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의 일기

by 이공칠

이 글은 파란 머리를 한 여자, 어느날, 꿈2에서 나온 영수가 그간 썼던 일기를 묶어놓은 것이다.


3월 15일

바라던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이 쓸쓸하게 적은 글자를 바라본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말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다. 여전히 실수들 투성이다. 아이들이 단어를 물어보면 머뭇머뭇거리고, 긴장한다. 아는 단어들인데 막상 아이들 앞에서 말하려니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그것뿐이면 다행이다. ‘~한데요.’ 이게 입에 계속 붙는다. 아이들한테 자꾸 존댓말이 나온다. 하. 언제쯤 익숙해질까? 그래도 일은 재밌다. 아이들이 ‘선생님’하면서 졸졸 따르는 게 귀엽다. 이제 고작 15살인데 ‘이렇게 큰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말을 걸고 물어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애들은 애들이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좀 더 잘하고 싶다.


4월 03일

시험 기간이 시작되어 좀 더 바빠졌다. 아이들이 단어 테스트를 보러 계속 온다. 너무 정신없다. 문득 3월에 쓴 일기를 보는데 아이들에게 단어를 말하는 게 민망해서 긴장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다. 출근하자마자 단어 테스트지를 인쇄하고 인쇄를 다 마치면 아이들이 하나둘씩 등원한다. 아이들은 수업 전부터 단어 테스트를 보려고 온다.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을 적고, 단어 테스트지를 준다. 가끔 말을 안 듣는 아이들도 있다. 그럴 때면 건희쌤이 나와서 도와주신다. 건희쌤이 아이들을 한 방에 휘어잡는다. 내 앞에서는 막 구시렁거리던 아이들도 건희쌤이 나서서 이야기를 해주니 아무런 말도 못 한다.


단어테스트를 한동안 보고 있다가 아이들이 빠지는 순간이 있다. 건희쌤이나 원장님 등이 수업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면 나는 빗자루를 들고 이곳저곳을 청소한다. 가끔 책상에 아이들이 낙서한 걸 본다. 보고 있으면 괜히 내가 부끄럽다. 다행히도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나는 쓱 읽고 쓱 지나간다.




5월 08일

또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그렇게 여직 할 일들이 비슷해서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다. 이제 시험이 하나둘씩 끝나고 있다. 단어 테스트를 보는 일이 이제는 거의 업어서 아이들이 오면 가끔씩 이야기하고 청소하는 게 반복이다. 며칠 전에 건희쌤과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건희쌤 이야기를 들으니, 이 일에 관심이 생겼다. 걱정은 된다. 아직도 가끔씩 아이들에게 존댓말이 먼저 나오는데 잘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가진 영어 실력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까?


5월 09일

원장님이 갑자기 중간에 불렀다. 혹시 강사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신다. 중학생 1, 2학년 아이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조금 당황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 말 자체가 그래도 나름 이 안에서 적응하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뭔가 잘 안될 것 같아 걱정했는데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다.


5월 12일

일단 원장님과 이야기를 했다. 당장은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하기 싫은 건 아니다. 좀 더 준비를 해보고 아이들과 수업해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한가롭다. 확실히 시험이 끝나니까 학원이 여유롭다. 건희쌤은 가끔씩 늦게 출근하신다. 가끔씩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아이들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데 잘 모르겠다. 원장님은 일찍 출근하시지만, 그만큼 일찍 퇴근한다. 나도 무언가 풀어져있다. 5월은 그렇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 준비를 하자.




6월 02일

다시 시험 기간이다. 아이들이 또 나를 찾는 시간이다. 나는 좀 더 일찍 출근해서 단어 테스트지를 뽑는다. 이전에 하던 일이 반복된다. 그리고 후회한다. 젠장, 좀 더 공부할 시간이 있었는데 제대로 하질 못했다. 건희쌤에게 이런 넋두리를 얘기하니까. 허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한다. 건희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저렇게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지. 저렇게 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6월 29일

와 이번 기말고사는 더욱더 정신없다. 단어 테스트에 원장님이 무언가 타이핑을 시킨다. 가끔씩 청소를 못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마음먹은 게 있다. 여름 방학부터는 나도 아이들과 수업을 해보려고 한다. 건희쌤한테는 어제 말했다. 후, 조만간 원장님께 말씀드려야겠다.


7월 05일

아이들 기말고사가 막바지에 이른다. 어제 원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서 다다음주? 부터는 수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동안 원장님이 맡아서 하던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한다는 게 조금은 떨리지만, 그래도 원장님과 건희쌤이 많이 응원해 주신다. 잘 모르겠지만, 잘해봐야겠다. 파이팅!



8월 01일

또 오랜만에 쓴다. 허허허 잘 모르겠다. 지난번에 쓴 그대로 ‘잘 모르지만, 잘했으면 좋겠다.’에서 ‘잘 모르겠지만’만 남았다. 오히려 강사로 아이들 앞에 서니까 또 안 하던 존댓말이 튀어나온다. 나름 준비한 부분에서 수업을 하려 하면 갑자기 하얘진다. 다들 괜찮다고는 하는데 걱정된다. 우연히 맨 처음 쓴 일기를 본다. 진짜, 바라던 미래는 오지 않는 건가? 걱정된다. 그래도 힘내야겠다. 일기들을 보니 ‘어떻게든 적응이 되겠지.’ 하고 믿는다.



9월 10일 아침

어제 건희쌤과 한 잔 했다. 사실은 어제 써야 하는 건데 이래 저래 정신이 없어 오늘 남아있는 것들만 쓴다. 시험기간이 조금은 두려워진다. 나름대로 나온 문법들을 공부하고 미리 문제들도 풀어봤는데 잘 나오지 않아 속상했다. 건희쌤과 한 잔 하고 이야길 들으니 마음속 고민들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래,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어제 또 민망한 일이 있었다. 막 엄청 예쁜 사람은 아닌데 묘한 분위기가 있는 사람을 봤다. 파란 머리가 그런 분위기를 만든다. 그 순간 갑자기 시간이 멈춘다. 아니 서서히 흐른다. 그러더니 생글 웃고 지나간다. 나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빠진 놈처럼 굴었다. 아이고, 언제 정신 차릴까.. 걱정이다.


9월 10일 저녁

하하하 알고 보니까. 어제 봤던 그 사람은 이전에 건희쌤반 학생이었다. 아직도 나는 무언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기분이.. 기분이.. 참으로 더럽다. 어제 본 그 파란 머리의 여학생이 나를 보고 인사했던 것이다. 나는 혹시나 누군지도 모르고 긴장했던 거다. 이렇게 부끄러울 수 없다. 짧게 쓴다.



12월 5일

아주 오랜만에 또 글을 쓴다. 이전 일기들을 보니 이렇게 또 시작한다. 9월과 10월은 시험 기간이 있어 나름 바쁘게 움직이고 적응했다. 이제 거의 시험이 마무리가 된다. 오늘 이렇게 쓰려고 했던 건 그때 그 파란 머리 학생이 학원에 찾아왔다. 유진은 건희쌤과 이야기를 하더니 웃으면서 ‘쌤 다음에 봬요.’하더니 휙 간다. 머리는 고새 파란 머리가 사라 젔다. 나는 그래도 전보다는 밝게 인사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12월 9일

건희쌤이 그만 둔지 한 이틀 정도 됐다. 아니 이틀이 되었다. 새로운 선생님은 나름대로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문제는 나 역시도 이상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뭐지. 뭔가 께름칙하다. 마치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폭풍 전야가 있는 거 같다. 조금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후, 영수야 나름대로 잘 보냈다. 나름 마무리만 잘하자.


12월 11일

학원에 오니 유진이 데스크에 앉아있다. 엥? 싶어서 조심스레 물어보니 이전에 내가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괜히 민망하다. 수업을 마치니 유진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는 건지 이래 저래 물어봤다. 나름 기억을 더듬어 나도 이래 저래 설명해 주었다. 오랜만에 당시를 생각하게 된다. 처음 일할 땐 말하는 것부터 조심스러웠는데. 유진은 보니까 거리낌 없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한다. 조금은 부러웠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



12월 15일

꿈을 꾸었다. 이상한 꿈이다. 건희쌤이 오랜만에 학원에 나와서 수업을 했다. 나는 열심히 적고 듣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가 서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나는 건희쌤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약간 묘하게 비웃는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창문으로 뛰쳐나간다. 건희쌤이 안에서 무어라 소리치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갑자기 깼다. 일어나서 뭐지 하고 잠시 멍 때렸다. 하, 오늘 하루가 길 것 같다.


12월 16일

오늘도 꿈을 꾸었다. 최근에 요상한 꿈을 꽤 꾸는 것 같다. 프라두의 책을 읽어서인지, 한 노인이 나타났고 나한테 무어라 무어라 소리친다. 나는 죄송하다고 빌고 있다. 아마 그 노인이 프라두인 것 같다. 그러더니 나를 때리려고 한다. 나는 힘없이 맞고 있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또 여러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둘러싼다. 나는 그중 한 사람을 잡고 때리려고 하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를 보더니 막 비웃는다. 그러더니 잠에서 깼다. 쳇. 꿈이 뭐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12월 21일

유진이 그만두었다. 뭔가 조금 아쉽다. 좀 더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막 엄청 그러지 못한 게 아쉽다. 나도 슬슬 그만둘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재밌다. 아마? 그러겠지? 에이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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