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그거
병행독서는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독서법이다. 열 권의 책을 각각 하루 열 페이지씩 읽어서 두어 달만에 열 권의 책을 동시에 완독하는 식의 독서법이라고 하면 이해가 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현대인들은 이런 식의 독서법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당장 웹소설 산업 규모 1조 390억이 된 현재(사실은 작년 기준), 한 화당 약 4000~6000자 정도 되는 분량의 몇백 화짜리 소설이 잦게는 하루 한 편, 조금 느리게는 일주일에 한 편씩 연재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이 두 작품 이상의 웹소설을 보고 있다면 이미 병행독서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웹소설 시장이 그다지 유명해지기 전... 그 전에도 물론 웹소설의 전성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나는 월야환담과 이것저것 마시는 새 시리즈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누구나 일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핫케이크 반죽을 팬에 붓고 반죽이 부풀기를 기다리는 남는 시간에 손에 들고 있는 조그만 이동통신기기기로 몇 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길이의 소설을 보게 된 201n년 이전에, 그러니까 스티브 잡스 씨(나는 개인적으로 이 인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세상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의 업적을 알고 있다는 게 그의 패션이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스티브 잡스가 해낸 업적을 제외한 다른 일들에 대한 옹호나 무조건적인 찬성이 될 수 없음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병에 걸린 공대생들-그리고 스타트업사장들-에게 피해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도의적으로 책임을 느끼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가 검은 목폴라에 청바지를 입고 모든 공대생들이 따라하고 싶어하는 그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해내기 전부터 병행독서를 해왔다.
내 부모님이 어린 나를 컴퓨터 앞에 앉혀 놓고 웹소설 조기교육을 시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분들은 그냥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어린 딸이 집에 있는 몇천 권의 책(어쩌면 만 권쯤 될)을 마음껏 읽게 내버려 뒀다. 네 살 쯤에 읽고 쓰기를 전부 해내고 동화책 시기를 빠르게 졸업한 후 열 살이 채 되기 전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같은 곳에서 상을 탄 책 따위(엄마 취향이었다)를 밥 먹듯이 읽어댄 나는 훌륭한 도파민중독 어린이가 되었고 약 30권 정도의 책을 전부 펼쳐 놓고 한 줄씩 읽는 짓을 했었다. 당연히 집 거실은 간신히 열 살 쯤 된 어린애가 발 디딜 틈만 남기고 책으로 뒤덮였다. 그래도 항상 그런 건 아니고 몇백 페이지쯤 되는 책 한 권을 두어 시간에 걸쳐 완독하는 일도 제법 자주 있었는데 30권1줄독서도 드물지 않게 하긴 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나는 adhd든 뭐든 일단 집중력에 영향을 주는 뭔가가 좀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금도 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은 하는데 내 주변에 항상 있었던 신기할 정도로 친절한 많은 사람들 덕분에 일상생활에 아무 불편함이 없었어서 자세하게 검사해 내 주의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의지가 좀 박약한 건지 알아볼 생각은 없다.
그때쯤에 내가 했었던 병행독서 중 가장 특이했던 것은 해리 포터 전 시리즈를 어떻게든 해서 도서관에서 전권 빌려온 다음(친구들 도서대출증을 좀 썼다)일곱 시리즈를 동시에 한 페이지씩 읽는 것이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시리즈마다 분량이 현저하게 달라서 마지막에는 불사조 기사단 완독을 못 한 채로 마지막 시리즈 마지막 장을 읽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정상적인 순서(1권을 다 읽은 다음 2권으로 넘어가는 그거)대로 읽으려고 해봤는데 열한 살 때 읽었던 것보다 재미가 없어서 읽다 말았다. 롤링 씨 잘못은 아니고 그냥 그때의 내가 코즈믹 호러에 빠져 있어서 기껏해야 몇천 명인 마법사들의 작은 세계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탓이다. 이름을 부르면 안 될 매지컬 히틀러가 부활하느니 마느니 하는 건 열일곱 살의 나에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판글루 글루나파 크툴루 르리예 가나글 파탄.
나는 한 가지 화제에 집중할 수 없는 성질 때문에 본능적으로 도파민을 쫓아 병행독서를 해왔지만, 다른 목적이 있어서 병행독서를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연재물 소설이 아니라면 그냥 한 번에 읽을 수 있으면 한 번에 읽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여러 권의 책을 같이 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내가 나서서 말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에는 얻을 수 없는 확실한 장점이 있긴 하니까.
병행독서의 가장 큰 장점은 책 한 권에 쏟을 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 기대감? 뭐든 좋다. 어떤 책의 초반부가 아주 재미있어서 책 한 권에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어서 봤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 아니어진 경험이 다들 있지 않나? 초반에 쓰고싶은 장면 몰아넣었다가 후반에 힘이랑 흥미 떨어져서 대충 완결만 내는 작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사실 괜찮은 후반부라고 하더라도 글을 보는 취향은 모두 다른 거니까 책의 초반부가 마음에 든다고 완결까지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한 번에 한 권의 책만 읽는다는 건 후반부가 실망스럽고 재미없는데도 지금까지 읽은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워서 꾸역꾸역 읽는데 나중에 보면 그렇게 읽은 부분은 딱히 기억도 안 나는 허무함을 감당해야 할 위험성을 일정 확률 짊어진다는 것이다. 병행독서는 그런 위험을 줄여준다. 병행해 읽는 책의 권수가 늘어날수록 그렇다. 처음엔 열 권으로 시작해서 영 별로인 것 같은 부분이 나오면 한 권씩 읽기를 관두고 그 집중력을 남은 책들에 쏟는 거다. 설마 책 열 권을 한 번에 읽는데 그중에 후반까지 만족스러운 작품이 하나도 없는 게 가능할까?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책들의 장르가 사실 자기한테 안 맞는 걸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거랑 좋아하고 싶은 걸 헷갈리는 경우가 제법 많으니까 그 기회에 진정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난 자기개발서나 에세이 종류가 진짜 안 맞는다. 지금 블로그에 일기인지 뭔지 모를 걸 엄청 쓰고는 있는데 남의 이야기 듣는 걸 기본적으로 별로 안 좋아한다. 자서전이나 위인 소개 학습만화 같은 것도 싫어서 안 읽었다.
병행독서는 안정적인 재미를 보장한다는 엄청난 장점을 가진 만큼 단점도 명확하다. 이건 사람을 좀 타는 건데 기억력이 전체적으로 좀 안 좋은 사람이나 다른 데서는 기억력이 좋은데 책 읽다 다른 거 하면 그 전 즐거리를 전부 까먹어버리는 종류의 사람, 중간에 끊기는 거 진짜 못 견뎌서 연재물 못 읽고 완결되면 몰아보는 사람한테는 시간만 버리는 게 될 수가 있다. 안 맞는 사람한테는 진짜 안 맞는다. 근데 뭐... 꼭 이렇게 읽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안 맞는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일반독서 해도 별 문제 없으니까 자기 읽기성향을 확실히 알고 자기한테 맞는 독서 방법을 찾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