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먼씨, 이젠 글쓰는 법도 알려주시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한 강연장에서 칠판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는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과학사에 영원히 남을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것을 나는 다이어그램이라고 부릅니다.” 양자역학의 복잡한 적분을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한 ‘파인먼의 다이어그램’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강의실은 새로운 과학 공식의 탄생을 축하하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이 공식을 발견한 공로로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발견이 대단한 이유는 그저 대단한 상을 탔기 때문만은 아니다. 파인먼의 다이어그램은 ‘리처드 파인먼’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떠올릴 수 없는 독창적인 비유였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양자역학 실험은 아마 ‘이중 슬릿 실험’일 것이다. 좁은 틈에 빛을 쬐면 파동 현상이 일어난다는 간단한 실험은, 빛이 ‘입자’라는 고전역학의 주장을 단번에 뒤집는 강력한 증거였다. 파인먼은 ‘괴짜’라는 별명답게 이 이중 슬릿 실험에 ‘무한한 슬릿’을 활용한다는 발상을 떠올렸다. 사실상 열린 공간에서 입자가 모든 경로를 지나칠 확률을 시각화한 개념이 바로 ‘파인먼 다이어그램’의 본질이었다.
리처드 파인먼 말고도 머릿속에 떠올린 발상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낸 과학자는 많았다. 사고 실험으로 상대성 이론을 만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20세기 최고 두뇌로 불리는 존 폰 노이만, 핵폭탄을 만들어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있다. 혜성 같은 과학자들이 탄생했던 20세기는 과학의 황금기였다. 동시기 학자들이 일궈 낸 학문적 성과와 비교하면, 리처드 파인먼의 업적은 다소 초라해 보인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빛나는 이유는 그가 대중에게 과학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처드 파인먼은 복잡한 이론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물리학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물리학은 섹스와 같습니다. 실용적일 수도 있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니까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요즘 세상 같으면 인터뷰 다음 날 타블로이드지의 일면을 장식할 파격적인 비유였지만, 이 설명을 듣고 물리학이 어떤 학문인지 더 물어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괴짜 과학자의 일화는 글쓰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 파인먼이 과학과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았던 것처럼, 글 역시 저자와 독자 사이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교 강의실에 처음 들어서는 신입생의 부푼 마음은 두꺼운 전공 책더미를 마주쳤을 때 푹 꺼진다. 아마 이 글을 보는 사람 가운데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개론(槪論)’ 자가 들어간 책을 본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어사전에서 개론은 ‘내용을 대강 추려서 설명함’이라는 뜻이다. ‘OO 학 개론’이라는 책은 본격적인 학문을 다루기 전에, 배울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교보재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은 해당 학문을 최소 30년 이상 공부한 원로들이다. ‘신은 공평하다’라는 말이 증명하듯, 천재들은 설명하는 데 영 소질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념서들은 대체로 딱딱하고 재미없다. 학문이 이렇다 보니 배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것만이 깊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이 쓰는 글에는 유머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다. 더욱이 ‘잘 알지 못하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라는 풍조 때문에 영국 정치학자 올리버 버크만이 “정치적인 이슈에 참여하려는 사람이라면 시사 뉴스를 샅샅이 섭렵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대로 정보에 집착하는 경향까지 강하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물 없이 건조하고 퍽퍽한 빵을 입안 가득 욱여넣고 씹는 느낌을 선사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파인먼의 행보는 이런 문제에 훌륭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이해하지 못했다면, 설명할 수 없다.”라는 그의 말대로 현안을 잘 파악하는 일은 기본이다. 그러나 기본만 지켜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파인먼은 언제나 과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 수업이나 강의, 혹은 책에서 글 쓰는 법을 배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학생(때로는 10 살배기 초등학생)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글을 쓴다고 생각해 봐라.’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또, 파인먼은 저술 활동과 대중 강연, TV 프로그램 출연 등으로 과학의 대중화를 이끌기도 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지루한’ 물리학이 ‘재미있는’ 학문으로 변신했던 것도 모두 그의 덕분인 셈이다. 사건 사고를 알리는 글도 마찬가지다. 사회 갈등은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맞부딪히면서 벌어진다. 여기에 파인먼의 방식을 빌려온다면, 사건을 다루는 글을 쓰기에 앞서서 현안에 엮인 두 가치(혹은 완전히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가치) 중에서 어느 가치가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는 것을 넘어 글이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까지도 고민하면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