에서 등장한 신하균 배우의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노인도, 학생도, 직장인도, 주부도 모두 점을 보는 신점 전성시대’가 도래했음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기사뿐 아니다. 모 방송사는 무속인을 대상으로 하는 연애 예능 프로그램을 2년 연속 기획해 인기를 끌고 있고, 얼마 전 국회에서 열렸던 12.3 내란 국조특위에는 노상원 전 정보사 사령관이 계엄 성공 여부를 물었다는 여성 무속인이 등장했으며, 그보다 조금 전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한자로 풀면 왕(王)자가 두 개 만들어진다는 12월 3일에 쿠데타를 기획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국어사전의 사전적 정의에서 미래(未來)는 오지 않은 시간을 의미한다. 가만히 있어도 상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던 인간 진화사로 인해 우리는 이따금 의도치 않게 흑역사를 떠올리고 괴로워하는 ‘뇌 가소성’ 현상에 시달린다. 이는 사람의 본성에 ‘불확실성에 대한 혐오’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한국에서 대통령에서부터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점을 보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듯이, 전 세계 사람들이 지위나 지역, 인종에 상관없이 미래를 알고자 ‘점’을 보는 문화와 함께해 온 역사적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배경은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을 마주쳤을 때 점을 본다.’라는 정의로 이어진다. 사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시기다. 물가만 봐도 그렇다. 거의 매일 드나드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받아든 영수증에는 4800원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다. 한 달 전 4500원이었던 가격이 그새 300원이나 올랐다. 가격이 오른 품목이 어디 커피뿐인가. 무, 배추, 대파, 달걀, 콩나물 같은 식자재 가격도 최소 500원씩 올랐고, 자주 사 먹던 아이스크림 ‘붕어싸만코’의 가격은 2200원에서 2500원이 됐다. 가격이 오른 만큼 임금도 늘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주머니에 들어오는 월급은 그대로다. 한국은행은 얼마 전 한국의 잠재성장률 전망치를 1.9%에서 1.5%로 수정했다. 트럼프의 백악관 재입성으로 수출 시장에 빨간불이 켜졌고, 신동아건설을 필두로 전국 89개 건설사가 줄도산 위기를 맞으면서 국내총생산의 4%를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는 팍팍한데, 근로자는 당장 내쫓길까 전전긍긍하고, 취업자는 바늘 구멍같은 취업문을 뚫을 수 있을까 불안해서 떤다. IMF 때보다 어렵다는 불경기 속에서 점집이 '나 홀로 호황'을 누리는 모습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문제는 신점을 보는 가격도 만만찮다는 사실이다. 무속인이 생년월일시를 분석해 명리와 사주를 봐 주는 데 필요한 돈은 평균 10만 원에서 15만 원이다. 시쳇말로 ‘용한’ 무속인에게 점을 보려면 그 이상으로 웃돈을 얹어줘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세대는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로 점을 보면 된다는 참신한 발상을 떠올렸다. 월 2만 8천 원 정도만 내면 오픈 AI가 개발한 최신 인공지능인 o3-mini를 활용할 수 있고, 더욱이 신버전이 포털 사이트의 검색 결과를 직접 크롤링해서 답을 내놓기에 인공지능이 가짜 정보를 그럴싸하게 지어내 답하는 ‘할루시네이션’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더 재미있는 건, 신점과 챗 GPT를 모두 이용해 본 한 시민이 ‘무속인과 컴퓨터의 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빅테크 기업 지하실에 있는 인공지능 서버에 한국의 무속인들이 섬기는 ‘신’이 누구도 모르는 새에 들어앉기라도 한 것인가. 새삼 개발자들이 서버실에서 고사를 지낸다는 IT 업계의 풍문이 마냥 근거 없는 뜬소문만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과학과 역술의 동행은 어색하게만 보인다. 과학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18세기는 고전역학의 태동기인 동시에 전성기였다. 당시 프랑스의 궁정 과학자였던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면서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아는 존재가 있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 유명한 ‘라플라스의 악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20세기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창시함으로써 이 악마의 숨통을 끊었다. 우리는 1964년 리처드 파인먼이 이야기한 대로 양자역학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발표한 ‘불확정성의 원리’ 덕분에 모든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는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안다. 물론, 신점이나 타로를 보고,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챗 GPT에 사주를 물어 불안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불안할 때마다 우리는 운명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존재이며, 누구도 운명을 점지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는 건 어떨까. 이것이 내가 불확정성의 바다를 항해하는 모든 현대인에게 제언하는 가장 과학적이고도 현실적인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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