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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거장의 메시지는 어쩌다 길을 잃었을까

by 전지훈

할리우드의 거장인 쿠앤틴 타란티노와 한국 영화의 대표 주자인 봉준호 감독은 서로 비슷한 영화를 만든다. 스크린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장면을 책의 지면처럼 활용하기 때문이다. 타란티노는 2009년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SS 친위대 대위 ‘한스 란다’와 프랑스인 유대인 소녀 ‘쇼샤냐’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보여준다. 인물의 얼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클로즈업된 장면 속에는 수많은 미장센과 오브제가 담겼다. 대표적인 것이 고기가 든 오스트리아 파이인 ‘슈트루델’이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은 사는 지역에 따라 세 시간부터 하루에 이르기까지 시간 정도는 달라도,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다. 카페에서 슈투르델을 주문한 한스 란다가 쇼샤나의 몫으로 ‘우유’를 주문하고, ‘크림’을 얹어 먹으라 권유한 것은 그녀가 유대인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장치였다. 쇼샤냐가 크림이 묻지 않은 파이의 끝단을 잘라 먹는 모습을 본 란다 대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관중에게 란다가 파이에 독일제 담배를 비벼 끄는 장면은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인 2013년 영화 <설국열차>도 비슷한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꼬리 칸의 하층민들이 열차의 선형적 구도를 따라 앞으로 이동한다는 단순한 구조를 따른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가 인류 역사의 연대기를 따른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메시지는 더 깊어진다. 신으로 추앙받는 윌포드가 꼬리 칸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별해 앞칸으로 이동시키는 장면은, 종교 신화가 인류의 수직적 계급도를 유지하는 과정을 폭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열차 잔해에서 빠져나온 토미와 요나가 ‘북극곰’을 마주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체제에서 벗어나 살 수 없다는 인류의 오랜 믿음을 뒤흔드는 파괴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장면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그 속에 메시지를 고봉밥처럼 눌러 담은 두 감독의 영화는 ‘시각화한 텍스트’다. 이런 내용이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까닭은 오랜 기간 대중이 영화라는 장르를 ‘오락거리’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진통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예술성’과 ‘대중성’이 충돌하는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긴 서론 끝에 드디어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이 담아낸 <미키 17> 속 메시지는 왜 힘이 없을까. 우선 대체 가능한 복제인간이 잔혹한 결말을 맞는다는 소재는 영화계에서 참신한 소재는 아니다. 2005년 영화 <아일랜드>에서부터 2024년 말 <서브스턴스>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구성이 스크린에 자주 등장했다. 참신함을 기대했던 관객 다수도 비슷한 생각에 ‘평범하다’라는 평가를 던졌다. 그러나 진부한 설정을 차용한 영화가 언제나 재미 없는 것만은 아니다. ‘허구성’을 전제로 한 핍진성을 추구하는 영화가 반대로 ‘현실성’을 강화하는 고증에 충실한 이유는 관객이 ‘있음 직한’ 이야기에 근거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번 영화에서 처음으로 악역을 맡은 마크 러팔로는 그저 나쁜 지도자를 생각했을 뿐, ‘트럼프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연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떠오르는 이유는 그가 신임 대통령을 두려워해 면피성 발언을 내놓았기 때문이거나, 트럼프 대통령이 세상 모든 악역의 이미지를 합쳐 놓은 듯한 모습을 띤 탓일 것이다. 이런 장치 덕분에 관객은 현실과 유사한 영화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에서 ‘착취’를 통해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꼬집고 싶었던 듯하다. 역사적으로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착취의 구조를 은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서도 그 도축 과정을 알지 못하고, 신발을 신으면서도 그 제조 공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만약, 우리가 영화 속 세상에 사는 일반 대중이었다면, 우리는 미키가 잔혹한 생체 실험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트럼프인 듯 트럼프 아닌 트럼프 같은 대통령과 생체 실험에 잔혹하고도 가혹한 처지로 내몰리는 미키의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와 그 속에서 착취당하는 ‘대체 가능한’ 처지에 놓인 사람의 대립 구도를 상징한다. 그런데도 대중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에 ‘평범하다’라는 평가를 던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중이 영화 속 이야기를 ‘고루하게’ 여길 정도로 팍팍한 현실에서 살고 있음이 드러난다. 영화를 구성하는 허구와 고증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대중이 허구성이 짙은 영화를 고증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된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중이 영화를 박하게 평가하는 모습은 우려스럽다. 결국, 현실과 작품 사이 틈이 없다면 예술의 대중성과 작품성도 부딪힐 수 없다. 이번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은 제아무리 ‘텍스트의 시각화’에 통달한 감독일지라도 허구와 맞닿은 현실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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