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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Jan 02. 2024

최초의 옥외광고 리트파스조일레(Litfaßsäule)

베를린에서 만들어진 광고기둥

요즘은 세계 어딜 가나 도시 곳곳에 현란한 전광판과 각종 광고 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현수막이나 달리는 대중교통수단, 엘리베이터 어디에서든 쉴 새 없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광고의 홍수에 노출되어 살고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홍보를 하는 것은 경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하다.


그럼 전기도 나오기 이전에는 어떻게 옥외 광고를 했을까. 최초의 옥외광고는  리트파스조일레(Litfaßsäule)라는 광고기둥으로 1854년 베를린의 인쇄업자인 에른스트 리트파스(Ernst Litfaß,1816~1874)에 의해 발명되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이나 거리에 세워진 기둥에 광고 포스터를 부착하는 형태로 한 명의 광고주가 혹은 여러 광고주가 나누어 홍보를 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멈추어 서서 기둥 주변에서 360도로 광고를 접할 수 있다. 이 기둥은 야외에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거의 광고 혁명에 가까운 발명이었다.


현대식 석판화로 제작된 최초의 베를린 리트파스조일레

이 광고판은 당시 많은 불법 옥외 광고로 몸살을 앓고 있던 베를린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베를린 경찰서장인 칼 루드비히(Karl Ludwig von Hinkeldey)에게 리트파스가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베를린 지하철역의 광고기둥. 2024

광고에는 최신 뉴스도 게재해야 한다는 조건이 덧붙여져 최종 승인되었다. 1855년에 처음으로 100개의 광고 기둥이 베를린에 세워졌고 발명가의 이름을 따서 리트파스조일레(Litfaßsäule)라 불렸다. 1865년에는 기둥 50개가 더 세워졌다. 베를린 당국과 광고 고객 모두 새로운 광고 매체의 장점을 빠르게 인식했다. 국가는 콘텐츠를 사전에 검열할 수 있었고 광고주는 자신의 포스터를 전체 임대 기간 동안 실제로 볼 수 있는 점을 신뢰했다.


기본 모양은 직경 약 1.4m(원주 3.60~4.30m), 높이 2.60~3.60m의 속이 빈 원형 ​​기둥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포스터의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것도 붙일 수 있었다. 대부분 철판으로 만들어졌고 나중에는 콘크리트와 인조석도 사용되었다. 넓은 바닥과 둥근 후드가 있고 가장자리를 때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1870에서 71년에 일어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보불전쟁(普佛戰爭) 기간 동안 첫 번째 전쟁 소식이 여기에 게재되었다. 전화통신이 널리 보급된 이후에는 중공 원통의 내부를 이용해 전화선 접합부나 변전소 등의 추가 기능을 갖게 되었다.

1855년에 탄생한 광고 매체는 이웃 유럽 국가로  나중에는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건축 방식은 각 나라의 동향에 맞게 조정되어 다양한 형태와 디자인을 띄었다.


1990년부터 안쪽으로 열리는 기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부에는 단말기나 전화기가 설치되었다. 요즘에는 포스터에 유리창을 씌워 전기로 광고판이 자동 회전하는 형태로 진화해 사람들의 눈길을 더욱 사로 잡고 있다.

근래들어 광고 이외에도 다른 기능들을 하는데 2015년 뉘른베르크에서는 공중화장실이 들어서기도 했다. 인터넷 후진국 타파를 위해 2021년 뒤셀도르프에서 5G모바일 전송마스트를 이 기둥안에 설치했고 베를린도 이에 대한 설치를 늘려갈 예정이다.


옥외광고협회에 따르면 2005년 말 독일에는 약 51,000개의 광고 기둥이 있었다.  베를린에만 2019년에는 정확히 2,548개가 있었고, 2024년 현재 베를린 도시 풍경에도 리트파스조일레는 여전히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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