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안 보이는
옷장 문을 열고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갑갑함이 몰려온다.
몇 달 전 봄맞이 정리를 할 때 혹시나 해서 남겨 두었던 소매가 길거나 두께가 있는 옷들이 여름옷들과 두서없이 섞여 있었다. 옷장 정리를 대대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만 며칠 째이지만 이제는 진짜 정리할 순간이다. 나는 옷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길게는 이 년 반, 짧게는 일 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면서 짐을 늘리지 않기 위해 옷과 신발을 살 때도 신중하려 했고, 매년 연말 작성하는 새해 목표에는 일 년간 옷과 신발을 사지 않는 ‘노 바이 이어’가 빠짐없이 포함되었다. 아쉽게도 매년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옷을 사들이지 않는 정도의 도움은 되었다. 이로써 사들이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긴 해도, 개수는 착실히 증가했으면 증가했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늘어난 옷들이 옷장을 가득 채웠고 그걸 보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래 이제는 옷을 비워낼 때가 온 거야.
물건에 대한 압박감은 연 단위 계약의 월세집을 옮겨 다니느라 자주 이삿짐을 꾸리게 되면서 시작됐다. 일정한 주거지가 있었다면 내가 얼마나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든 그중에서 안 쓰는 물건이 얼마나 되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별로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옮기고 보관하는 수고로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 이상, 그 수고로움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가 커져 갔다. 이런저런 유튜브 영상과 책을 통해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지만 결국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당장 물건들을 처분해 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먹은 대로 쉽게 행동할 수 없었다 - 예를 들어 몇 년 간 수납장 깊이 박아 두었던 제빵기계를 최근에야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 안 쓴다고 처분한 물건들이 혹시나 나중에 다시 요긴하게 쓰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다. -
그러던 중 이거라면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물건이 떠올랐다. 수납장 한 칸을 크게 차지해 눈에 띌 때마다 마음을 무겁게 했던 바로 그 물건. 와플 메이커. 몇 년 전 한국에서 크로플이 유행하던 때에, 외국에서 크로플 장사를 하면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에서 크로와상 생지를 직접 만들었던 적이 있다. 반죽은 나무 밀대로 밀더라도, 와플처럼 눌러 구우려면 와플 메이커는 사야 했다. 그렇게 산 와플 메이커는 몇 번 크로플을 만들어 낸 후 다음 몇 년 간 빛을 볼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영영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중고 거래를 시도해 봤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하고 보니 중고 거래도 할 만했다. 배송비와 수수료를 제외하고 얼마간의 돈이 남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와플 메이커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와플 메이커가 들어있던 수납장 한편이 시원하게 뻥 비어버렸다. 그렇게 한 번의 속 시원한 경험을 하자 그다음엔 옷장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옷도 신발도 이 정도면 미니멀하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해 왔다. 회사에 입고 가는 옷과 주말에 자주 입는 옷은 정해져 있는데 왜 옷장은 꽉 차있는 걸까. 답은 입고 다니지 않는 옷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낡은 옷, 손이 가지 않는 옷, 너무 짧아 나이에 맞지 않는 옷, 아무래도 입고 갈 자리가 마땅치 않은 옷 등등 처분할 옷들을 가려냈다. 처음에는 옷을 버린다는 게 이상했지만 점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이 즉각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분할 옷을 따로 모으고 남길 옷을 정리해 넣었더니, 여름옷은 옷장 한편에 소담히 모일 정도로 수가 적었고 가을겨울 용 옷가지들도 작은 서랍 네 칸에 다 들어갈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곤 처분할 옷들 중에 쓰레기로 내놓을 것들을 봉투에 담아 들어보았다. 터질 듯한 봉투가 혼자 들기에 무거울 정도였다. 그 때 깨달았다. 내가 안 입고 버리는 옷이 이렇게나 많고 무겁구나 그러므로 다시는 옷을 쉽게 사지 말아야겠구나.
깨끗하게 정리된 옷장을 보니 속이 시원해진다. 옷을 버리는 행위가 역설적으로 사모으는 행위를 더 힘들게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정기적으로 필요 없는 물건을 되팔거나 처분하여 사는 행위에 대한 느낌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곧 주재원 계약도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잘 됐다. 점점 더 줄여보자. 내 인생도 발걸음도 가벼워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