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ABA PROJECT
by BABAJUNG Feb 13. 2018

BABA PROJECT - 칭다오(QINGDAO)


 그러니까 지금 내게 중국에 대해서 쓰라면 너무도 두들겨 맞고 있어서 좋은 글이 써질지 모르겠다. 나는 칭다오에 오고부터 3일간 보기 좋게 흠씬 두들겨 맞고 있다. 배에서 만난 중국 코치 만의에게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피하고 저런 상황에선 어떻게 반격하는지 배웠지만, 이미 심신은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내가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중국이라는 나라는, 그동안 승무원으로 세계를 다니며 보고 배운 일반적인 것들을 우습게 무시해버렸다. 심지어 중국 쿤밍(Kunming)으로 비행 가서 며칠간 지내보았음에도, 그때는 차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이라면, 회사의 등에 업혀있었다는 것과 자금의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겠다. 어째서 이토록 다른 것인 가.


 우리 집에는 ‘호두’가 있다.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다. 한 번은 호두를 데리고 둘이 캠핑을 간 적이 있다. 둘이 그렇게 멀리 간 것은 처음이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넓은 캠핑 장에 손님이라고는 나와 호두뿐이었고, 주인이 기르는 섬뜩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따사로운 햇살이 살결에 포근히 내려앉고 봄의 향기가 싱그럽게 퍼지는, 그런 기분 좋은 날이었다. 나는 호두가 사방팔방 마음껏 뛰어다니며 이곳을 마음에 들어하길 바랬다. 그러나 호두는 꼬리를 바짝 안으로 감은 채 내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주인집 강아지가 다가오면 심지어 소변을 지리면서 바들바들 떨기까지 했다. 나는 호두의 이런 모습이 답답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왔는데 어째서 내 옆에만 붙어 있는 것일까, 다른 강아지들처럼 산속이 집인 마냥 활발하게 뛰어 놀면 얼마나 기특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두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기 영역을 점차 넓혀가더니, 이윽고 내가 볼 수 없는 곳까지 뛰어가버려서는 “호두야!”라고 크게 불러야만 그 귀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호두의 이랬던 모습이 떠오르며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은, 중국에 온 내 모습이 딱 그 꼴이라 그럴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칭다오 기차역에 섰다. 그리고는 어깨를 바짝 움츠리고 바들바들 떨면서 도저히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고 숙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심지어는 기차역에서 내렸음에도 어떤 건물이 기차역인지 몰랐다. 동시에 중국인들의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렸고, 사방팔방 차들이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어떤 차는 수초 이상 경적을 울리기도 했는데, 저렇게 오래 울려대다간 앞차와 다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했지만, 또 그러진 않았다. 세상이 혼란스러웠다. 바닷가에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바람이 몹시 세차게도 불었으며 눈에 모래가 들어왔다. 신호는 보란 듯이 빨간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가 없어 모두 찻길로 걸어 다녔으며, 무단횡단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들에게 차들은 관대했다. 아무튼 나는 이것을 보고 있자니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숙소까지 나를 데려다준 만의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나는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했고, 만의는 상해로 떠났다. 숙소는 직원들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것만 제외하면 괜찮았다. 나는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창문 없는 4인실 방에는 나 혼자 뿐이었고 몹시도 고요했다. 순간 나는 가벼운 몸살 기운을 느꼈다. 동시에 외로움도 같이 나를 찾아왔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이미 온통 머릿속을 지배당한 내가 한심했다. 엄마는 내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무슨 일 있냐”라고 줄곧 물었는데, 그때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이걸 해서 얻을 건 뭐지?” 여행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인생에 새로운 변화를 주었지만, 또한 나를 멈추려고도 했다. “내가 중국 여행을 마치고 네팔로, 그리고 인도로 갈 수 있을까?” 나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마음 편하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국에서 지내던 평범한 어느 날처럼 시원한 감자탕에 소주 두 병 마시고 카페 가서 커피 한잔 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몸살기운 때문인지, 이런저런 한심한 생각에 휘둘리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별로 꿈같은 것은 꾸지 않았다. 하루는 잤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한 시간 남짓 지나있었다. 방 안에 푸세식 화장실이 붙어있어서 인지 일어나자마자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중국은 좀처럼 내 머리를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한국에서 사용하던 휴대폰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무용지물이었다. 우회적인 방법을 써서 몇 프로그램을 사용할 순 있었지만, 이것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지도를 쓰고 있는데 성능 면에선 좋은 듯 하나 영어 지원이 없다. 음악 듣는 프로그램도 중국 것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로지 중국어로만 되어있어 간신히 음악을 듣는 것까지만 성공했다. 그러니까 이 중국이란 나라는 중국의 것을 제외한 외국의 것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이것은 정말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핸드폰에 지독히도 의존적인 한국인에게는 더욱이 그렇다.


 중국 여행을, 특히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하려면 사전에 공부를 많이 해야 고생하지 않는다. 나는 그러지 않았기에 첫날부터 지독하게 고생했다. 중국으로 올 때 내 수중에는 승무원시절 쓰다 남은 250위안과, 여행비가 달러로 있었다. 중국에서는 한국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250위안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하다가 환전소가 보이면 100불씩 환전해서 사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첫날 나는 휴대폰 심카드 구입에 200위안을 썼고 다음 날 환전하러 가는 길에 ‘타코야끼’를 먹어 20위안을 썼다. 나는 칭다오 시내를 쥐 잡듯 돌아다니며 환전소를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의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은 위조지폐가 너무 많아 길거리 환전소는 전부 불법이라 아마 찾기 힘들 것이라고, 은행에서 환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러니까 수중에는 30위안, 그리고 지훈이가 사준 ‘몽쉘’과 삶은 달걀 세 개가 있었으며, 이것으로 월요일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곤 낮에 먹은 ‘타코야끼’ 여섯 알이 전부였다. 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시작부터 굉장한 미션이 주어졌다. 


 내게 특기라곤 창피스러운 것 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굶기다. 나는 꽤 잘 굶는다. 정말 작정하고 굶으면 일주일간 물과 오이만 씹어먹고도 살 수 있다. 물론 안정된 환경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아무튼 나는 굶기로 작정하고 그저 발 닿는 대로 칭다오 길거리를 거닐었다. 여행 온 사람들이 신이 나서 기념품을 사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고 갈 때, 나는 그저 사진이나 찍고 그곳을 지나쳐야 했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직은 배가 고프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 돈으로 먹을 것을 사야 하나, 물을 사야 하나, 물을 사기 위한 최소한의 돈은 얼마를 남겨놔야 하나와 같은 걱정은 줄곧 되었다. 그런데 그때 만의에게 연락이 와서는, 신기한 것이 있다며 숙소로 돌아가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도 한참 후에나 숙소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두 개의 하얀 봉투였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열어서 확인해보았는데, 하나는 만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족발이었다. 잠시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다가 문득 만의가 연락을 달라고 한 것이 떠올라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만의야, 이게 네가 말한 그 신기한 거야?”라고 물었는데, 만의는 “네 형, 저도 몰랐는데 한국에서도 배달을 시킬 수가 있더라고요. 족발이랑 만두가 청도지역 특산음식이에요, 드셔보세요 맛이 괜찮은지”라고 대답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88년 8월 18일에 태어난 것이 복덩이가 맞나 봅니다. 나는 중국에 와서도 아직 선물을 받고 있다. 정말 내가 필요한 그 선물 말이다. 나는 내일을 생각해서 족발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저녁으로 만두만 먹었다. 참, 지훈이가 준 몽쉘도 두 개 먹었다. 


 그날 밤은 꿈도 꾸지 않았고 아주 깊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전날 아껴둔 족발을 먹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위를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늘려온 모양이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졌다. 긴장한 탓인지도 모르겠는데 특기인 굶기가 잘 실현되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돈도 없고 배고프니, 모든 것이 신경 쓰이고 날카로웠다. 일요일은, 아직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루트를 마저 세우며,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밤이 되고 나는 슈퍼를 찾아가 봉지라면 두 개와 과자 몇 봉지에 남은 전 재산인 30위안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이기 위해 커피포트를 열어 보았는데, 여기에 물을 끓였다간 죽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나는 라면 두 개를 생으로 부셔먹고 과자와 삶은 달걀 그리고 몽쉘을 입에 구겨 넣었다. 내일이면 환전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모든 음식을 입에 구겨 넣고 씁쓸하게 잠에 들었다. 그리고 이 날은 꿈을 꾸었다. 배가 곯고 입이 말라비틀어진 나는 결국 한국에 돌아갔는데 지훈이 부인 민지가 나를 집에 초대해 낚지 물회를 해주었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 입에 넣었는데 마치 미숫가루를 수저로 퍼서 먹은 듯 퍽퍽했다. 나는 그대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일어나니 또 몸살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으슬으슬 춥고 코가 막히고 괴로웠다. 중국에 온 후로 콧속이 단단히 막히고 목감기가 들었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담배를 피우고 공기가 좋지 않은 이유인 것 같았다. 마스크를 꼭 쓰고 다녔는데도 그렇다. 아무튼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았지만, 드디어 환전을 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손꼽아 기다린 날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끌고 가 찬물 샤워를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 복대에 천 달러를 들고 중국은행(Bank of China)으로 기분 좋게 찾아갔다. 그러나 내심 걱정이 하나 있었다. “환전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지? 수중엔 5위안뿐인데..” 중국은행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허름한 가방을 메고 행색이 거지 같은 남자가 나를 보더니 중국어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대충 듣자 하니 환전할 것이냐고 묻는 듯했는데, 위조지폐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은행으로 들어갔다. 중국은행 직원이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했다. 은행 직원이 ‘Exchange’도알아듣지 못하니, 나는 하는 수 없이 번역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환전하고 싶다” 하니 돌아오는 말. 청천벽력 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로 한국으로 가야 하나 싶었다. “당신 비자 기간이 너무 짧아서 환전이 안 돼요.” 제발, 제발 부탁이다. 제발 환전 좀 해줘. 지금 당신들이 환전을 해주지 않으면 정말 굶어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나는 잠시 은행 밖으로 나와 계단에 앉았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어떤 희망도 남지 않은 듯했다. 머릿속은 다시 요동쳤다. “몰래 한국에 들어가서 환전하고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야 하나?”이런 것 말고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만의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하자 중국은행 직원을 바꿔달라고 했다. 직원의 말로는 나 같은 비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환전을 해서 불법으로 더 비싼 값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환전을 해주는 행위가 계속되어, 불과 몇 개월 전에 비자 기간이 짧은 외국인에게는 환전을 해주지 않는다는 정책이 생겼다는 것이다. 정말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이 나라는 여행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인가. 


 잠시 후 만의가 지도로 나의 위치를 찍어보았는지 바로 옆에 중국 공산은행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보라고 했다. 나는 만의의 말대로 공상은행으로 가서 직원과 연결시켰다. 직원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만의가 내게 말했다. “형 됐어요 그 사람이 해준데요!” 나는 정말 만의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은행 직원 옆에 있던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 중국은행 앞에서 본 그 남자와 비슷한 옷차림에 가방을 들고 있는데 직원과 계속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환전을 위한 기본 절차인 여권을 보여준다 던지 혹은 서류에 사인을 한다 던지 하는 절차는 생략한 채, 둘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허름한 남자가 중국 돈 한 뭉치를 꺼냈다. 불길한 검은 기운이 은행 전체를 휩싸는 듯했다. 이 사람이 은행 직원이 맞나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유니폼만 입고 은행에 들어와서 내게 사기 치는 것은 아닌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위조지폐라고 거의 확신한 내가 거래를 포기하고 나가려고 하자, 그 남자는 나를 VIP 카운터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돈을 카운터 안에 있는 여직원에게 넘겼다. 그 여직원은 돈을 받더니 위조인지 아닌지 그리고 65장이 맞는지를 확인하고 남자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중국어로 무언가 대화를 하면서 말이다. 나는 당장 돈이 전혀 없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저 카운터 안에 있는 여자 도전 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나는 다른 쪽에 있는 여직원에게 다시 확인을 해보자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던 여직원은 짜증이 났는지 처음에는 해주지 않다가 내가 계속 조르니 결국 해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OK”라고 했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배고픔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한 장 한 장 확인을 했다. 내가 본다고 무엇을 알겠냐 만은 그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확인을 마치고 이윽고 그에게 1000달러를 건넸다. 


 거래를 마치고 은행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득 또 하나의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른 일행이 나를 따라와 돈을 빼앗아 가면 어쩌지?” 달렸다. 그냥 달렸다. 이따금씩 뒤를 힐끔 돌아보며 달려서 지나가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너무도 무서웠다. 버스에 타고도 한동안 누가 날 쳐다보진 않는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이 안정될 때쯤 핸드폰을 확인했다. 돈거래를 한 남자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중국어로 쓰인 문장을 영어로 해석해보니 “다음에 어려운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10000% 믿음”이라고 적혀있었다. 피식- 하며 웃음이 났다. 나는 곧장 식당으로 달려가 가장 먼저 보이는 국수를 가리키며 “저거 하나랑 밥 한 공기!”를 외쳤다. 정말 말도 못 하게 맛있었다. 국수를 다 먹고 주인과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웃으면서 엄지를 척 세웠고, 그도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생각해보니 중국에 와서 처음 웃은 것 같았다. 식당에서 의심 없이 돈을 받은 것을 보니, 다행히도 위조지폐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타벅스로 와서 커피를 두 잔이나 시키는 짓을 했다. 이것은 엄청난 과소비인데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작은 보상 같은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도 한국에서처럼 푹 눌러앉아 다섯 시간째 글을 쓰고 있다. 화장실에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보면 여전히 긴장 중인 모양이다. 저녁에는 돈이 없어서 가보지 못한 꼬치거리를 한번 가보려고 한다. 작은 오징어 꼬치도 하나 사 먹어 볼 것이다. 이제 나는 돈이 있으니 말이다. 칭다오에서 꽤 오래 지냈다. 아무래도 중국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깝지만 다른 이 중국이란 나라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고통이 함께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적응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꽤나 안정을 찾으면서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대는 중국인들이 간혹 귀여워 보일 때도 있긴 하다.



keyword
magazine BABA PROJECT
과거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근무했었으며, 현재는 제 삶을 찾는 31살의 여행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적습니다.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