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뭐라 하더라···,
아마도 처음으로 고향을 벗어났던 열여섯 살 겨울부터였던 것 같다.
난생처음 넓고 북적이는 곳에 가니 완전 두메산골인 나의 고향이 자꾸만 부끄러웠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시내에는 롯데리아가 있다던데. 롯데리아 마저도 없는 나의 고향!
그래, 열등감.
나는 나의 고향에 대해 열등감이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열등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롯데리아는 없어도 교정을 할 수 있는 치과는 있었다. 유치가 하나 둘 빠지던, 일곱 살 때쯤이던가. 치과에서는 내가 부정교합이라며 교정을 권했다.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녔지만 나에게는 한 푼도 아끼지 않던 부모님은 바로 치아교정에 동의하셨다.
교정은 잘 되었다. 그런데 이 안쪽에 붙여놓은 교정 유지장치가 대략 2년 단위로 말썽이다. 딱딱한 음식을 자주 먹는 것도 아닌데 퍽 하면 떨어진다. 이 유지장치는 내가 고향을 떠나고부터 더욱더 문제가 되었다. 고향에서는 원래 다니던 치과에 가서 별도의 비용 없이 붙일 수가 있었으나 외지에서는 불가능했다. 별도의 비용은 그렇다 치고 일단 유지장치를 붙여주는 병원을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고향을 떠난 지 십 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나름 '유학'이란 걸 하고 있었던 셈인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날더러 유배 가는 것이냐며 웃었다. 이 얘기를 동생에게 하자, 동생은 유배는 조선시대에 나름 권위 있던 사람에게 처해진 형벌인데 나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정곡을 찔렀다.
아무튼 고향에 돌아온 지 한 이주쯤 지났나. 교정 유지장치가 떨어졌다. 예전에 다니던 치과에 예약을 하려고 알아봤더니 옆 마을로 이전했단다. 자차로 가면 4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지만 차가 없는 나는 난생처음 고향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옆 마을에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있냐고 묻자, 버스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옆 마을에 가려면 근처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갈아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못해도 두 배는 더 걸리는 셈. 배차간격은 또 얼마나 길던지. 거 참, 시골생활도 쉽지 않다.
치과에 가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이래로 가장 일찍 일어났다. 꾸물렁 대다가 차를 한 대라도 놓쳤다가는 치과에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된다. 오전 아홉 시였지만 신호등이 필요 없을 만큼 한산한 도로였다. 오랜만에 오전에 나와서인지 날이 새삼 화창하게 느껴졌다.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뭇잎에 붙어있는 신기하게 생긴 벌레를 보았다.
경유하기 위한 마을로 가는 버스엔 나, 어떤 할아버지, 기사님 이렇게 셋만 있었다. 고향에서 시내버스를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이곳저곳 멈추며 달렸고, 간혹 사람이 타기도 했다. 그리고 또 아무것도 없는 곳에 내리기도 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하신 걸까. 할아버지들은 대체로 어두운 회색이나 갈색 옷을 입고 계셨고, 할머니들은 꽃분홍색 외투와 보다 짙은 색의 바지를 입고 계셨다.
쓸쓸한 정류장은 볼 때마다 겁이 난다. 누군가 날 저곳에 내려놓으면 난 어떡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참 막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버스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오늘에야 처음 보았다. 여전히 쓸쓸해 보이지만 조금 덜 무섭게 느껴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곳에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있는 동안 이 곳에 대한 열등감을 애정으로 바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