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정말 떠날 날이 온 것이다. 세상에! 또 배낭여행을 가다니. 2011년 호주에서 일 년간의 생활을 마치며 배낭여행을 하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시는 절대로 호주 방향을 향해 소변도 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그게 뭐가 그렇게 그리워서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배낭을 다시 짊어진 건지, 아무튼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나는 배낭을 싸겠다며 온 집안을 뒤집어놓았고, 엄마는 매일같이 라면만 먹는 내가 미안했는지 아침부터 삼계탕을 해주겠다며 주방 조리기구를 모조리 꺼냈다. 이렇게 말하면 엄마가 밥을 안 준 것 같이 들리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내가 라면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엄만 그걸 항상 미안해했다. 평소였으면 혼자 삼계탕의 닭 한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밥까지 말아서 한 끼 뚝딱 했겠지만, 내심 꽤나 긴장이 되었는지 그저 닭 한 마리에 그쳤다.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왜 그거밖에 안 먹어”라는 엄마의 한 마디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엄마는 시작부터 끝까지 걱정뿐이다. 짐을 좀 싸려고 하면 “이거 챙겼니, 저거 챙겼니”로 시작해서, 완성된 가방을 살짝 들어보더니 이걸 어떻게 들고 다닐 것이냐며 걱정으로 끝난다. 이제 정말 집을 나갈 시간이 되었다. 수만 번을 드나든 이 투박한 회색 철문을 나가면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어야 돌아올 것이다. 아들이 나가는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강아지 같은 엄마가 “엄마 나 왔어”를 다시 들으려면 열 손가락이 모두 굽어야 한다. 어색한 작별에 익숙하지 않아 엄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나가려다가, 문득 뒤로 돌아 엄마를 안고 “일 년간 많이 커서 건강하게 돌아올게”라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창문을 열고 내 모습이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본 것을 알고 있었다.
인천항까지는 친구 지훈이가 데려다주었다. 원래는 이 잉꼬부부가 같이 데려다 주기로 했으나 민지는 시간이 맞지 않아 같이 가지 못했다. 인천항까지 배웅해주고 싶었는데 못 가게 되었다고 어찌나 서운해하던지, 지훈이에게 꼭 초콜릿을 사서 내 손에 쥐어주어 인증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는 민지에게 혼나지 않으려 ‘몽쉘’을 들고 사진을 찍어 보내야만 했다. 분명 엄마한테 메시지가 와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여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이 이상해서 전화를 해보았다. 집에 혼자 앉아서 허전해하고 있을 엄마가 걱정이 되었다. 전화를 받은 엄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차분했다. 문득 나는, 내가 군대에 갈 때 엄마가 나를 보내고 집에서 울었다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짓궂은 장난을 쳐보고 싶어 졌다. 나는 “엄마 집에서 혼자 우는 거 아니지?”라고 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엄마는 어린 여자아이가 되어 선생님에게 따끔하게 혼난 후 울먹이는 그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응, 오늘만 울게..” 여리디 여딘 그 목소리를, 흐느끼던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결국 나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장난은 엄마를 관통해서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왔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고, 이윽고 시간이 되어 나는 지훈이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탑승구로 들어갔다.
중국은 숫자 8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마 나보다 생년월일에 8이 많이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1988년 8월 18일 생으로 무려 8이 네 번이나 들어간다. 880818. 정말 굉장하지 않은가! 중국사람들이 정말 8을 행운의 숫자로 여긴다면 나는 복덩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배도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출국 절차가 진행되는데,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굳이 수하물을 탁송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큰 짐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배 안으로 갖고 탈 수 있다는 말이다. 출국 심사장을 지나고 배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나는 버스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내 앞에 커플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캐리어를 각각 하나씩 들고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남자가 먼저 버스에 올랐고 뒤이어 여자가 낑낑거리며 버스에 오르지 못하자, 승무원 시절 몸에 배어버린 것이 갑자기 튀어나와, 나는 뛰어가서 그녀의 캐리어를 들어주었다. 형식적인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은 후 버스에서 내렸는데, 배로 향하는 계단이 어지러울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 이제 저 캐리어는 내 책임이 되어버렸다. 도저히 저 여자의 캐리어를 무시하고 혼자 올라가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짐을 다시 빼앗고 철 계단을 한 칸씩 올랐는데 “쿵, 쿵”하며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렸다. 그리고 눈 앞에 에스컬레이터가 나오고 나서야 나는 그녀에게 짐을 돌려주었다.
자리를 찾아 짐을 풀고 나는 바로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큰 배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갑판에 올라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비행기가 뜨는 것보다 배가 물 위에 떠있는 것이 더욱 신기하다. 어떻게 수만 톤의 철 덩어리가 물 위에 떠있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마치 땅에 있는 것처럼 단단하게 내 몸을 지탱해주면서도, 물결에 따라 미묘하게 느낄 듯 말 듯 흔들리는 것이 좋았다.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아까는 얼굴을 자세히 보진 못해서 몰랐는데, 내가 도와준 그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아깐 정말 고마웠어요”라며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아직 여행을 떠나기도 전이라 나는 꽤나 긴장하고 경직되어 있었지만, 그러자고 했다. 어느덧 배가 출발하고 시야가 어둑어둑해져, 나는 약속한 시간에 그들의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2인실로, 이 배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들에게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이들이 나의 돈을 노리는 건지, 짐을 노리는 건지, 혹시 술이나 식사에 약을 타진 않을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선상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와 함께 맥주를 마실 때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화장실에 갈 땐 가방을 메고 갔다. 그러다 보니 나답지 않게 술마저 먹기 싫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저녁식사와 술을 전부 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이유 모를 호의를 경계하며 술을 한 잔, 두 잔 그리고 그들이 주는 대로 받아먹었는데, 아직 견고하지 못한 내 경계는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몇 병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중국 칭다오로 향하는 배 안에서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며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들은 만의와 왕정문이다. 사실 이 둘은 커플은 아니었고 한국 무역회사에 다니는 직장동료인데 둘 모두 중국인이었다. 이들은 출장 차 배에 오른 것이었는데, 실수로 방을 잘못 예약해서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이었다. 이 둘은 한국말을 매우 잘했는데 한국사람으로 한참 동안이나 착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들이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는 이유인 즉, 만의는 홍익대 법학과를 전공했고 정문이는 가천대 국어국문 전공에 무역학 석사 출신이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입을 벌리고 그저 감탄했다.
만의의 본가는 중국 ‘충칭’이라는 곳인데, 여기에는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고 심지어 어머니가 소수민족이다. 그리고 정문이는 바로 몇 달 전, 내가 중국의 최종 목적지로 벼르고 있는 티베트(Tibet)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바로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중국 여행이라고, 소수민족을 만나고 티베트의 고산지대를 가는 것이 내가 바라는 중국 여행이라고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친구들에게 인터넷으로는 차마 찾아볼 수 없었던 많은 정보를 얻었다. 게다가 만의와는 가능하다면 설 연휴에 충칭에서 만나서 소수민족 투어를 가기로 약속했다. 정말이지 배에 오르자마자 이런 인연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16시간을 부지런히 항해한 배는 이윽고 칭다오에 이르렀고, 만의와 정문이는 기차역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도 인터넷이 되지 않는 나를 데리고 숙소까지 찾아주었으며,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직원을 상대로 체크인까지 도와주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정문이의 캐리어를 들어준 것뿐이었는 것 이런 일방적인 호의를 받은 적이 있던가 싶었다. 만의는 내게 상해까지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나는 이제 중국 땅에서 혼자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 아쉽지만 이만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헤어진 이후로도 우리는 중국의 채팅 프로그램을 이용해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려운 일이 있거나 위험한 상황에 닥치면 바로 전화하라고 중국 전화번호도 잊지 않고 알려주었다. 이쯤 되면 생년월일이 중국에서 얼마나 복덩이로 작용하고 있는지, 앞으로 나를 어떤 행운의 길로 인도해줄지 조금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 다만 외로운 것만 빼면 말이다. 이것도 곧 익숙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