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2

파란 머리를 한 여자 2

by 이공칠

겨울은 살갗을 움찔거리게 하고 아리게 한다. 영수는 추운 바람에 몸을 더 웅크리고, 손을 주머니 속으로 더 깊게 넣는다. 며칠 전까지 공기는 차가워도 바람이 불지 않아 책을 읽으며 출근길을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조차 불가능해졌다. 영수는 여전히 찝찝한 마음으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출근 전 늘 그렇듯 카페에 들른다. 가을까지만 해도 영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몇 권을 읽다가 지겨워져서 이제는 프라두라는 시인이자 신비학자의 이야기가 나온 책을 읽고 있다. 과거를 거슬러 가려는 그런 내용이다. 영수는 자연스레 시간을 확인하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는다. 어떤 구절은 음미하듯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때론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을 이해하려 여러 번 읽기도 한다. 시험 기간이 끝나 며칠 전까지는 가질 수 없는 여유가 다시 찾아왔다. 영수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자기만에 세상에 빠진다. 겨울의 학원은 한가해진다. 하지만 영수에겐 여전히 어려운 공간이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시험 직후, 그만두고 이제 그 일을 영수가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했다. 원장이 일을 더 주지는 않아도 의지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영수는 하루의 여유를 만들기 위해 책을 읽고 있지만 책의 한 구절을 끝나 다음 구절이 얼마나 걸리는지 생각하는 시간과, 출근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비교한다. 출근하기 전의 시간이 더 커지면 영수는 그때부터 계속 시간을 확인하며 언제 출근할지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의 숫자가 변할 때마다 영수는 어느새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읽는다. 영수의 표정은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어두워진다. 영수는 카페에서 나오고 어려운 학원으로 향한다.



학원 문을 여니 유진이 데스크에서 영수를 맞이한다. “어, 쌤 안녕하세요~” 유진의 구김살 없는 말투가 영수에겐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일전의 일로 인해 괜히 민망했지만, 어느새 유진은 유진 나름대로 학원 일에 적응하고 있다. 영수도 나름의 모양을 가진 채로 적응하고 있었다. 영수는 한 번의 내신 기간이 지나고 나니 그럴듯한 강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요구하고, 무엇보다는 존댓말을 하는 게 많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이 숙제를 채 해오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이런저런 야단을 친다. 내신이 끝나고 아이들의 성적과 아이들의 민망한 얼굴을 보니 괜스레 겁먹었던 지난날들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렇게 영수는 영수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난 지 일주일 정도 지났다. 아이들은 다시 삼삼오오 모여 새로이 반 편성이 이루어졌다. 영수는 지난주부터 새로운 반을 맡아 진행하게 되었고, 영수는 이전 동료에게 배웠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아이들과 먼저 친해지려고 했다. 영수는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며칠 전 꾸었던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수업을 마치고 유진이 괜히 영수에게 와서 물어본다. “쌤, 아까 무슨 얘기를 애들이랑 한 거예요?” 영수는 멋쩍은 듯 웃으며 유진에게 말해준다. 영수는 본인의 이전 행동들이 부끄럽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꿈을 꿨어. 이상하게 요즘 꿈을 자주 꾸고 어떤 꿈인지 생각에 오래 남더라. 어딘가를 계속 걸어가는 거야. 막. 산책로 같은 데? 그런 곳 같은데 정확하게 어딘지를 모르겠어. 그냥 계속 걸어가. 그럼 나는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거든. 왜, 그냥 걷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그러다가 갑자기 환경이 변해지는 거야. 그럼 나는 그 순간 내가 왜 계속 ‘걷고 있지? ‘하고 생각하게 돼. 그러더니 또 갑자기 배경이 변해져, 막 학원 오는 길이거든. 아마 그런 거 같아. 내가 거기서 갑자기 어떤 건물에 들어가는 거야. 음.. 아마 옆에 건물인 거 같아. 그리고 문을 여니까. 내가 수업을 하고 있어. 막 아이들이 보이는 거야. 그리고 너도 그 안에 앉아서 막 듣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네가 소리치고 나가. 나는 당황하고 따라 나가려다가 깼어. 이게 다야. 영수는 유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하하 제가 왜 나갔을까요?, 아 그래서 아까 제 이름이 들렸던 거네요?” 유진은 웃으면서 물어본다. 영수는 조용히 유진의 질문에 수긍한다. 유진은 다 듣고는 자연스럽게 퇴근할 준비를 한다. 영수는 잠시 시간의 텀을 두더니 급하게 학원을 나간다. “쌤 고생하셨어요~” 문 밖에서 유진의 천진한 인사말이 들린다. 영수는 다시 들어가 인사를 할까 잠시 고민하지만,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고민을 지고 엘리베이터에 탄다.



영수는 가는 길에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이 일을 하면서 영수에게 생긴 무의식적인 습관인 것이다. 수업의 형태보다는 유진에게 이야기를 할 때가 계속 떠오른다. 혹시나 말하면서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괜스레 설명하는 과정이 괜히 길어 혹시나 지겹지는 않았는지, 이런저런 걱정 투성이다. 영수는 집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하니 꽤나 늦은 시간이다. 그래도 이상하게 술이 생각나는 그런 날이라 핸드폰의 배달 어플을 킨다. 평소라면, 술은 편의점에서 미리 사 왔을 테지만 영수는 배달 어플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술도 같이 시킨다. 강사에 익숙해질수록 그런 돈을 쓰는데 좀 더 과감해졌다.


꿈을 꾸었다. 영수는 언제 잤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핸드폰 알람에 깨서 일어난다. 눈가 촉촉한지 괜히 눈을 쓰윽 닦는다. 영수는 조용히 무슨 꿈을 꾸었는지 생각한다.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영수는 찰싹- 찰싹- 파도가 치는 바다를 본다. 해수욕장이라기보다는 돌무더기가 많은 그런 곳이다. 파도는 계속 돌을 친다. 멀리서 흰 새떼가 나타나 바위 위에 앉는다. 흰새 떼가 삑삑 울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저 멀리 거친 파도가 크게 내리친다. 흰새 떼는 파도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닷속에 잠긴다.



영수는 침대에 잠시 앉아있다. ‘이 꿈에 대해 오늘 아이들에게 마저 이야기해 주면 어떨까?’ 영수는 그 생각의 끝에 유진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어제보다는 좀 더 추운 날이다. 영수는 종종걸음으로 카페에 들러 책을 읽지만, 크게 들어오지는 않는다. 괜스레 시간만 계속 확인하다 참지 못하고 출근한다. 유진이 오기 전에 이미 도착한 영수는 조용히 수업 준비를 한다. 문이 열릴 때마다 괜히 영수는 누가 들어왔고 나갔는지 의식한다. 유진이 들어왔을 때, 영수는 태연한 척 인사를 한다. 그게 영수가 유진에게 건넨 말의 전부이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영수의 말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다가 갑자기 웃는다. 영수는 아이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태연한 척 옅게 웃는다. 수업을 마치고 유진과 인사하고 퇴근한다. 영수는 괜히 민망해서 어제와 같이 닫히는 엘리베이터문만 바라본다.



날이 조금은 풀렸다. 굳게 닫은 패딩이 더워 영수는 지퍼를 모두 내리고 카페로 향한다. 프라두의 이런저런 말들이 다소 난해해지는지 영수는 책을 보는 시간보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한다. 띠링- 카페 문이 열리고 유진이 카페에 들어온다. 영수는 잠깐 놀란다. “안녕하세요~” 유진은 주문을 마치고 영수를 보고 인사한다. 영수는 어색하게 인사에 답한다. “쌤 커피 좋아하시나 봐요.” 유진은 영수를 보고 태연히 말을 한다. “쌤 커피를 마시게 되면, 잠을 잘 때도 미약하게 각성작용이 일어난데요. 그래서 꿈이 더 자주 기억에 남고 그런데요.” 유진은 이런 말을 하곤, 주문한 커피를 받고 카페를 나선다. “쌤 이따가 봬요.” 카페 밖에는 한 남자가 유진을 반긴다. 남자는 유진이 사온 커피를 받고 유진과 함께 카페에서 멀어진다. 영수는 앞에 있는 커피를 마신다.


영수가 집에 도착했을 땐, 모든 힘이 다 빠진 상황이었다. 찬 바람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루가 평소와는 다르게 짧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할 말이 가득했는데 체 하지 못한 채 방안은 침묵으로 가득 찬다. 그날 밤, 영수에게 익숙한 공간이 펼쳐친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친구들과 갈래 길에서 헤어졌던 그 장소이다. 영수는 앞으로 나갔으며 두 친구는 서로 흩어졌다. 영수는 그 장소에 서서 멍하니 누군가가 지나가기를 바란다.


햇빛이 유난히 밝았다. 영수는 카페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다. 주말, 오늘은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된다. 영수는 혼자서 프라두의 책을 읽는다.


만일 과거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봐. 그래서 네가 지금 바라던 꿈을 이룬다면, 그건 과거의 너의 꿈을 이룬 게 아니라 오늘의 너의 꿈을 이룬 것일 거야.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까? 책의 말이 날카롭게 영수를 찌른다. 영수는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괜한 말들에 반성한다. 유진이 이 카페에 오길 바라지만, 그런 일은 없다. 영수도 알고 있다. 하루가 저문다.


띠링- 영수의 핸드폰에 알람이 울린다. “쌤 저 이번 주가 마지막이었어요. 뭔가 조금 더 일하고 싶었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한 번씩 찾아뵐꼐요.” 유진의 연락이다. 영수는 유진의 메시지를 천천히 읽어본다.



어린 시절 아주 어린 시절 내가 유치원에 다녔을 때, 내 키가 지금의 허리도 안되었을 때. 그때 나는 친구와 엄청 높은 곳에서 뛰는 놀이를 했다. 나는 두려워서 하기 싫었지만, 친구는 겁도 없이 막 뛰어내린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힘껏 뛰었고 결국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났다. 나는 친구 앞에서 창피한지도 모른 채 엉엉 울었다. 그리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날 이후 한동안 그곳도 친구도 안 만났다. 나는 그 장소가 너무 무서웠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느리다고. 가끔씩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최근 며칠 동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감정을 한껏 토해내니까, 조금은 무덤덤해진다. 프라두의 책은 말한다.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성장은 무언가를 버려야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무얼 버리지 못했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는지.


영수는 공책 맨 앞 장에 적어둔다. 그리곤 유진에게 고생했다는 짧은 말을 보낸다. 이제 출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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