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ABA PROJEC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BAJUNG Mar 21. 2018

BABA PROJECT 란저우 – 둔황


 나는 뿌연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연신 기침을 해댔다. 두 명의 중국인이 내가 기침하는 소리에 담배 피우던 것을 꺼버릴 까 봐 참으려고 했지만, 밀고 나오는 기침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를 방으로 안내하던 여직원이 물었다. “담배 안 피워요?” 내가 대답했다. “네, 혹시 금연실도 있나요?” 여직원이 이어 말했다. “아니요. 금연실은 따로 없어요”, 나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지 안 피우는지에 대해 물은 까닭이 궁금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침대는 정리되어있지 않았다. 체크인 시간이 2시여서 넉넉히 4시쯤 갔는데도 이런 것을 보면 처음부터 누군가 오면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여직원이 옆 침대에서 홑이불을 가져와 매트리스 위에 깔고, 옆 방에서 이불 하나를 더 가져와 위에 깔아주었다. 내가 옆에 서있어서 인지 성의 있게 가지런히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이불은 원래 파란색이었던 것 같은데 거무스름한 때가 섞여서 오히려 남색에 가까웠다. 그녀는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오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영어를 아주 조금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저런 말을 하고 간 것이었다. 나는 결벽증 환자는 아니라서 웬만하면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도무지 이 위에선 자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껏 배낭 위에 짊어지고 다녔던 침낭, 나는 그동안 이것을 죽부인처럼 껴안고만 잤는데, 이제야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기 딱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나는 전기장판을 켜놓고 침낭을 위로 펴서 따듯한 공기가 안에서 맴돌도록 했다. 그제야 나는 담배를 빨아대는 두 중국인에게 인사했다. 이들은 여느 중국인과 다를 바 없이 나에게 중국말을 해댔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팅부동”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한 명이 들고 있던 담배를 왼손으로 옮겨 잡고,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입 가까이에 갖다 대고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남자가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번역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귀찮은 대화 놀음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짐을 풀면서 그가 휴대폰을 들이댈 때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야 했으며, 나도 하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 휴대폰을 집어 들어 번역기를 켜서 대답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번역기가 번역을 엉터리로 해버리는 날엔, 나는 몸을 사용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담배냄새는 이미 곳곳에 스며들어 누가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냄새가 지독히도 났다. 나는 이들에게 거리를 둘러보고 오겠노라고 하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나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일단 거리를 둘러본다. 먼저 숙소 주변으로 식당이나 편의점 같은 곳이 있나 보고, 다음으로 무작정 시내를 걸어본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 정도 지도가 눈에 들어와 다음부터는 길을 찾기 상당히 쉬워진다. 란저우를 둘러보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나는 적당히 걷다가 스타벅스로 가서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창 밖은 삽시간에 어두워져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넘었다. 내게 한국에서 10시는 초저녁 같은 시간이었으나, 중국에서 10시는 짙은 어둠 속에서 겁에 질려버리는 시간이다. 

 나는 카페를 나왔다. 숙소까지는 꽤 걸어야 했는데 낮보다 기온이 현저히 떨어져 무척 추웠다. 걷다가 나는 어둑한 골목길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무튼 방향은 맞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걸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도시의 빛은 내가 있는 골목까지 밝히지 못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 적막한 골목길에서 새삼스레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를 돌아보자 부릅뜬 두 눈이 나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쪽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주는 척을 했다. 혹시나 차가 내 앞에서 멈추어 버리거나 한다면 바로 도망가기 위한 준비동작 같은 것이었다. 차는 무심하게 나를 지나쳐갔다. 이후로도 오토바이, 자전거, 차 온갖 것들이 내 옆을 지나쳤는데 나는 그때마다 같은 짓을 반복했다.  

 길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윽고 나는 다리 밑의 어떤 공사장 근처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길이 끊겨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으려 돌아다녔으나 어두워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지도도 도움이 안 되었다. 그때 공사장에서 목줄이 풀린 개 한 마리가 뛰어나와 나를 보고 사납게 짖어댔다. 나는 덜컥 겁에 질려버렸다. 첫째로 저 개가 겁이 났고, 둘째로 개가 짖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올까 봐 무서웠다. 나는 뒤로 돌아 빠른 속도로 걸었다. 뛰거나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면 개가 따라올 까 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목줄 풀린 개는 마치 자기의 할 일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듯 한참을 따라오다가, 내가 멀어지자 사라졌다. 나는 그 길로 한 시간은 더 헤매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뿌연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방을 같이 쓰는 두 중국인이 내게 어딜 다녀왔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스타벅스에 다녀왔노라고 대답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발음이 이상한가 싶어 다시 또박또박 정확하게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나는 번역기에 적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들은 “신바커!”라고 소리쳤다. 세상에, 고유명사마저 중국어로 바꿔버렸다.  

 나는 꽤 지쳐있었다. 침낭 속에 살짝 손을 넣어보자 매우 따듯했다. 얼른 씻고 아늑한 침낭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들은 답답하지도 않은지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댔다. 자꾸 누구를 아냐고 물어보는데, 이름을 중국어로 말하는 통에 도무지 누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휴대폰 자판을 중국어로 바꾸고 그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검색하여 찾아본 그가 말한 사람은, 한국인 프로게이머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줄곧 담배를 피우며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나랑 공감하며 이야기할 건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게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미안하지만 누군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내게 다시 물었다. “게임 뭐해?” 내가 대답했다. “나 게임 안 해” 그가 하던 게임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 게임 알아?”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짜증이 밀려왔다. 이것은 내가 대화를 끊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한국인이었어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이들이 하는 것이라곤 담배 피우고 게임하는 것 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절대 대화거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씻을 채비를 하고 샤워장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는 담배와 휴대폰 게임을 끄고, 나를 샤워장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따듯한 물이 나오는지 확인까지 해주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슬리퍼를 신은 그의 양말에 물이 튀는 것을 보고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래도 좋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씻고 방으로 돌아오니 이들은 다시 담뱃불을 붙이고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적막이 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조용히 아늑한 침낭으로 들어갔다. 전기장판과 침낭의 조화는 완벽했다. 나는 베개를 등에 받쳐놓고 벽에 기대어 앉아, 반신욕을 하듯 침낭을 허리까지만 덮었다. 그리고 곧 불을 껐는데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음 날, 정오가 지나자 중국인들이 일어났다. 전날 밤늦게까지 게임을 한 모양이다. 이들은 일어나자마자 내게 점심 먹으러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마침 배도 고팠으며 이제 나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알겠다고 했다. 내가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이들은 담배를 피우며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씻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들이 씻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이 친구들이 왁스나 어떤 제품을 사용해서 머리를 넘겨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역겨웠다. 식당까지는 다리를 건너 한참 걸어야 했다. 그리고 이들이 나를 데리고 간 식당은, 혼자서도 갈 수 있을 만한 그런 부담 없는 식당이었다. 한 명이 카운터로 가서 ‘소고기 라면’ 3개를 계산했다. 란저우의 소고기 라면은 현지인들이 매일 아침으로 먹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중국에서도 유명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그동안의 훈련을 통해 이것을 얻어먹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소고기 라면은 입맛에 잘 맞았다. 내게 중국음식이 얼마나 잘 맞느냐면, 고수를 더 넣어달라고 할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그들은 좀 돌아다니려고 하는데 같이 갈 생각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까지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으며 나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내가 애당초 란저우에서 지내기로 한 가장 중요한 까닭은, 만의와 함께한 시간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조용한 동네에 작업실까지 있으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카페로 바로 가기엔 아직 시간이 남아 명승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중국은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불교의 향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인도의 불교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남긴 흔적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백탑사도 그중 하나였다. 이것은 산 위에 있었는데, 나는 백탑사를 보기 위해서라기 보단 높은 곳에서 란저우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어서 이곳을 올랐다. 길이 잘 되어있어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힘이 들진 않았다. 어쩌면 체력이 좋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닌다. 지도를 봤을 때 1시간 거리까지는 걸어 다닐 만하다. 걸으면 좋은 것이 많다. 주변이 온전히 관찰의 대상이 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길을 익히기가 매우 쉽다. 나는 심각한 방향치인데 지금껏 건너온 도시들의 지도들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건강해진다던가 체력이 좋아진다던가 하는 것들도 있다. 백탑사 정상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고 나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는 흐릿하고 뿌연 대기에, 밑으로는 황하가 흘러 전체적인 색감이 칙칙하고 탁했다. 나는 올라온 것이 아까워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올라와 향을 피우고 불상들을 옮겨 다니며 절을 했다. 향 냄새가 좋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향냄새를 좋아했다. 이곳엔 개가 4마리 있었는데 오랜만에 집에 있는 호두가 생각났다. 아마 그 녀석은 나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만 내려가 카페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란저우의 마지막 날까지 글과 사진을 정리하고 밤늦게 방에 들어왔다. 이들은 담배를 피우며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 앉으려는데 콜라가 하나 놓여있었다. 나는 이게 누구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네 꺼야 먹어”라고 했다. 소소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들은 내가 나갔다 들어오면 항상 “오늘은 뭐했어?”라고 물어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카페에 다녀왔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란저우에서 지내는 동안 줄곧 노트북만 두드리는 내 모습에, 이들은 드디어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너 게임 뭐해?”따위의 질문과는 질적으로 다른, 드디어 나에 대한 관심이 공감을 이끌어 내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너 계속 뭐 하는 거야?” 나는 이 질문이 전혀 귀찮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이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신나서 대답했다. 나는 여행하면서 글을 쓰고 있노라고 말했다. 근데 그것이 조금 밀려있어서 란저우에서는 마무리하느라 그동안 내가 노트북만 잡고 지냈던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나는 한 친구의 휴대폰을 빼앗아 홈페이지에 접속해주었다. 한국말이 어지럽게 쓰여있어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빼앗았다. 나는 차라리 갤러리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보여 주는 것이 낫겠다 싶어 갤러리로 접속해주었다. 그리고 지나온 여정을 보여주며 설명하는데 다른 친구가 자기도 알려달라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명함을 꺼냈다. 이건 명함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나는 명함을 한국사람에게 나눠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국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첫 장은 만의에게, 그리고 다음 두 장은 이 중국인 친구에게 주었다. 이 친구들은 나에게 매우 관심이 많았다. 글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사진을 보며 내 여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려고 만든 명함이었다. 의미는 충분했다. 


 다음날 저녁 나는, 기차를 타고 ‘둔황’으로 떠났다. 둔황은 란저우에서 서쪽으로 15시간을 가야 하는 도시이다. 혼자 기차 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오랜 시간 기차 타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루하지 않다. 그 안에 몸을 맡기고 누워있으면 아늑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기차는 밤이 되면 소등을 하고 모두 잠자리에 드는데, 그때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중적인 이 시간은, 때로는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처절하게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기차 티켓을 끊을 때 몇 가지 고려하는 것이 있다. 중국은 기차 종류가 많아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이 각기 다른데 나는 책 읽을 시간, 한국과 연락할 시간, 잘 시간, 밥 먹고 창 밖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로 가장 오래 걸리는 것을 고른다. 그리고 이런 기차는 가장 싸다는 장점도 있다. 나는 이런 아늑한 공간을 15시간이나 빌려주고 창 밖의 낭만까지 제공해주면서 어째서 가격이 더 싼 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녁 7시에 출발한 기차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도착했는데, 나는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밤 기차를 타면 유난히도 책이 잘 읽힌다. 이때 한국과 하는 연락은 꿀맛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새벽 3시가 다 되어 잠에 들었는데, 일어나니 아침 9시였다. 미리 가지고 탄 컵라면을 끓여먹고 대충 씻으니 금방 10시가 되어 쫓겨났다. 문득 더 오래 걸리는 기차는 없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12월, 사막지대에 있는 둔황의 아침은 매우 춥고 거리는 황량했다. 나는 추우면 무섭다. 자칫 잘못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이 날씨에 밖에서 숙소를 찾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일 것이다. 성수기 이곳은 매우 붐비는 도시라는데, 11시가 다 된 시간에 이따금 출근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었다. 아직 상점도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성수기가 아닌데도 무슨 일인지 호스텔 예약이 꽉 차서 어쩔 수 없이 호텔의 가장 싼 방을 예약했다. 말이 호텔이지, 창문 없는 지하실 방에 공용화장실이었다. 시내랄 것도 없이 워낙 작은 도시라 어렵지 않게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외관은 좋았고 로비는 정말 호텔 같았다. 나는 얼른 들어가서 씻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권을 주자 여직원이 한참을 봤다. 나는 또 무언가 문제가 있나 덜컥 겁이 생겨, 이 추위에 어디 가서 방을 구해야 하나 상상을 펼쳤다. 나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해서 걱정하곤 한다. 그러나 그 걱정은 매번 의외로 간단하게 끝났다. 여직원은 번역기로 중국 입국도장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외국인 여권을 잘 볼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중국 입국 도장이 있는 곳을 펼쳐주었고 밖이 매우 춥다고 농담을 던져댔다. 여직원은 그런 농담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웃어 댔는데, 어쩌면 알아듣는 척 웃는 시늉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나는 중국에서 운이 따르는 것이 분명했다. 여직원이 번역기에 뭐라 말하고 내게 보여주었는데, 거기엔 “너의 객실은 창문 있는 방으로 무료 업그레이드”라고 쓰여있었다. 창문 없는 방에서 창문 있는 방으로 바뀐 것이 내게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고맙다고 했다. 키를 받고 방에 들어왔다. 방에는 창문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있었다. 혼자 지내기 완벽한 방이었다. 화장실에서 하수구 냄새가 지독하게 나긴 했지만 문을 닫아놓으면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나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한쪽 벽면의 절반은 창문이라 사막의 아침 햇살이 반대편 벽까지 비추었다. 가방에 있는 짐을 사방에 풀어헤치고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내렸다. 다시 방으로 나와 그동안 무겁게 갖고 다닌 스피커를 꺼냈다. 감미로운 노래를 나직하게 틀어놓고 넓은 침대에 누웠다. 이때 나는 또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게 쉬었다. 나는 시내를 둘러볼 요량으로 나왔다. 사막의 햇살이 워낙 강하게 내리쬐어 낮에는 뜨거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길을 익혔다. 그러다가 나는 어떤 강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강이라고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여기에 물이 있던 것 같은데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수영하지 말라는 표지판만 황량하게 남아있었다. 조금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이곳이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듯 어린아이들은 그 위를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둔황의 유명한 ‘사주시장’에 도착했는데 아직 거의 문을 열지 않았다. 이곳은 야시장이었다. 밤에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시 방에 들어왔다.  


밤 9시, 나는 다시 시장에 가기 위해 나섰다. 많은 기대를 하고 간 것이었다. 나는 한국인과 한국말이 그리웠다. 이곳은 꽤 유명한 도시라 그래도 한 사람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외국인이라도 있길 바랬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인 이방인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야시장은 여전히, 아니 낮보다 더 으슥했다. 이방인은커녕 중국인 조차 드물었다. 그래도 식장은 열려있길래 나는 그 근처로 가면 사람이 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거리를 지나는 외국인을 보고 “올 것이 왔구나!”라는 듯 가게에서 전부 뛰쳐나와 나를 불러 잡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도 않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한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인터넷으로 보던 성수기의 밝고 활기찬 시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수기의 둔황은 눈을 감아버린 도시 같다. 나는 맥주와 먹을 것을 사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처절하게 외로워지는 그런 날이 될 것 같았다. 맥주도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한 캔을 마셨더니 머리가 아파왔다. 이 도시를 통틀어 외국인이라곤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세계의 배낭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고, 비수기에 황량하기만 한 이런 도시에 와서 혼자 이러고 있는 것일까. 조금 따듯한 남쪽 도시를 가면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이곳은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한 두 명쯤은 나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겨울에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여행자는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6인실 방이 그리워졌다. 말은 통하지 않고 대화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옆에서 담배를 피워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줄곧 휴대폰만 보아댔다. 아마 이때 누군가 내게 연락했더라면 대답은 몇 초 안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누굴 찾아서 안부 따위를 묻고 싶진 않았다. 그러기엔 그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나는 다음날 ‘막고굴’을 가야 했기 때문에 불을 끄고, 차라리 잠에 들어버렸다. 


사막에 둘러싸인 둔황은 실크로드의 거점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도시이다. 중국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실크로드 사막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쉴 수 있는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둔황의 가장 유명한 명승지는 명사산과 월아천이다. 명사산은 사막, 월아천은 3000년 넘게 마르지 않았다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이다. 나는 사막과 오아시스는 만의와 지겹게 보았으므로 이곳은 가지 않기로 했다. 입장료가 아깝기도 했지만, 다시 모래를 온몸으로 뒤집어쓸 생각을 하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명승지인 ‘막고굴’에 가기로 했다. 막고굴은 불교 유적 석굴군이다. 교통이 열악했던 고대에 사막을 건너는 상인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고, 그들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막의 산허리에 구멍을 뚫어 인공 굴을 만들고 그곳에 사원을 만들었다. 막고굴은 366년부터 시작하여 1,000년 동안 지속해서 만들어져 왔으며, 크고 작은 굴의 개수가 1,0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와 예술적인 교류를 해온 막고굴은 불교 미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중국의 관리하에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가이드 없이는 관람을 할 수가 없다. 나는 한국어 가이드가 있다는 말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계획은 이 날 막고굴을 찾은 한국인들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8시 30분에 알림을 맞추어 놓았지만, 뒤척이다가 한 시간이나 지나 일어났다. 전 날 알아본 바로는, 막고굴이 워낙 인기가 많은 명승지라 빨리 가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준비하고 버스 타는 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나는 막고굴에 가고 싶어요”라는 중국어를 미리 알아두고 갔다. 입으로 줄곧 같은 말을 웅얼거리다가 버스기사를 보자마자 이 말을 뱉어내자 버스에 타라고 했다. 나는 보란 듯이 버스에 올라탔다. 혹시나 하고 버스를 둘러보았지만 중국인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버스는 막고굴 입구에 도착했고 나는 티켓을 사러 갔다. 나는 티켓 창구에 줄을 선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오늘은 문을 열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나 단지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티켓 값도 미리 알고 간 가격의 반값도 되지 않았다. 비수기라 그런 것 같았다. 막고굴 입장은 제한되어있어서 정해진 시간에 사람을 모아 한꺼번에 들어간다. 그리고 먼저 중국의 실크로드와 막고굴에 관한 영상을 관람한다. 중국어로 만들어진 이 영상을 관람하기 위해 한국인과 외국인에게는 언어에 맞는 통역 기기를 준다. 나는 한국어 통역 기기를 받아 영화를 관람했다. 나는 나 말고도 통역 기기를 받는 사람이 있나 유심히 지켜봤지만, 이내 영화가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잠깐 한국에서 지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나는 무교다. 신앙하는 종교가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 내게 종교가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나’라고 대답했다. 아무튼 다른 종교에 관해선 깊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반쯤 미친놈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는 중국에 와서 무언가 이끌림 같은 것에 의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종교가 불교였다. 불교에서 전하려는 말들이 묘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저 호감 정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머리를 밀고 스님이 되어 산속에 들어가 살 생각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 계획을 세웠다. 중국의 동쪽에는 관심이 전혀 가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중국의 서쪽 도시들에 이끌렸다. 그리고 나는 네팔로 넘어가 인도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한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여행루트를 듣고 이런 말을 했다. “이러다 깨달았다고 머리 밀고 돌아오는 거 아니야?”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계획을 세울 때, 가기 싫은 곳은 뺐고, 가고 싶은 곳만 모아 세운 루트가 정확하게 불교가 동아시아로 유입된 경로였다. 내가 실제로 여행하고 있는 도시 대부분 불교와 관련 있는 도시였으며 동아시아 불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유적지에 와있었다. 그리고 추후 내가 가게 될 도시인 티베트, 이곳은 불교가 일상이다. 아무래도 무척 조심스럽다. 종교라는 것이 말이다.  


 아무튼 나는 실크로드와 막고굴에 대한 영상에 빠져들었다. 영상은 매우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50분짜리 한 편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줄을 서고 기다렸다. 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앞으로 100명 정도는 있었다. 한 여직원이 내게 다가와 표를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주자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더니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다른 여직원이 나왔다. 그리고 이 여직원 나에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하마터면 “감사합니다”라고 할 뻔했다. 이 황량한 실크로드의 사막 한가운데서 한국말을 듣다니 말이다. 가이드는 나를 줄에서 빼내고 긴 줄을 지나쳐 먼저 들어갔다. VIP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다른 한국인은 더 없는지 물었다. 가이드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당신밖에 없어요” 그것이 아쉬웠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나는 매우 싼 가격으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에게 1:1로 가이드를 받는 특별한 혜택을 누렸다.  

 가이드는 23살이었는데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최근 한국어 시험을 치렀다고 했다. 아직 한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나 곧 가고 싶다고 했다. 가이드는 나에게 한국에서 어디에 사는지 물었는데 나는 아마 모를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말해보라고 해서 내가 부천이라고 하자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가끔 한국사람들도 부천이 어딘지 모르던데, 중국인이 아는 것이 기특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데, 이따금 한국사람 중 내가 부천에 산다고 하면 어딘지 모른다며 무척 으쓱대는 사람이 있다. 마치 “나는 그런 시골 동네는 잘 몰라”라는 듯 말이다. 나는 이들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좁은 한국땅에서 몇 개 되지도 않는 도시 이름을 모르는 것이 으쓱댈만한 일인가 싶다. 한국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멋을 부린다. 가이드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몇 개의 굴을 골라 설명해주었다. 나는 가이드가 중국인 단체와 맞물려 다니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소음과 방해 없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말이 아직은 어색한 가이드가 이것을 설명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보였다. 굴 하나하나는 모두 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각각의 안에는 불상이 있었다.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불상의 모습은 제각기 달랐고, 벽화와 천장의 구조도 모두 달랐다. 굴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것은 1,300년 된 굴이고, 여기는 1,000년 된 굴이니 했다. 벽화는 퇴색되었고 몇몇 불상은 부서졌지만, 그러한 것들이 있기에 지나온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불상 앞에 서면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묘했다. 2시간 정도 지나자, 가이드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사했다고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한국말을 쓰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나는 곧장 방에 들어와 맥주를 두 캔 마시고 쉬다가 잠에 들었다. 이날 밤도 외롭긴 마찬가지였다.  



처음 계획은 간쑤성 둔황을 지나 실크로드를 따라 우루무치로 가서, 중국의 서쪽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것이었다. 만약 계획처럼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한 바퀴 돌게 된다면 기간은 약 한 달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겨 나는 계획을 크게 꺾어야만 했다. 첫째, 매우 위험한 지역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여행하겠다고 중국인들에게 이야기하면 전부 말린다. 무자비한 테러 때문이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위구르족)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중국인들에게(한족) 무차별 테러를 자행한다. 이슬람을 신앙하는 위구르족은 동양인이라기보단 터키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위구르 지역에서는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전통시장 그리고 경찰서 주변에 수십 차례의 폭탄테러가 발생했고, 뿐만 아니라 쿤밍이나 광저우 같은 대도시에서도 위구르인들이 칼을 휘둘러 수십 명을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한 중국인 친구의 말로는, 중국 뉴스에 나오는 신장지역 테러는 일부일 뿐이며 평화로운 중국의 모습을 보이고자 대부분은 슬며시 넘겨버린다고 했다. 만의 친구 중 한 명은 위구르 지역 공안인데, 밤이나 낮이나 총소리는 일상다반사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위구르 지역을 여행하고 온 한국사람들이 많다. 그중엔 심지어 여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도 했는데 내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나는 끝까지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만약 그곳에서 테러가 발생한다면, 상황 파악이나 문제 해결에 언어의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돼 아쉽게도 나는 신장 위구르 지역 여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둘째, 가지 못할 것 같던 티베트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시짱자치구 티베트는 중국의 남서부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음 목적지인 네팔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중국의 마지막 여행지이다. 그러나 나는 티베트 지역으로 가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외국인 티베트 지역 여행 허가서’때문이었다. 티베트 지역은 중국 내에서 종교와 정치적 문제로 매우 예민한 도시이다. 지금까지 분신자살 같은 크고 작은 독립시위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티베트 지역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에게 여행허가서를 요구하는데, 이것을 발급받기가 꽤나 까다롭다. 혼자서는 발급받을 수 없고 여행사를 통해 받아야 하는데, 중국어를 못하는 내게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며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들이 한방에 해결됐다. 만의의 도움으로 말이다. 만의 친구 중에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티베트 여행사와 직접 연결해서 최대한 싼 가격으로 외국인 여행허가서 발급을 진행해 주고 있다. 이에 따라 보증인이 필요하다. 외국인인 내가 티베트에 가서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는 것을 보증할 보증인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내가 말썽을 부리다 공안에 잡히기라도 하면, 여행사는 폐업까지도 가능하고 보증인은 어떻게 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를 보증해주겠다고 나선 중국인이 있었다. 그분은 바로 만의 어머니이다. 그동안 만의가 어머니께 나에 대해 설명을 했었고, 내가 티베트 지역을 여행하고 싶다는 것을 아시고 나의 보증인으로 서주시겠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만의 어머니를 뵌 적이 없다. 만약에 나라면, 나의 자식이 외국인과 친구가 되어 여행 불가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내게 보증을 서달라고 한다면, 나는 이 정신 나간 자식을 밤새 설교했을 것이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의는 고맙다는 말 좀 그만 하라고 하는데, 그럼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계획대로라면 나는 12월 23일, 중국 충칭(만의 고향)에서 만의와 함께 티베트로 떠날 것이다. 여행 후 만의는 다시 충칭으로, 나는 네팔로 떠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실크로드 여행은 여기 둔황에서 마무리하고, 12월 5일 중국 남쪽에 위치한 쓰촨성 청두로 떠난다. 기차로 25시간이 걸리는 청두는 비교적 날씨가 따듯하고 대도시라 외국인이 매우 많은 도시이다. 나는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서 부지런히 친구들을 사귀고 여행하며 만의를 기다릴 것이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만의와 만의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BABA PROJECT – 계획에 없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