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07과 전통의 미래

프랜차이즈와 거대 자본의 위태로운 만남

by 전지훈

극장 조명이 서서히 꺼지고, 스크린에는 S&W M27 3.5 리볼버의 총열을 재현한 비네트 너머로 흰 배경이 보인다. 잠시 뒤 스크린의 오른쪽 끝에서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화면 중앙에 멈춰선 남자는 곧바로 스크린 정면으로 몸을 돌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영국 문화를 상징하는 고전 첩보 액션 영화 <007>의 오프닝 장면이다. 1962년 관객에게 첫선을 보인 이 장면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지만, 형식적 측면에서 대부분 원형을 유지한 채 거의 그대로 활용됐다. 숀 코너리에서부터 대니얼 크레이그까지. 지금까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는 총 여섯 명(임시 대역 세 명을 포함하면 9명이다)이었지만, 모두 영연방 국가 출신 백인 남성이라는 전통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지난 2월 21일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회장의 트윗 하나가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custom die hard).’라는 프랜차이즈의 오랜 슬로건을 흔들기 시작했다.


“차기 본드로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글귀가 적힌 게시물에는 헨리 캐빌, 아론 존슨, 리처드 매든, 톰 하디 등 배우들의 이름이 기재된 선택지가 함께 올라와 있었다. 4만 3천여 개 답글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제임스 본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바빴다. 조금 이상했다. 그동안 007 프랜차이즈의 판권은 영국 영화사 EON에 있고, 아마존의 자회사 MGM은 제작만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존 회장이 직접 주연 배우를 캐스팅하는 트윗을 올렸다. 현상의 근원에는 ‘4년 동안 새 영화가 나오지 않으면 영화 판권을 공동 소유한다.’라는 계약서 조항이 있었다. 바로 이 조항 덕분에 아마존은 2021년 9월에 개봉한 <노 타임 투 다이>를 마지막으로 신작 소식이 없었던 007 판권을 소유할 수 있었다.


모든 반응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지금까지 시리즈 확장 시도로 망가졌던 영화 프랜차이즈가 많았기 때문이다. 007과 비슷하게 오프닝 장면이 영화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스타워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977년 루카스필름이 첫선을 보인 <스타워즈> 시리즈는 선악 대립 구도와 고전적인 영웅 서사로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 기조는 2012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루카스필름을 인수하면서부터 뒤바뀌었다. 비슷한 시기 마블 코믹스 같은 콘텐츠 제작사를 인수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작품들이 다루던 프랜차이즈의 세계관 확장을 꾀하던 디즈니는 2017년 <스타워즈: 로그 원>을 선보였다. 영상미를 늘린 대신 원작 설정을 파괴하는 파괴적인 교환은 작품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졌고, 바로 다음 작품이었던 스핀오프 작품 <스타워즈: 한 솔로>는 처음으로 ‘스타워즈’ 타이틀을 달고도 흥행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흑역사를 썼다.


물론 디즈니의 사례를 아마존에 그대로 적용하는 일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아마존 역시 J.R.R 톨킨 옹의 소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드라마화는 과정에서 비슷한 만행을 저질렀던 전적이 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판권은 톨킨의 후손들이 세운 ‘톨킨 재단’과 프로듀서 솔 챈즈가 세운 ‘미들어스 엔터프라이즈’ 두 곳이 관리하고 있다. 원작의 저작권과 설정을 엄격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한 이들은 아마존이 제작하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작품인 <실마릴리온>의 저작권을 넘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마존은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를 제작하는 동안 내용에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을 추가하거나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설정을 창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원작의 주제의식을 멋대로 변주한 작품에 시청자들이 호평 대신 혹평을 쏟아내는 모습은 어찌 보면 예정된 순서였다.


제프 베이조스는 영화 판권을 손에 넣자마자 007시리즈를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프랜차이즈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거기에 덧붙여 영화뿐 아니라, M과 Q 같은 조연 인물들의 서사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하고, 나아가 제임스 본드의 과거사를 다룬 스핀오프 작품들도 여러 편 선보이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내비쳤다. 007시리즈를 오래 지켜봐 온 관객이자, 팬으로서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소식은 두 팔 벌려 환영해야 마땅하겠지만, 과연 남의 작품을 빌려 만드는 이들이 자신들의 콘텐츠를 ‘제 자식’처럼 생각할까. 걱정이 앞서는 마음만큼은 차마 어쩔 수가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점술과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