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해질 때 즈음 떠난다. 화장실에선 쾌쾌한 냄새가 흘러나와 코를 찌르고 2층 침대 두 개가 들어서면 꽉 차는 방이 이제는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나는 주로 숙소의 입구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작업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손님이 들어와 내게 뭐라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영업을 하는지 물어보는 듯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직원을 가리킨다. 중국어 한 마디 못하는 나와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직원과 무언의 하모니가 완성될 때 즈음인 것이다. 정말 웃기는 것이다, 나를 극한으로 몰고 간 이 도시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말이다. 나는 지난(제남)으로 떠나야 했다. 중국의 기차역은 아침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침 일찍 짐은 방에 둔 채로 티켓을 먼저 받으러 갔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사람은 많이 없었고 곧 내 차례가 왔다. 나는 기차 예약 확인서와 여권을 건네었는데, 창구에 앉은 여직원이 내게 뭐라고 얘기했다. 물론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웃는 것뿐이었고, 목젖에 녹음된 “팅부동”만 반복 재생하자 영어를 조금 하는 듯한 직원이 왔다. 뒤에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만 철면피가 되어야만 했다. 바꿔 앉은 직원의 영어는, 이것이 중국말인지 영어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는데 마치 영어에 성조를 넣어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키고 있는 듯했다. 결국 나는 여직원의 말을 끝까지 알아듣지 못했고, 몹시 짜증이 난 그녀는 내게 티켓을 주었다.
뭐였을까, 그동안 내게 물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티켓을 받고 큰 잘못이라도 한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나온 김에 아침을 먹기로 했다. 아무래도 중국어 메뉴 밑에 영어 설명이 적혀있는 레스토랑은 대부분 비쌌다. 내가 가는 식당은 대부분 문이 활짝 열려있으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주인은 오래 빨지 않은 듯한 앞치마를 메고 있다. 손님들은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아마 금성에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물론 주인도 함께 TV를 보고 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손님이고 주인이고 전부 호탕하게 웃기도 하는데, 그 소리가 도로 반대편까지 울려 지나가던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그런 식당이다. 내가 설명한 딱 그런 식당에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푸짐한 인상의 주인아줌마가 나를 반겼다. 나는 이어 녹음된 음성파일을 재생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중국어는 못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한테 너무 어려운 말은 하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푸짐한 아줌마는 호탕하게 웃으며 더욱 빠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대충 웃어넘기고 앉아 메뉴를 훑어보았는데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중국에 와서 메뉴를 보지 않고도 음식을 시키는 굉장히 좋은 방법을 한 가지 터득했는데, 그것은 손님들이 먹고 있는 것을 쭉 훑어보고 맛있어 보이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나온 음식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인데, 아무튼 나는 이 방법으로 아직 실패한 음식이 없었고 푸짐한 식당 아줌마에게 엄지를 척 올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과하게 걱정한 탓일까, 배낭을 챙기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한 시간 이상 시간이 남아 침대에 누워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나는 와이파이가 될 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 놓으려 노력했는데, 데이터가 한 달에 1GB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보를 찾던 중 걱정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에는 여러 종류의 기차가 있는데 나는 그중 가장 싼 기차의 가장 싼 좌석을 선택했다. 좌석 이름마저도 ‘딱딱한 의자’였는데, 내가 걱정되던 것은 그 좌석 칸에는 중국 상인과 도둑이 우글거린다는 것이었다. 상인은 싼 가격 때문에, 그리고 도둑은 최소한의 금액으로 기차에 올라 물건을 훔쳐간다고 했다. 청도에서 지난까지는 약 다섯 시간이 걸리므로, 나는 기차에 올라 소리 없는 전쟁을 해야 할 것이었다. 절대 잠들지 말 것이며 배낭에서 귀중품은 모조리 빼고 작은 가방에 넣어 꼭 끌어안고 있으라고 했다. 심지어 책도 읽지 말라고 했는데, 한글로 된 책을 읽고 있으면 도둑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고 했다. 여유가 없다면 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비니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코까지 바짝 끌어당겨 썼다. 얼굴에서 노출된 부위라곤 오직 눈 밖에는 없었다. 귀도 마저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노래를 재생할 데이터가 없어 그것은 포기해야 했다. 나는 내 주변으로 다시금 튼튼한 방어벽을 쳤다. 체크아웃을 하며 번역기에 “그동안 고마웠어요. 덕분에 편안히 지냈습니다.”라고 적어 보여주었다. 정확히 번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원이 옅은 미소를 띤 것을 보면 아마 의미는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숙소를 나왔다. 배낭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무심하게 터벅터벅 걸었다. 기차역까지 가는 길은 외워 두어 휴대폰 지도를 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었는데, 아마 도둑놈이 보았으면 “저놈이 긴장한 걸 보니 안에 무언가 좋은 물건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방어벽은 순식간에 무지막지하게 부풀어 올랐다. 엄청나게 불편한 기색을 마구 뿜어내며 옆을 돌아보자, 아까 아침을 먹었던 식당의 푸짐한 주인아줌마가 나를 보며 껄껄거렸다. 긴장해서 몰랐는데 그 식당 옆을 지나고 있던 것이었다. 아마도 “떠나냐”라고 묻는 듯했다. 정말이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는 무겁고 단단한 방어벽을, 푸짐한 주인아줌마는 특유의 호탕함으로 멀리 걷어차버렸다. 나는 이내 무방비 상태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네, 지난으로 가요. 잘 있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 꽤 많은 중국인 친구가 생겨버렸다. 저 푸짐한 주인아줌마가 나의 벽을 너무도 멀리까지 걷어차버리는 바람에, 다시 가져오는데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 기차역까지 옅은 미소를 띠고 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소매치기와 도둑이 우글거리는 청도 기차역에 도착했다.
인간에게는 오감 말고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하나 더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내 배낭에 꽂히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한 늙은 여자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으며 기차역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나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는데 늙은 여자가 계속해서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소매치기의 전형적인 수법인, 말을 걸어 정신을 교란시킨 후 누군가 붙는 것은 아닐지 걱정됐다. 나의 벽은 백 톤, 아니 천만 톤의 무게로 부풀어 오히려 공격성을 띠게 되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어 뒤로 돌아 줄곧 나를 따라오던 늙은 여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말라는 공격적인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늙은 여자는 더 이상 따라오진 않았지만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며 나는 서둘러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중국의 기차역에서는 여권과 짐 검사를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권 검사야 공산국가에서는 당연한 절차였고, 짐 검사는 총이나 마약 같은 것이 있나 확인하는 것이지 웬만해선 대부분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번 여행을 위에 스위스에서 맥가이버 칼을 사 왔다. 이것은 내가 몹시 아끼는 물건 중 하나였는데 한국에서 고작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여러 모로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생각이었고 위험할 땐 호신용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엑스레이 검사대를 지나는 내 가방을 검사관이 가리키고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영어로 내게 “칼 가져왔어?”라고 물었는데, 나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검사관은 가방을 열고 샅샅이 뒤지더니 필통에서 순간접착제를 꺼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됐지?”라고 말하며 가방을 덮으려 했으나 검사관은 “아니, 칼”이라며 완강했다. 검사관이 이쯤에서 그만두고 넘어가길 바랬다. 그러나 검사관은 두더지처럼 가방을 잘도 파헤쳐 뒤지더니 이윽고 깊숙이 숨겨진 빨간 맥가이버 칼을 꺼내고는,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마냥 해맑게 웃으며 내게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검사관에게 비싸고 아끼는 것이니 봐달라고 사정해보았다. 그러나 서로 실랑이하며 기분을 붉히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때로 웃음이 오가기도 했다. 잠시 후 검사관이 “따라와요”라고 했는데 나는 이제야 봐줄 생각이 들었구나 하고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명의 남자가 손에 무엇인가를 주물럭거리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검사관은 내 칼을 그들에게 보여주고는 뭐라고 대화를 했는데, 내 귀에는 그것이 “이거 봐줄까요?”라는 듯 들렸다. 그리고 나는 무심코, 두 남자가 손에서 주물럭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것은 책상 위에 수십 개가 흩뿌려져 있었으며 몇 개는 바닥에서도 굴러다녔다. 총알이었다. 무지한 나는 그제야 상황이 내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둘 중 한 남자가 휴대폰 번역기로 한 자 한 자씩 써 내려갔는데 내 눈에는 그에 따라 번역된 영어가 한 자씩 보이기 시작했다. “According.. to.. Chinese.. Law..” 이것을 보자마자 나는 “알겠어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큰일 날 것 같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소중한 맥가이버 칼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다시 엑스레이 검사대로 와서 검사관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검사관은 맥가이버 칼을 보내주겠다며 ‘EXPRESS’라고 적힌 종이를 건네었는데, 나는 그것을 공손히 거절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나는 중국 여행자인데, 지난과 시안을 거쳐 신장이라는 곳까지 계속해서 이동해야 해. 그래서 나는 딱히 주소가 없어서 그것을 받을 수도 없고, 다음에 또 기차를 탈 때 이 칼이 문제가 되겠지. 그러니 그냥 버려줘.” 그러자 검사관은 내게 미안하다며 칼을 철로 된 원통에 버리고는 자물쇠로 잠갔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 신장에 가면 많이 추울 거야. 따듯한 옷 많이 챙겨가고, 여행 재미있게 잘해. 잘 가!”
뭐랄까, 기분 좋게 소중한 것을 놓았다. 말한 대로 맥가이버 칼은 앞으로의 중국 여행에 방해만 될 뿐이었고, 또한 이렇게 입구에서 흉기를 잡아내니 오히려 더욱 안전하게 기차에 탑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사관과 두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전혀 강압적이지 않았고, 다만 지레 겁을 먹은 내가 그들을 괴물로 보았을 뿐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흉기인 칼은 뺏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순간접착제를 왜 가져간 것인지는 몰랐다.
기차에 오르기 전 나는 가방을 한 번 더 질끈 조여 메었다. 카메라를 꺼냈다가 소매치기의 표적이 될 것이 두려워, 가방에서 카메라를 찔끔 꺼내 기차 사진을 빠르게 한 방 찍고 바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표를 보여주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2, 3열 구조로 되어있는데 나는 3열 중에서도 가운데였다. 심지어 3열이 한 방향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면의 3열은 나를 마주 보게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좁아터진 그곳에 여섯 명이 다리를 서로 교차하고 얼굴을 마주 보며 가야 하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발권을 했는데도 자리가 이 모양인 것을 보니 창구 여직원이 단단히 짜증 났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고, 이것이 내가 원하던 중국 기차의 모습이었기에 오히려 흥미로웠다. 의자도 그렇게 딱딱하지만은 않았으며 나름 얇은 쿠션도 깔려 있었다. 내 오른쪽 창가 자리에는 어떤 여자가 앉았는데 꽤나 점잖아 보였다. 중국의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말 수가 적었고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책을 읽었다. 내 왼쪽 자리에는 짐을 한 가득 들고 탄 상인 아줌마가 앉았으며 정면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앉았다. 그리고 그 옆 창가 자리에 젊은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 남자가 의심스러웠다. 키가 작고 덩치도 왜소한 그는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사이로 진주 목걸이 같은 것이 살짝 보이기도 했다. 이 남자는 두 명의 일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리를 따로 앉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부터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의심 투성이인 이 남자는 바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창가에 앉은 여자는 책을 읽고 있었으며 상인 아줌마도 이내 잠에 들었다. 정면에 앉은 부부는 어디선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담아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꽤나 불쾌했는데, 컵라면 냄새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는데 대부분 눈을 감고 있었다. 듣던 만큼 그렇게 위험한 지는 잘 모르겠고 오히려 어떤 정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긴장이 풀려서는 가방을 살짝 열어 아이패드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다섯 시간의 여정에서 책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몇 가지 책을 아이패드에 넣어왔는데, 그중에서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책을 골랐다. 재미있게도 향토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중국의 기차 안에서 나는 완벽하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이 책을 읽기에 완벽한 때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딱 올려 받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틈틈이 선반 위에 있는 배낭도 확인했다.
나는 책을 읽다 어느새 나른해져서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아까 잠들어 있던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위의 선반을 올려다 보고 배낭을 확인했다. 그리고 무릎 위에 가방이 잘 있나 보았고 손에 들린 아이패드도 확인했다. 이상은 없었다. 그나저나 몹시도 시끄러웠다.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는데 승무원이 열차 가운데 서서 뭔가를 팔고 있었다. 승무원은 기차를 이리저리 다니며 열심히 소리를 질러대며 간식 같은 것을 팔았는데 나는 도저히 시끄러워서 더 이상 잘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순간 나는 가방에 있는 귀마개가 생각나서 귀에 꼽았다. 작은 소리가 새어 들려오긴 했지만 책 읽기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귀마개를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책을 읽었다.
기차에서는 담배냄새가 지독히도 났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봐도 기차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정말 아니란 생각이다. 컵라면 냄새와 담배냄새가 섞여 이것이 중국 기차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고 이제 슬슬 허리도 아파왔다. 가방에 귀중품을 모조리 모았더니 너무도 무거워 무릎이 아프고 다리도 저렸다. 그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영어 소리에 나는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한 남자가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인들은 이어폰을 잘 사용하지 않고, 휴대폰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영화를 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귀마개를 껴 거의 모든 잡음이 차단된 상태에서 오직 영화 대사만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전혀 눈치를 보지 않던 그는 나의 소심한 시선조차 느끼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보고자 훑어봐도 각자 자기 할 일을 할 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도무지 책을 읽을 수가 없어 그저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다섯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음에는 ‘딱딱한 의자’에서 10시간까지도 도전해볼 만하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오후 여섯 시를 막 넘긴 창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진하게 내려앉았다. 도착 방송을 알아들을 수 없어, 나는 예상 도착시간에 맞추어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짐을 챙겼다. 첫 기차의 도착에 꽤나 긴장한 나는 배낭을 메고 도착 5분 전에 미리 나가서 문 앞에 서있었으나, 기차는 줄곧 지연되더니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이놈의 배낭을 메고 서있으니 어깨고 허리고 다리고 온 몸이 바닥으로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으려 해도 바로 뒤까지 중국인들이 바짝 줄을 선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데이터를 아껴둔다고 꺼놓았던 인터넷을 켰다. 한국으로부터 도착한 텍스트의 행렬들이 입구가 막혀버린 내 휴대폰 앞에서 부단히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질서 없이 파고들었다. 대부분의 텍스트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으나, 내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나에게도 와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어? 기차에서 도둑한테 털리진 않았지?” 이것을 본 내 얼굴은, 마스크에 의해 대부분이 가려져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잘 왔지만, 나는 왠지 징징거리고 싶었다. 기대고 싶었다. 사실 나는 그런 놈이다. 괜찮아도 징징거리고 싶고 힘들 땐 아주 매달려버리고 싶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누군가 알아주는 것이 좋다. 누군가 내가 힘든 것을 알아주기만 해도 묘하게도 기분이 괜찮아진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고, 그저 “응, 잘 왔지”라고 태연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나는 지난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몹시 찬 바람이 나를 휘감았다. 칭다오에서 걸치고 온 옷으로는, 지난의 추위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정확한 숙소의 위치도 몰랐다. 낯선 곳에서의 어둠은 더욱 어두웠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호두’가 되어, 지난의 기차역 가운데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