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꼰대

출장 온

by 혜안

'업무 시간 끝났다고 바로 내빼지 않아서 너무 좋으네.'


시끄러운 이자카야. 탄산수만 넣은 논알코올 파인애플 사워를 홀짝이며 자동차 대시보드에 얹힌 태양열 흔들 인형에 빙의하는 중이다. 미국에서 직장 다닐 때도 얘기로만 듣던 '부머'를 여기에서 직접 보게 되다니. 맙소사. 웬만해서는 업무 시간 이후에 하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니,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이제까지 몰랐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2년 전에 프로젝트 킥오프 때도 출장을 왔던 그녀와 뒤풀이 자리에서 가까이 앉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이 있으니 아첨하느라 바쁘다가, 자기가 제일 상전인 오늘은 아주 쉴 새 없이 자기 생각만 늘어놓는구나 싶었다.


회식 장소로 향하는 과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다 같이 여섯 시에 출발해 여섯 시 반에 예약된 이자카야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미국에 가져갈 선물을 사야 한다며 나만 콕 집어 같이 쇼핑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했다. 다 같이 가는 게 아니고, 나만? 물론 내가 여자니 같이 다니기 편하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물론 쇼핑을 하러 누구를 데려간다면 내가 편하겠지만, 친구 사이도 아닌데 애초에 혼자서 쇼핑하면 되는 걸 왜 누군가를 데려가야 하는 건지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번역 앱을 쓰거나 하면서 혼자 이것저것 둘러보는 게 더 편할 텐데, 왜 굳이...? 아무튼 다섯 시에 같이 회사를 나섰다. 화장품 가게에도 들르고, 백화점 옷 가게에도 들르고.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찾은 후로 같은 제품만 몇 년 이상 쓰고 있는 나로서는 추천 아이템이 있을 리 없고, 옷은 유니클로에서만 사 입느라 인기 브랜드를 알 리도 없다. 참으로 같이 가나 마나 한 사람을 고른 게 분명했다.


흔들흔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 내가 앉아 있다. 점심때 밥 한 끼 하면서 친목 도모하면 될 걸 왜 저녁에 모이자고 하는 건지 속으로 정말 '부머' 같다고 생각하는 참에, 그녀가 말한다. '내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업무 시간 끝났다고 바로 내빼지 않고 같이 회식도 하고 친목 도모도 한다는 거야'라고. 그걸로 끝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계속 질주하기 시작한다. '만약에 모든 집안일과 가정에 신경 쓸 일을 남녀가 반반으로 나누어한다면, 오히려 여자들이 관리직으로 더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여자들은 멀티태스킹이 되거든' 등등. 여자라서 멀티태스킹이 된다라... 그런 성향이 다소 있을 수는 있겠지만 단정적으로 성별을 가르는 이야기를 왜 굳이 회식 자리에서 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다. 자기 보다 직급이 높은 남자 동료가 있었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반대로 이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가 바뀌었다면 어떨까? 남자 동료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기분이 상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을 굳이 다른 사람들이 듣는 데서 해도 되는 가에 대해서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세 시간에 걸친 회식이 끝나고 전철까지 같이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많이 마신 것 같지 않은 그녀가 한 그 밖의 다른 많은 말들을 떠올리며, 본인은 부끄러운 것도 모르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맨 정신에서 한 말이니 다음 날 이불킥도 없겠지.


이런 건 근데 세대 차이라기보다는 생각 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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