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 찬장 점검은 보통 여름이 끝날 때쯤에 비정기적으로 한다. 이유는 뭐... 여름에 습도높고 뜨뜻하니까 찬장에 둔 것들이 혹시 상했을 수도 있고.. 벌레가 알 깔 수도 있고...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식재료를 보충해야지 싶기도 하고... 근데 지금 비 오는데 정리해봤자 다시 눅눅해지는 거 아닌가? 그래도 앞으로 이 주일은 시간 없을 예정이라 지금 안 하면 못 한다. 애초에 가정집 습도 따위도 견디지 못하는 연약한 향신료 따위는 우리 집에 남아있을 자격이 없다.
우리 집에 있는 향신료는 계피스틱, 정향, 육두구, 카다멈, 월계수잎말린거, 팔각, 사프란, 후추(가루), 후추(통) 정도다. 찬장을 끝까지 뒤지면 더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일단 내가 존재를 인지하고 쓰는 건 이만큼이다. 마늘이랑 고추 깻잎 부추 등등은 한국 기준에선 채소 같은 거니까 제외하고 로즈마리랑 바질은 키웠는데 다 죽었다.
허브 화분들... 물도 달력에 기록해가면서 주고 집에서 제일 해가 잘 드는 곳에 두고 영양제도 꽂아줬는데 그냥 다 죽었다. 비통하다. 마지막 로즈마리(이름: 이반 4세)를 떠나보낸 후에는 더이상 새 허브화분을 들이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말린 걸 사오기로 했는데 아직 쓸 일이 없어서 안 샀다.
생각해보면 로즈마리가 필요한 건 대부분 양식인데 내가 양식 요리를 잘 안 한다. 마늘 안 먹거나 적게 먹는 문화권은 요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견해다. 종교적 사유가 아닌데도 라드 잘 안 쓰는 문화권도 뭘 잘 모르는 것 같다. 근데 종교적 사유로 돼지 안 먹는 문화권 음식은 왜 엄청 맛있지? 모르겠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어쨌든 여러 이유로 우리 집에 있는 향신료는 대부분 밀크티에 들어갈 만한 것들이다. 월계수잎 빼고는 다 넣어도 되는데 다 넣으면 무슨 찻잎을 쓰든지 홍차색 빼고는 아무 향도 남지 않으니까 아무거나 넣어도 된다. 이 방법으로 엄마가 맛도 안 보고 사와서 맛없다고 안 먹는(저는 마리아쥬를 지지합니다 그냥 개인 취향임 자스민 만다린 짱) 마리아쥬 웨딩 임페리얼을 탕진했다. 좀 묵어서 향이 날아간 찻잎 처리에도 효과적이다.
밀크티엔 바닐라도 넣으면 좋은데 너무 비싸서 집에는 안 둔다. 이상하게 사프란은 사도 바닐라는 못 사겠다. 너무 돈 아깝고 사용하고 나면 허망하고... 남는 것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베이킹을 잘 안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 판나코타는 젤라틴 불릴 때 진한 민트티로 불리고 복숭아 설탕을 써서 잡내를 없애니까... 생각해보면 할머니도 바닐라 쓰시는 건 본 적 없다.
사프란은 비싸다... 비싸고 부피가 작다. 언제부턴가 집 근처에 사프란 팔던 가게가 없어져서 몇 주 전에는 사프란을 인터넷으로 구매해야 했는데 과장 조금 더해서 엄지손톱만한 상자에 담긴 쥐똥만한 사프란이 집채만한 상자에 산더미만큼 들어있는 완충재랑 같이 왔다. 난 그냥 사프란이랑 버터랑 설탕을 좀 넣은 밥을 짓고 싶었을 뿐인데 환경에 돌이킬수없는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에 사던 사프란도 고양이 손톱만한 상자에 든 쥐똥만한 거였지만 적어도 그건 그냥 가게에 걸어들어가서 물건을 사고 주머니에 넣고 들어오면 됐는데... 기업 측이 소비자들에게 죄책감을 떠넘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뭔가 부당하고 내 안에 흐르는 붉은 피가 뭔가 얘기하라고 종용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향신료 얘기 하는 시간이니까 관두자. 사프란 밥은 집에 있는 쌀이 전부 자포니카 품종이라 인디카쌀을 2kg 정도 주문했었는데 아직 안 와서 못했다.
위: 자포니카(우리가 먹는 거), 아래:인디카(쌀국수 만들 때 쓰는 거)
사진 그냥 구글에서 주워왔는데 잘 보이나? 사프란 써서 밥 지을 때 쓰는 쌀은 인디카(아마 indica라고 씀. 이름처럼 인도 근처에서 많이 자란다) 쌀이다. 찰기가 없어서 물에 불리면 다 부서지고 떡도 못 만들고 지어진 밥을 손으로 잡고 먹어도 손에 잘 안 달라붙는다. 이거에 버터 설탕 넣어서 솥밥 지어가지고 살짝 눌게 만들면 맛있다.
자포니카는 japonica라고 아마 썼던 것 같고 일본종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 쓰는 쌀이 그거다. 이름이 일본종인 이유는 그으... 일제강점기 시절에 대부분의 한국에 살던 식물들 학명이 지어져서.... 동백꽃 같은 경우도 학명이 카멜리아 자포니카다. 이래서 내가 식민지 만들던 나라들을 싫어한다. 영국 일본 프랑스 그런 애들. 요즘은 대놓고 식민지 거느리기 눈치보이니까 공장같은걸 제3세계에 몰아놓고 싼값으로 사람들 부리면서 오염과 위험과 기타등등 보기싫은 것들은 타국에 떠넘기고 지들 좋은 것만 가져오고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두유 히얼 더 피플 싱 하는 나라가 프랑스였던 것 같은데 걔네들은 지들이 혁명하던 브루주아들 포지션이 된 걸 모르고 있는 건지 아는데 그냥 모르는척하고 자유를사랑하는우리들 컨셉에 빠져 있는 건지.... 아 백인이랑 자본가랑 남자랑 1세계주민들 그만 싫어해야 하는데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 어쩔 수가 없으니까 많이 벌고 많이 배우는 자본가들이 알아서 내 성질 안 건드리게 조심했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향신료 정리 해야지... 육두구는 반쪽밖에 안 남았고 계피스틱은 세개 남았다. 카다멈 정향 팔각 후추들은 멀쩡하고 월계수잎만 뭔가 좀 색이 바래는 것 같은데 버리고 새로 사거나 수육을 엄청 만들거나 해서 써서 없애고 새로 사거나 하는 게 나을 것 같고 사프란은 얼마 전에 산 거 포장도 안 뜯었다. 레몬밤 라벤더 자스민 매화말린거 등등 차로 먹는 허브나 꽃 말린것들은 민트가 바닥에 깔린 것 빼고 통에 반 이상 남아있고 제습제 새걸로 간 다음에 계피스틱 월계수잎 민트만 새로 사야지. 근데 비 언제 그치냐 오늘 이불빨래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