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다 떠는 것을 굉장히 즐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에 대해서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난감할 것이다. 다들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 대신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까. 그래서 나는 대뜸 만만한 사람을 붙잡고 떠들기보다 내 생각을 글로 쓰기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지친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대안책을 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내가 발견한 재미있는 것들이나 흥미로운 주제들을 냅다 떠들었다. 요즘 떠오르는 것들은 주로 캔들 만들기, 언어 학습, 다시 읽기 시작한 성경, 지난 내 삶의 역사들이다. 그런 것들을 공유하면서 공감을 얻거나 위로를 듣는 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지겨웠을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했다. 작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한 자 한 자 채워져 가는 모습은 꽤나 뿌듯하다.
요즘 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캔들 만들기다. 세상에 그렇게 예쁜 캔들은 본 적이 없는데 해당 영역에서 새 지평을 열어준 한 작가에 푹 빠져 강의를 아무 준비물도 없는 채로 이론부터 익히기로 하고 무작정 듣고 있다. 이것저것 추가하거나 시행하기 전의 온도를 암기하는 일부터 하고 있으니 어쩌면 대책 없이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꽤나 뿌듯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또한 수업 뒤에 바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이니 현재 나의 미래가 더욱 밝아 보인다.
그다음은 언어다. 어째 회화를 연습하고 나니 글을 읽기가 전보다 훨씬 쉬워져서 원서도 읽고 친구들과 대화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또 언어 교환 친구를 찾다가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다른 목적이 아니라 깔끔하게 언어교환만을 원하는 상태이고 매일 성실하게 안부를 물어봐주어서 다행이고 고맙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 상황이니 나는 당연히 한국어를 성실하게 가르쳐 주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하고 있다.
다시 읽기 시작한 성경의 계기도 바로 새로운 러시아어 구사인의 영향이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과거 다양한 부정적 영적 경험을 했고 신에게 매일 기도한 이후로 그런 상황이 잠잠해졌다고 했다. 나도 과거 세례 하나 받겠다고 이곳저곳 찌르고 다녔던 상황으로 집에 멀쩡한 성경책이 하나 있는데, 그 친구의 말로는 길을 찾기가 어렵다고 느낀다면 혼자서라도 성경을 성실하게 읽으라고 했다. 나의 마음이 순수하게 열려있다면 나는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례는 그 뒤여도 상관없다고. 나는 그 말을 신뢰했고 바로 성경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지난 내 삶의 역사를 하나하나 꺼내고 싶지는 않다. 대개 좋은 기억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뇌가 생존하기 위해 위협스러웠던 것들만 선명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주 떠올리고 넌더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시기는 이제 성숙해진 탓인지 전혀 없음에 다행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보면 내 사연도 줄줄이 꺼내며 스스로와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웬만하면 나를 동정하는 상대의 행동을 전혀 원치 않아서 잘 꺼내지는 않는다.
과거 나는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 선생님이 제시한 강의 제목은 ‘글쓰기로 나 스스로를 치유하기’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제목이 온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나하나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장르별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글로서 표현한다면 그 과정 자체로도 온전히 스스로를 보듬어주는 과정이라고 믿게 되었고 실제로 많은 효과를 얻었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여 그들의 위로를 통해서만 자신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삶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