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메이커

by 혜안

일 킬로미터에 5분 17초. 한 달 전쯤 우연한 계기로 스트라바 라는 앱을 처음 사용하게 됐다. 그 동안은 시간 체크를 할 필요가 없어서 논외였는데 스트라바 앱을 켜고 뛰어 보니 킬로미터당 5분 17초라는 속도가 나왔다.


남편과 나는 7년째 함께 뛰고 있다. 둘 다 운동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타입이고 건강에 관심이 많기도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내가 우울해했던 그 시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남편과 결혼하고 처음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 우리가 살았던 곳은 애리조나 주의 투손 시이다. 현대자동차 투싼 할 때 그 투싼. 아무것도 없이 황량한 사막 도시에서 나는 가정주부로 살았다. 만날 친구가 있는 가정주부 이면 좋으련만, 가족도 친구도 없이, 일마저 없는 생활은 정말 우울했다.


내 일상은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시간 때우기" 였다. 하루 종일 의미 없는 티비 프로그램을 이리 저리 돌려보다가 남편이 오는 저녁 시간만을 기다리는 날들 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운전연습이나 해서 여기저기 혼자 돌아 다녔으면 될 걸 왜 그렇게 틀어박혀 있었나 싶기도 하다.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우울해 하는 나를 데리고 엘에이 피트니스로 데려갔다. 뛰고 스트레칭 하고 근력 운동하고 줄넘기를 하다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내 기분이 조금은 개인 듯 했다. 퇴근해서 피곤한 날이 있어도 남편은 빼놓지 않고 나를 데리고 다녔다.


IMG_9142.HEIC 가을은 야외 달리기의 최고의 시즌이 아닐까 싶다.

날씨가 좋은 요즘은 야외에서 달리는데, 나는 거의 대부분 남편의 등을 보면서 달린다. 스트라바는 필요 없다. 남편이 내 페이스 메이커다. 남편이 같이 달리니 하기 싫은 날도 하게 되고, 그런 날이면 경보 수준으로 느려지는 속도도 어떻게든 끌어올리게 된다. 페이스 메이커와 7년째 함께 뛰고 있는 셈이다.


성격도 그렇다. 남편은 성정이 매우 곧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드는 생각을 숨기지 않는데다가 어지간해서는 귀찮아하는 일이 없다. 반면에 나는 주변 상황에 휘둘려 여유가 없어지기 쉽고, 여유가 없어지면 주변 사람들을 거칠게 대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나의 모습"이 등장했음을 상기시킨다. 몇 번이나 나의 불손한 의도가 까발려지다 보면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이제는 가끔씩 화가 불쑥 올라올 때나 걱정이 불쑥 올라올 때 풀악셀을 밟지 않으려고 한다. 이 남자를 통해 내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으며, 여유있는 다정함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내 성질 페이스까지 잘 리드해주는 참 페이스 메이커다.



화, 금 연재
이전 05화남편의 도미솥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