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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보라 Nov 08. 2022

항암약을 처방받다

백수의 하루


멍......



인간이 이렇게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살 수도 있구나...



몽롱한 일상을 반복 중이다.




퇴원 후 이 삼일 동안 메슥거리던 속은 가라앉았다. 대신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다. 낮잠을 자도 저녁 8시면 다시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드라마 보는 시간을 빼면 신생아랑 비슷한 일상, 신생아는 귀엽기라도 하지.



주부라는 타이틀로 위장했지만 하루 일과를 보면 그냥 ‘백수’다.



요새 백수의 소소한 기쁨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아침에 신랑이랑 아들이 나가고 나면 주부를 가장한 백수가 거실에 앉아 넷플릭스를 켠다. 드라마 몇 편을 보다 보면 벌써 점심시간이다. 누가 나 몰래 시곗바늘을 두 바퀴 돌려놨나? 직장에선 그렇게 안 가던 오전 시간이 벌써 끝나다니.




배민 앱을 켜고 오늘은 무엇을 시킬지 검색한다. 샌드위치가 당긴다. 새로 생긴 집, 배달료 싼 집, 오늘의 할인 쿠폰이 있는 집 중 끌리는 가게에 주문한다. 딩동! 배달이 도착하면 드라마를 일시 정지시킨다. 비닐봉지에 붙어 있는 영수증부터 재빨리 제거한다.(개인정보보호) 포장지를 벗겨 아이패드 앞에 음식을 세팅한다. 왼손으로 드라마 재생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에그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아이스 라테 한 모금을 쏘옥!! 백수는 지금 이 순간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멜로가 체질.  뒤늦게 정주행. 완전 내 스타일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장을 보거나 가족을 위한 물건을 살 때는 망설임 없이 신랑 카드를 팍팍 긁는데, 혼자 배달 음식 시킬 때는 내 카드를 쓴다. 배달시켜 먹는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왜 나는 숨어서 몰래 먹는 사람처럼 행동하는가. 명색이 주부인데 밥도 안 하고 매일 시켜 먹는 게 부끄러운가. 돈 벌 때는 이러지 않았다. 경제 활동을 못하게 되니 사람이 쪼그라든거지.


신나게 먹고 있는데 암 센터에서 문자가 왔다. 병원이랑 친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암 센터에서 연락이 오면 빚 독촉 문자를 받은 빚쟁이처럼 심장이 벌렁거린다.


빚 독촉만큼 무서운 국립암센터 문자





유두 제거 수술 후 이 주 만에 외래 진료를 갔다. 늘 그렇듯 갓 뽑아낸 신선한 피를 먼저 채혈실에 바친 후 유방암 센터로 향했다. 오늘도 역시 인산인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전우라니. 의자에 빼곡히 앉아 있는 암 환자들을 보면 여전히 놀랍다.


오후 2시 30분 진료 예정이라 2시에 미리 도착했지만 3시가 넘도록 전광판에 내 이름이 뜨질 않는다. 대신 한 번도 본 적 없는 안내 문구가 구름처럼 흘러 다니고 있다.


[000 선생님 상담 시간이 30분 이상 지연되고 있습니다...]


예약한 시간보다 40분이나 지나서 진료실에 들어갔다.(결국 한 시간 넘게 기다린 셈이다) 선생님께 사정을 여쭤보니 오늘따라 환자들이 울고불고 하느라 상담이 길어졌다고 했다. 나 같은 환자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충격을 받은. 한쪽 암이 양쪽 암이 되고, 덕분에 브라카 유전 검사를 받아야 하고, 부분 절제가 전 절제로 바뀌고... 불과 한 달 전 내 모습인데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선생님께 위로의 말도 건넸다.


“선생님 오늘 많이 힘드셨겠어요. 쉬시지도 못하고.”


“저는 괜찮은데 환자들이 힘들지요. 같은 여자라 그런가... 환자들 보면 안타까워요.”


목소리만큼 마음씨도 따뜻한 주치의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수술 부위가 잘 아물고 있다며 앞으로의 치료 방향을 얘기했다. 오늘부터 먹는 항암제(타목시펜)를 복용해야 하며 다음 주부터 방사선 치료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전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님을 만나게 될 거라고 했다.


보험사에 낼 서류 때문에 선생님께 소견서를 부탁했다. 자주 써 보셔서 그런지 보험회사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일사천리로 타이핑을 하셨다. 선생님이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수술을 두 번 해서 두 번 보상받게 됐다고 말하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생각보다 명랑한 웃음소리가 진료실을 울렸다. 순간 당황했다. 긴장과 침묵의 방이었던 이곳에서, 항상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내가, 지금은 보고 싶던 은사님을 오랜만에 만난 제자처럼 웃으며 떠들고 있다.



타목시펜 처방전을 받아 진료실을 나왔다. 주사 항암은 피했지만 앞으로 5년, 길면 10년 동안 매일 이 약을 복용해야 한다. 모든 유방암 환자가 타목시펜을 먹는 건 아니다. 유방암에는 여러 가지 타입(호르몬성, 삼중 음성, 삼중 양성)이 있는데, 이 중 타목시펜은 ‘호르몬성 유방암’ 환자에게 투여된다. 내 유방암 타입도 여기에 속한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타목시펜이 유방암의 재발을 막아주는 좋은 치료제라는 건 알지만 유방암 카페에서 읽었던 부작용 사례가 떠올랐다. 타목시펜을 먹고 힘겨워 신음하던 수많은 글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이 약을 먹으면서 어떤 부작용을 겪게 될까. 몸이 움츠러들었다. 오늘은 약만 타가야지. 복용은 내일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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