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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보라 Feb 28. 2023

수술 후 첫 정밀 검사 결과

추가 조직 검사를 받다

지난주에 받은 정밀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다. 결과만 듣고 오면 되는데 꼭 자기까지 가야 하냐며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는 신랑. "이상 없습니다. 다음 진료 때 봐요."를 100% 확신했으면 오늘도 나 혼자 왔겠지. 하지만 이상한 촉이 온다. 그러니 잔말 말고 따라와. 



"뼈 스캔 결과 깨끗하고요. 다른 곳엔 이상이 없어요. 그런데..."


'그. 런. 데.'라니.... .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의사 선생님이 꺼내는 '그런데'는 말이 짓누르는 무게가 다르다.  


"MRI 상에서 얼룩덜룩한 부분이 보여요. 지난번 검사 때보다 혹이 커졌고요. 일단 초음파 검사를 받고 필요하면 조직 검사에 들어갈 거예요."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니. 검사 한 번 통과하는 게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받을 때 보다 어렵구나. "이상 없어요. 6개월 후에 봐요." 이게 그토록 듣기 어려운 말일 줄이야. 


높이가 다른 림보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남들은 어깨 높이에서 막대기를 놓고 시작하는데, 나 혼자 허리에서 출발. 다들 춤추며 즐겁게 통과하는데, 나만 머리가 닿을 듯 아슬아슬. 그래서 지난주 MRI 검사받을 때 선생님이 움직이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구나. 뭔가 문제가 보이니 정확히 찍고 싶으셨겠지.  


선생님은 일단 혹이 심각해 보이진 않지만, 확실히 검사받는 게 좋겠다며 응급으로 조직 검사를 잡아 주셨다. 


그리하여 10개월 검진 통과 기념으로 일본 라멘 한 그릇을 때리려던 계획은 엎어지고, 불은 면발 같은 입술을 한 채  영상 의학과 실로 내려갔다. 


가운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갔다. 옷장 문을 여는데 '나도 모르게' 옆 할머니 가슴에 시선이 꽂혔다.(일부러 본 거 아닙니다) 유방암 수술을 받고 나면 지나가는 여자를 볼 때 가슴부터 보게 된다고 하던데 사실이었다.  



근데, 할머니를 바라보는 내 눈빛. 심상치 않다. 마릴린 먼로나 스칼렛 요한슨, 혜수 언니 가슴을 볼 때만 나오던 레이저를 할머니에게 쏘고 있다. 뭐지? 어르신의 가슴을 향한 이 경이로운 시선은?


부러움이었다. 


양쪽이 번듯이 살아있는, 칼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할머니의 가슴을 생애 처음, 아름답다고 느꼈다.



세월의 흔적이 낱낱이 드러난 주름지고 축 처진 모양새 따윈 상관없었다. 조직 검사 결과에 따라 하나 남은 오른쪽 가슴마저도 날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아랫배까지 늘어져있는 어르신의 가슴을 스칼렛 요한슨 가슴으로 만들었다. 



작년 3월, 처음 암 진단을 받고 정밀 검사할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MRI 상에 안 좋은 게 보인다며 추가로 조직 검사를 했었다. 그 결과 왼쪽에 새로운 암을 발견하고, 전 절제를 하고, 브라카 검사를 하고, 울고, 불고.... 


이젠 다 끝난 줄 알았다. 웃으며 그땐 그랬지 할 줄 알았지. 근데 네버 엔딩 스토리일 줄이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자 분노, 허탈, 우울의 3종 세트가 섞인 헛웃음이 나왔다. 


날씨가 추운 건지 긴장을 해서 그런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몸이 떨렸다. 한 손에는 핫팩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신랑의 팔짱을 꼈다. 역시 인간 난로가 좋군. 나는 난로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난로는 말없이 휴대폰만 바라봤다. 한참을 무언가 검색하더니 "나이가 들면 주름이 지듯 가슴에도 멍울이 생길 수 있다."라며 담담히 나를 위로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초음파 실에 들어갔다. 유심히 초음파로 가슴을 관찰하던 선생님이 지난번 MRI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셨다.


"조직 검사합시다."



주치의 선생님과 같은 의견이었다. 오른쪽에 있던 혹이 커졌고, 육안으로 판단하긴 애매하다. 조직 검사로 확실하게 알아보는 게 좋겠다.


역시 유방 초음파에서 끝나지 않는군요. '조직 검사'는 내게 옵션이 아니라 필수였다. "초음파에서 보니 별 이상 없네요. 조직 검사하지 말고  추적 관찰만 합시다." 이 말을 기대했지만 오늘도 끝까지 간다. 역시 병원서 '희망 회로' 함부로 돌리면 안 돼. 괜히 잘못 돌리다 돌아버리는 수가 있어.


 


검사가 시작됐다. 가슴에 차가운 소독액이 얹히고 마취 주사가 들어갔다. 아플 거라고 했는데 욕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아픔'보다는 '공포'가 컸다. 조직 검사만 벌써 세 번째. 여전히 가슴에 바늘이 들어갈 때면 온 신경과 근육이 움츠러든다.   


"소리가 큽니다. 놀라지 마세요."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한 번 더 할게요. 소리 큽니다."


총 여섯 발의 총성이 울리며 조직 검사가 끝났다. 지혈용 밴드를 붙이고 멍이 들 새라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지난번엔 '딸깍 딸깍' 스테이플러 찍는 소리가 났었는데, 왜 이번엔 '탕, 탕' 소리가 났을까. 


"선생님, 선생님!"


궁금한 건 참지 않기. 커튼 밖으로 나가는 선생님을 다급히 불렀다.


"무슨 일이신데요?"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지난번엔  '딸깍 딸깍' 소리가 났었는데, 왜 이번엔 '탕탕' 소리가 날까요?"


 

"아, 그거요?(웃음) 그냥 선생님마다 쓰는 기구가 달라서 그래요."



단순한 이유였다.



조직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 그런데 이번엔 주치의 선생님 휴가랑 겹쳤다. 다음날은 삼일절. 그러다 보니 검사 결과를 3월 2일 에나 들을 수 있다. 이때가 제일 지루하고 답답하다. 기다림도 익숙해져야 하는데...



심란한 마음에 유방암 카페에 들어갔다. 나와 같은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중 한 환우의 글이 뿌옇던 마음을 닦아 주었다. 




저는 언제든지 다시 암에 걸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오늘 하루 잘 지낸 것에 감사하게 돼요. 



수술과 방사를 마쳤을 때, '당신은 암에서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라는 보증 수표를 받은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그 보증 수표가 '추가 조직 검사'라는 공수표가 되어 돌아왔다. 부도 맞은 사장처럼 분노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런 수표는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그런 보증 수표를 준 적이 없다. 

'언제든 다시 암에 걸릴 수 있다.'라는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오늘 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즐겁게 보내기.

다정하고 든든한 신랑에게 감사.

고 2지만 여전히 예쁘고 살가운 아들에게 감사.

짜장, 탕수육, 피자를 잘 소화시키는 위장에 감사.(건강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 푸는 중)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는 여동생에게 감사.

부모님 아직 곁에 계심 감사. 

따듯한 집에서 낮잠 잘 수 있음에 감사.

가끔 울긴 하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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