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라자의 휴일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by 혜안

"오 뭐야, 이런 티켓이 따로 있었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기프트 티켓 사이트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작년 연말 휴가 가기 전의 마지막 출근 날, 팀 동료로부터 선물을 받았었다. 상상치도 못했던 선물에 기쁘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약간은 민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보다 며칠 전 근무 시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파티 때 했던 화이트 엘리펀트 ー 정해진 액수에 맞게 각자 포장된 선물을 준비해 와서 차례로 선물을 뽑거나 혹은 그전에 다른 사람이 뽑은 선물을 뺏어오는 게임 ー가 연말 선물의 전부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따로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으니까. 마음씨 좋게 베푸는 걸 좋아하는 그는 다른 팀원들을 위해서도 선물을 한 가지씩 준비했다고 했다. 연초에 있을 큰 시스템 릴리즈를 위해 모두가 밤낮없이 코드 프리즈 기일만 보고 달렸던 수고에 대한 감사라며. 나는 특별히 그 시기가 힘겨웠는데, 소통이 안 되는 프로덕트 오너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초록색 리본이 달린 깨끗한 화이트톤의 포장지를 조심조심 벗겨 보았다. 무슨 선물이든 간에 포장된 선물은 뜯기가 조심스럽다. 누군가는 북북 뜯어야 제맛이라고 하지만 나는 포장도 선물의 일부인 것 같아 소중히 뜯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열어보니 스파 앤 에스테틱이라고 적힌 두께가 얇은 하늘색 종이 상자가 나왔다. 그 종이 상자를 열어보니 카드 두 장이 들어 있었는데 한 장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에 감사한다'는 수기로 쓴 카드였고, 다른 한 장은 큐알코드가 인쇄된 스파 티켓이었다. 스파 티켓은 처음 받아보는데 너무 비싼 것은 아닐까 마음이 쓰였다. 큐알코드를 스캔해 보니 사용방법이 안내되어 있었는데 등록된 스파 리스트를 보고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는 식이었다. 그런데 스파 리스트 페이지에서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 봐도 내가 사는 지역의 스파는 나오지 않았다. 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드롭다운 버튼을 클릭해 보니 역시나 내가 사는 지역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도 다음으로 큰 도시가 리스트에 없다니. 일부러 없던 여행 계획을 만들어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다른 지방으로 가야 하나 싶었다. 아니면 그 지방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티켓을 주거나. 그러고서 몇 달이 지났다. 선물로 받은 티켓이라 친구에게 주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여행 계획을 만들어 일정에 스파를 추가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나질 않았다. 티켓 유효기간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친구에게 넘기는 수밖에 없겠다 하고 다시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혹시나 해서 상품 안내 페이지를 보니, 내가 받은 티켓은 수도 지역의 스파들을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이었고, 다른 지역을 타깃으로 한 별도의 상품들도 존재했던 것이다! 아 역시 이 큰 도시가 빠져 있을 리가 없던 거였어.


혹시나 선택 지역을 변경할 수 있는지 고객센터에 메일을 보내보기로 했다. 이 나라는 일처리가 아주 칼 같아서 ー 매뉴얼의 민족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ー 내 요청을 들어줄 거란 기대는 거의 없었지만. 이틀 후에 고객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지역을 변경해 주겠다고! 별 기대 없이 보냈던 문의 메일이었지만 예상과 달리 내가 원하던 답이 돌아왔던 거였다. 물어본다고 손해 될 건 없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넘어가자는 내 성격이 또 통하는 순간이었다. 럭키 걸. 유효 기간이 한 달 밖에 안 남았으니 급히 스파에 연락해서 딱 한 타임 남았다는 다음 주말의 빈 시간을 예약을 했다. 또 럭키 걸. 그렇게 기다리던 주말이 됐고 나는 스파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훅 아로마향이 코끝을 스치고 히비스커스를 넣은 듯한 핑크색 얼음이 동동 띄워진 웰컴티가 나온다. 방으로 안내되어 족욕에서부터 참깨 기름을 이용한 아유르베다식 마사지가 시작된다. 에스테티션의 손이 리드미컬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며 종아리 아래쪽부터 오금까지 부종의 ㅂ자도 남지 않을 정도로 살을 쓸어 올렸다. 참깨 기름과 적정한 압의 향연으로 전신의 근육이 풀리고 노폐물이 녹아내리는 듯한 진정한 마하라자의 휴일. 아 이 얼마나 달콤한 한 시간인가. 언제나 그렇듯 달콤한 시간은 입에 넣은 초콜릿이 녹듯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지체 없이 나오는 애프터 드링크와 함께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던 최상의 휴식을 아쉬움 가득 남기며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음 날은 어김없이 시파히의 휴일이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지난 몇 년간 신어온 익숙한 검은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어제 받은 마하라자 트리트먼트의 기운으로 오늘은 평소보다 일 킬로미터를 더 뛸 생각이다. 시파히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항상 달리는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뻗어 있는 강둑을 달린다. 오늘도 마하라자이고 싶지만 월요일부터 다시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은 시파히의 체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 나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마하라자도 시파히도 그리고 다른 그 무엇이라도 필요할 때 알맞게 꺼내 써 보는 건 어떨까라고 생각하며 끝이 없어 보이는 강둑을 계속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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