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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ABA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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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Mar 18. 2018

BABA PROJECT – 계획에 없던 시간

  아침 일찍 우리는 시안공항에 왔다. 중국 북쪽에 위치한 닝샤회족자치구에 있는 도시, 스쭈이산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곳에서 만의의 회족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자비한 중국 대륙 지도를 보았을 때 시안에서 스쭈이산까지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가까워 보이지만, 실은 비행기로 1시간 30분 그리고 기차로 4시간을 가야 만날 수 있다. 중국에 거주하는 회족은 아랍과 중앙아시아계 혼혈 민족으로, 종교 신앙은 이슬람이다. 이들의 주식은 양고기로, 만의는 진짜 회족 사람들과 전통 양고기 요리를 먹게 해주겠노라고 자신만만했다. 나는 그것을 기대했다.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처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은 좀처럼 겪기 어려운 소수민족 문화체험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멀리서만 지켜보던 그들의 사이에 섞일 수 있게 된 셈이다. 우리는 먼저 중웨이로 가기 위해 중국의 저비용항공을 이용했는데 오랜만에 비행기 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들떴다. 내게 비행기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설레는 것이었다.  

 티켓을 발권받고 가려는데 직원이 우리를 다급히 불렀다. 나는 중국에서 이럴 때면 바짝 긴장부터 한다. 또 무엇이 문제인 것 인가, 이들은 하루라도 나를 잡지 않는 날이 없었다.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만의가 배낭 안에 보조배터리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나는 항공사에서 일했던 사람인데, 당연히 그런 것은 전부 빼 두었다고 했다. 그는 배낭 안에서 무언가 감지되었으니 저쪽으로 가서 확인하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젊은 남자가 배낭을 열라고 손짓한다. 만의가 옆에 있어서인지 두렵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배낭에서 감지되었던 것은 건전지였다. 보조배터리는 발화의 위험 때문에 위탁수하물로 실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좀 의아했다. 이내 남자는, 건전지는 괜찮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이 정도는 뭐, 기분 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만 아니라면야, 그저 가방을 다시 닫으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탑승구로 가서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질리도록 비행기를 탔건만 매번 왜 이렇게도 설레는지, 저 길쭉한 박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이른다. 나는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에 오르면 필요 이상의 호기심이 생겨 무리하게 관찰을 해대곤 한다. 올라서는 순간부터 승무원의 유니폼, 좌석의 색과 디자인, 좌석 앞 포켓에 꽂혀있는 안내서들, 승객 안전 데모, 기내 방송, 갤리(Galley)의 구조, 카트의 모양 그리고 서비스 절차 등 오만 가지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비교한다. 내게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잘 아는 것에 대해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니 졸음이 쏟아져 잠시 잠에 들었다. 잠시 후 졸음에서 벗어나 창 밖을 보았는데 어느새 창 밖엔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가기로 한 사막이었다. 나는 고개를 빼고 한참 창 밖을 응시했다. 하루빨리 태양 아래 금빛으로 일렁이는 사막의 한가운데서 옛 상인들이 목숨 걸고 다니던 고대 실크로드를 느끼고 싶었다.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저 황량한 대지의 품에 안겨, 가까이서 역사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마침내 비행기는 중웨이 공항에 이르렀다. 이착륙 활주로를 같이 쓰는지 비행기는 도착하자마자 유턴(U-Turn)을 해서 돌아갔다. 아담한 공항에 비행기라고는 우리가 타고 온 한 대가 전부였다. 보안 절차 같은 것도 없어서 짐을 찾기도 전에 공항 밖을 마음껏 나갔다 들어올 수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4시간을 더 가야 했다. 그렇게 도시와 점점 멀어졌으며, 나는 더 외진 곳으로 더욱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친구들이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만의는 나보다 더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의는 친구들이 자기에게 술을 매우 권할 것이라고, 저번에 왔을 때에도 오후 두 시부터 술을 먹기 시작해서 해가 지기도 전에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저 취하면 형이 챙겨야 해요”라고 겁을 주기도 했다. 잠시 후 만의 친구들로부터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그들은 이미 식당에서 대접 준비를 마치고는 고량주 몇 병을 찍어 보내면서 웃어댔다. 기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나도 덩달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만의에게 물었다. 


“나한테는 많이 권하지 않겠지?” 

“형한테는 그 정도로 권하진 않을 거예요. 회족 친구들이 술을 워낙 잘 마셔서 저는 여기 올 때 그냥 다 포기해요. 어차피 취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동, 서양 가릴 것 없이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잘 마시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는 이미 만의 친구와 예행연습을 해본 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권하는 술을 거절하여 이들에게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회족 친구들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아무래도 나도 피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밤 8시가 다 되어 스쭈이산에 도착했다. 드문 행인에 비해 도로와 인도가 필요 이상으로 넓었는데, 듣자 하니 면적에 비해 인구밀도가 상당히 낮은 도시였다.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가로등은 전부 꺼져있었으며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리를 삼켰다. 몽골과 국경이 맞닿은 지역이라 바람이 차기도 했지만, 황량하고 텅 빈 도로가 분위기마저 소슬하게 만들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날카로운 바람을 헤쳐 약속된 식당으로 찾아갔다. 친구들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리가 도착 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와 반겨주었다.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기에, 반갑게 인사하고 친구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이미 사진에서 봤듯, 자리는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으며 우리는 그저 앉기만 하면 됐다. 미리 주문도 해놓아서 앉자마자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가져왔다.  

 만의 친구로 소개받은 사람들은 남자 한 명과 여자 세 명이었다. 눈매가 선하고 허우대가 좋은 남자, 키가 작고 통통한 여자와 까만 머리에 조용한 여자 그리고 마치 한국인처럼 생긴 누님이 함께 앉았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이 남자를 형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왜 그런가 하면 만의가 친구라고 데리고 온 형님의 나이는 35살인 데다가, 4살 난 여자아이도 있었다. 나는 이것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어떻게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아무래도 나는 최대한의 예의를 차리려 노력했다. 


 이따금 나는 이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웃어 보이며 알아듣고 있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만의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그것을 나에게 통역해주고 또다시 내 이야기를 통역해주며 우리는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누님이 내 쪽으로 음식이 담긴 접시를 슬그머니 밀며 입맛에는 맞는지 물었는데, 나는 “맛있다”는 말조차 몰라 그저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만의에게 통역해달라고 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살면서 먹어본 양고기 중에 제일 맛있었다. 양족발을 손으로 들고 뜯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침내 형님이 고량주를 꺼내 잔을 채웠다. 나는 이들이 키득대며 나를 지켜보는 것을 느꼈다. 고량주를 마시고 나서 내 반응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한국에서 매일같이 사용하던 기술로 고개를 뒤로 힘껏 젖히며 잔에 들은 고량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입 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굉장한 호감으로 작용한 듯했다. 

 술자리는 무르익어갔고 나는 조용히 양갈비를 뜯고 있었다. 그때,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잔을 치고 마시려는 것이 보였고, 나는 “아차!” 예의가 아니다 싶어 급하게 잔을 들고 둘의 사이에 합류했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예의이지 않은가. 함께 앉은 모든 사람이 같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어른이 혼자 마시려는 것을 발견하면, 죄라도 지은 마냥 얼른 잔을 들고 끼어들어 양 손으로 공손히 소주잔의 아랫부분에 살짝 갖다 대고 고개를 꺾어 한방에 털어 넣어 예의를 지킨다. 나의 그런 행동을 보던 만의가 중국의 술 문화를 하나 더 알려주었다. 중국에선 첫 잔 정도는 다 같이 건배를 하지만, 다음부턴 내가 같이 마시고 싶은 사람과 둘이서 건배하고 마신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상황이 이해됐고 또 엉뚱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의 문화로 행동한 나를 신기해했고, 나는 이들의 문화를 배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들의 술자리에서 엉뚱한 짓을 해댔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법으로 예를 차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일어나서 모두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고 한국의 문화대로 다 같이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비운 잔을 바로 다시 가득 채워주고 한국의 술자리 문화를 알려주었다. 어느덧 이것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하나의 놀이가 되어있었다.  

 고량주가 두 병째 비워지고 술이 기분 좋게 오를 때쯤, 형님이 내게 반가움의 표시로 여기 있는 모든 사람과 한 잔씩 마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이미 꽤나 많이 마신 상태였지만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좋아!”라고 대답한 뒤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인사하며 연거푸 다섯 잔을 마셨다. 그러니까 상황을 보면, 이 친구들은 내가 술 마시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만의가 아닌 내게 엄청나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았고 오히려 행복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중국과 몽골의 국경에 있는 회족자치구의 한 작은 도시에서, 중국의 한 소수민족인 회족 사람들과 그토록 원하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친구들의 마음에 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형님이 나갔다 오더니 위스키를 한 병 더 들고 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만의에게 말했다. “만의야, 형님이 위스키를 더 가지고 오셨다”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정신 줄 부여잡기를 포기한 것이. 우리는 여섯 이서 고량주 2병과 위스키 2병을 비웠고 그중 대부분은 내가 마셨다. 눈을 뜨니 호텔방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의는 이미 일어나서 씻고 정신을 차려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형 어제 걷지도 못할 만큼 완전히 취해서 제가 업고 호텔까지 왔는데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친구(형님)도 취했는데 형이랑 둘이 어깨동무하고 소리 지르고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때 호텔 로비 직원들이 다 나와서 형이랑 친구 부축해서 방에 옮기는 거 도와주지 않았으면 저 혼자 감당 못했어요.” 


 나는 친해지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만의가 전날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스쭈이산, 황량하고 소슬하던 이 도시의 아침 햇살이 유난히 밝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형님을 다시 만났다. 우리는 지역 특산 음식인 양내장탕을 먹고 바로 헤어져야 했다. 형님이 취해서 집에 가지 못하고 호텔에서 잔 것 때문에, 부인에게 혼난 모양이었다. 인종이나 문화를 떠나서 어느 나라나 다를 것 없는 불문율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형님과 한 번 진하게 끌어안고 헤어졌다. 또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의 꽌시는 평생 깨지지 않을 것이다. 



 만의와 나는 사막에 가기 위해 다시 중웨이로 돌아왔다. 중국 기차역에서 나오면 택시기사들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데, 이곳은 그 기세가 특히 드셌다. 서로 소리 지르며 밀치고 심지어 우리 가방을 빼앗아가기도 했는데, 나는 만의 뒤에 꼭 따라붙어 바닥만 보고 걸었다. 번잡한 그곳을 살짝 벗어나자 한 택시기사가 우리를 따라왔고 우리는 결국 그의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기로 했다. 만의는 택시기사에게 사막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의 말로는 지금 사막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비수기 정도가 아니라 곧 겨울 동안 폐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 좌절한 채로 호텔로 들어왔다. 나는 짐을 풀며 “우리 그럼 어쩌지?”라고 물었는데, 만의가 아까 그 택시기사와 연락하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응? 택시기사?” 알고 보니 계산할 때 알아낸 연락처로 만의가 연락했고, 우리가 사막투어를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 지역 사람이라 꽌시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꽌시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택시기사는 다음 날 호텔 앞에서 만나 우리를 사막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로비로 나가니 택시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 본 얼굴이라고 반가웠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텅거리 사막’으로 출발했다. 이 사막은 북쪽으로 뻗어나가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의 고비사막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4대 사막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골칫덩이인 황사바람의 근원지라고 하는데 나는 왠지 모르게 이것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여기부터 한국까지 날아온 것이었구나, 반가워”같은 느낌이랄까. 얼마나 왔을까, 오래 온 것 같지 않은데 택시기사가 ‘내몽고(Inner Mongolia)’에 들어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방에 앉아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세계지도를 확대해가며 이런 곳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눈 앞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과연 내가 가볼 수나 있을까 라고 생각했던 곳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지도를 켜고 내 위치를 확인했다. 꿈꾸던 그 위치에 내가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텅거리 사막에 이르렀다. 택시기사는 한두 번 온 것이 아닌지, 직원들과 친해 보였다. 그는 우리 티켓을 미리 할인된 가격으로 예약해두었고, 직원에게 건강하고 좋은 낙타로 준비하라고 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 기에,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괜찮은 친구였다. 

 택시기사는 사막투어가 끝날 때쯤 다시 오기로 했고 우리는 드디어 사막에 들어갔다. 모래사장을 지나 서서히 바닷물이 자박자박 밟히기 시작하듯이, 돌길을 지나자 발 밑으로 모래가 사그락사그락 밟히기 시작했다. 누가 모래를 부어놓은 듯 눈앞에 갑자기 모래 산이 보였는데, 그 위로 낙타 세 마리와 마부가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우리는 낙타를 타고 사막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실 두 시간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가지고 깊숙이 들어간다고 할 순 없지만, 아무튼 그 정도만 들어가도 세상과 완전히 단절될 것이었다. 나는 호주 사막에서도 낙타를 타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저 트랙만 몇 바퀴 돌고 말았으며 낙타도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택시기사의 꽌시 덕분인지, 낙타는 몹시 크고 한눈에 봐도 건강해 보였다. 낙타를 가까이서 보고 별안간에 너무 신이 났다. 낙타를 타고 진짜 사막을 걷다니, 꿈만 같았다. 마부는 우리를 태우고 낙타를 일으켜 세웠는데, 비행기보다 더 높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사막을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마리의 낙타는 코에 줄이 연결되어 있어 일렬로 서있었는데, 앞에서부터 마부, 나, 만의 순으로 앉았다. 나이가 적잖이 들은 마부는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곳곳이 찢어져 솜이 다 튀어나와 있었으며 바지와 신발도 낡을 대로 낡아있었다. 하기야 이런 사막에 사는 마부의 옷이 깨끗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긴 했다. 만의는 마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국인의 엄청난 특혜라면, 하나의 언어로 이 넓은 대륙 어디에서도 각기 다른 음식, 문화, 자연, 역사 등을 온전히 느끼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 20년 이상 살면서 사막 곳곳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사막에 있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다. 내 눈엔 사방이 다 똑같아 보이는데, 그는 길을 잘도 찾아다녔다. 가끔 어딘가를 가리키며 “이 방향으로 끝까지 가려면 30일 걸려요”라고 무심하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우리를 이곳에 버리고 도망쳐버린다면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고 순간 두려웠다. 그에게는 딸이 있는데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단다. 딸이 이제 그만 사막에서 나와 도시에서 같이 살자고 설득하지만 그는 이곳이 좋아서 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앞만 보고 간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이제 뒤를 돌아보아도 우리가 출발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지도를 보면 우리는 여전히 사막의 끝자락에 머물러있었지만, 나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부는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사막바람은 모래를 동반하여 매섭게도 불어댔다. 마부는 이따금 낙타를 앉혀 우리에게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 찍고 놀 시간을 주었다. 마부는 낙타 옆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멀리까지 갈 수 없었다. 조금만 멀리 가려하면 모래 물결에 가려져 마부가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마부가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여기서 꼼짝없이 죽을 것이란 생각에 온전히 둘러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도 내가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나 생각했다.  

 다시 낙타에 올라타 한참을 이동하여 마부가 멈춘 곳 바닥에는 무언가 지저분하게 버려져 있었다. 쓰레기는 아니었는데, 나는 이게 무엇인지 한참을 보았다. 마부는 주변을 서성이더니 이것들을 몇 개 주워와 우리를 불러 모아 설명했다. 그것은 석기시대에 쓰이던 생활품이었다. 마부는 그것들의 용도를 하나씩 알려주었는데 칼, 접시, 잎을 으깨는 도구 등 신기한 것이 많았다. 옛날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기념품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요즘엔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속상해했다. 그런 것이 아쉽기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사막바람이 점점 매서워졌다. 만의와 나는, 추워 봐야 얼마나 춥겠어하고 얇은 옷가지 하나만 걸치고 왔는데 이것은 최악의 실수였다. 우리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뒤로 돌았는데, 이 길로 2시간을 온 터였다. 그러니까 2시간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막바람은 옆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귀를 후려쳤고, 사막 모래는 바람을 타고 날아와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는 모조리 침투했다. 옷, 신발, 주머니에서 끊임없이 모래가 쌓였고, 이러다가 사막의 일부가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힘든 것은 추위였다. 기절할 것 같이 추웠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사막에서 우리는 점점 말을 잃어갔고 이윽고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런 말도 없이 앞만 보고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래가 겹겹이 쌓여 만든 사막은 마치 거칠게 몰려오는 파도를 연상케 했다. 바다의 끝을 바라볼 수 없듯 사막의 끝도 바라볼 수 없었다. ‘희망’이란 그 끝이 보일 때 비로소 힘을 충분히 발휘하는데, 아무리 가도 사막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시간에 의존해야 했다. 2시간을 왔으니, 2시간을 돌아가면 됐다. 그렇게 나는 1시간, 40분, 20분 시간을 줄여가며 추위를 견뎌냈다.  

 잠시 후 우리는 살아 돌아왔다. 시간으로 희망을 잡지 못했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사막 몇 시간 다녀온 것인데, 얼굴은 새까매져 있었고 몸이 덜덜 떨렸다. 온몸에서 모래가 흘러나왔고, 손은 마치 썩은 고기 같았다. 택시기사가 우릴 보고 웃어 댔다. 그래도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니 매우 반가웠다. 나는 그의 차에 올라 타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담배 섞인 공기가 매우 따듯했다. 그리고 곧 졸음이 쏟아져 깊은 잠에 빠졌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씻고 다시 잠에 들었다. 자는 동안 땀이 많이 났다. 밤 10시쯤 일어났는데, 으슬으슬 춥고 감기 기운이 있는 듯했지만 감기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밤늦은 시간에 일어난 까닭은, 11시 기차를 타고 ‘란저우’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기차 침대 칸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새벽 5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나는 사막에 다녀온 후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사막 여행은 분명 재미있고 좋았지만 무엇인지 모를, 어떤 외로움 같은 것이 나를 감싸 둘렀다. 감기 기운이 조금 남아있었고 마음과 몸이 많이 지쳐있는 탓이라 생각했다. 금요일 밤, 친구들은 술을 마시고 있던 클럽에 놀러 갔던, 그럴 리 없겠지만 자고 있던지 할 시간이었다. 어두컴컴한 기차 침대에 누워 들리는 소리는 “덜컹덜컹”, 그리고 침대 위에 남자가 코 고는 소리. 그 폐쇄된 공간 안에서 나는 극심한 향수병과 외로움을 느꼈다. 만의도 그것을 느꼈는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항상 그렇다. 이게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있으면 그 냄새를 주변 모든 사람에게 풀풀 풍긴다. 그러다가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다섯 시, 란저우 역을 나오자 여전히 어두웠다. 행인은 드물었고 이따금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거리를 쓸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호텔로 가서 모래로 인해 더러워진 빨랫감을 세탁하고 잤다. 그리고 오후 1시쯤, 만의는 볼 일이 있었고,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나왔다. 외로운 기분이 남아있진 않았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만의는 역시 그 냄새를 맡고 내 눈치를 상당히 보고 있었다. 나는 만의의 말에도 “응, 아니”정도의 간단한 대답만 했을 뿐,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귀에 이어폰을 꼽고 세상을 단절시켰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지난날을 되새기며 글에 푹 빠져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언제 바뀌었는지, 그런 것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시간에 홀려버렸다. 나는 행복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침잠했다. 밖을 보니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만의는 헤어지기 전 “1시간이면 끝나요”라고 하고 갔는데, 4시간도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만의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만의야 언제와?” 바로 답장이 왔다. “지금 택시 타요! 금방 가요” 나는 “천천히 와, 괜찮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언뜻 보면 만의를 위하는 것 같은 저 대답은, 사실은 나를 위한 말이다. 나는 지금 바로 온다는 말이 달갑지 않았다. 만의는 나와 함께 장장 5일을 꼬박 같이 붙어 지냈다. 내가 혼자 보낸 시간은 단 1분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왜 그토록 기분이 좋지 않았고, 만의에게 까칠하게 굴었는지를 알게 됐다. 잠시 후 만의가 왔다. 나는 만의에게 “어 왔어? 잠시만 나 이것 좀 마무리할게”라고 말을 끊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나자 문득 이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의는 “형 저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것 계속하셔도 돼요”라고 했지만, 그제야 나는 기분이 한껏 풀려서 그만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의에게 말했다. “오늘 마지막 날이니까 먹을 것 가지고 방에 가서 맥주나 실컷 마시자!” 만의는 좋다고 했다. 여행 와서 줄곧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매우 이기적인 인간이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그동안 하지 못한 마음속 깊은 대화를 했다. 가족, 여자 친구, 한국생활, 중국 생활, 하는 일, 꿈, 현실, 여행 등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말했다. “어느 순간 형이 갑자기 무서워져서 눈치 보였어요. 형 혼자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제 볼일은 한 시간 만에 끝났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형 연락받고 바로 온 거예요. 근데 형 지금은 다시 형 같아서 좋아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미안했다. 그리고 나도 대답했다. “만의야 일단 미안해. 나도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몰랐는데, 글 쓰다 보니까 알겠더라. 너랑 워낙 느낀 것, 즐긴 것이 많아서 내 머릿속엔 계속 쌓여만 가는데, 이것을 글로 옮길 시간이 없으니까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그때 그 감정 느낀 것들 다 잊어버릴 까 봐. 아무튼 일주일간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혼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했어!” 


 나는 중국에 오고, 중국인들에게 치를 떨었다. 질서는 없고, 여기저기서 담배를 피워대고, 시끄럽고, 입 냄새가 지독히도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힘들고 괴로웠다. 그러나 만의와 함께 한 5일간 나는,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부단히 느끼고 다녔다. 만의는 중국인들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나를 한번 더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내 이기심에 만의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우리는 지금 더욱 친해졌다. 이렇게 친해지게 된 것도 내 이기심을 이해하고 배려해준 만의 덕분이라는 생각이지만 말이다. 전날 밤 우리는 맥주를 상당히 많이 마셨다. 방 한쪽 구석에는 맥주 캔이 줄지어 전날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만의는 아침을 먹고 한국으로 떠났다. 우리는 진하게 포옹하고 헤어졌다. 마지막까지 “형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요”라는 말을 잊지 않고 남겼다. 나는 마침내 란저우에 다시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문득 외롭게 느껴졌지만 이내 다시 적응되었다. 나는 짐을 싸고 다음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도를 켰다. 란저우에 며칠간 머물며 지낼 생각이었는데 호텔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게스트하우스 6인실을 찾아갔다. 방 안에는 두 명의 중국인이 있었고 담배를 피워대어 온통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바닥에는 담뱃재와 해바라기 씨 껍데기가 널브러져 있었고, 화장실을 가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뜨거운 물은 나올 때가 있고 나오지 않을 때도 있어서 시간을 잘 맞춰 가야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 이곳이 내가 4일간 지내야 할 숙소였다. 다시 내게 어울리는 배낭여행자의 생활로 돌아왔다. 



# 위조지폐 

 중국의 식당이나 호텔 같은 조금 큰돈을 써야 하는 곳에서는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기계가 있다. 돈을 건네면 그들은 돈을 기계에 넣어 확인하거나, 작은 식당은 돈을 받고 만지작거리며 위조지폐인지 아닌지 확인한다. 그만큼 중국에 위조지폐가 많다는 방증이다. 칭다오에서 바꾼 돈이 아직까지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의는 시안에서 나를 만나고 현금이 없다며 중국은행의 ATM으로 가서 돈을 찾았다. 그리고 찾은 현금을 쓸라치면 그들은 100위안짜리 한 장이 이상하다며 우리에게 되돌려주었다. 우리는 이상하다 싶어 이 지폐를 갖고 근처 은행에 찾아가 물어보자 역시나 위조지폐라는 것이다. 만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돈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돈은 나처럼 의심스러운 남자에게 불법으로 바꾼 것도 아니고 은행의 ATM기에서 나온 현금이다. 어떻게 은행에서 위조지폐가 나올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만의에게 은행에 찾아가서 돌려받자고 했지만, 그러려면 그때 그 은행에서 바로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대에 있는 현금뭉치가 불안했다. 은행에서 위조지폐가 나오는 나라, 이래서 내가 중국사람보다 기업이나 정부를 더 못 믿겠다는 것이다. 


# 호텔 

나는 호텔에서 화장실에 들어가 칫솔을 찾았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Tooth Brush’를 찾았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칫솔처럼 보이는 기다란 것이 있긴 있는데 영어로 “Please don’t disturb”라고 적혀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게 칫솔 같은데, 무엇이길래 방해하지 말라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마음대로 뜯어버렸다가는 괜히 돈을 물어야 할 것 같아 일단 만의에게 가져갔다. “형 이거 칫솔 맞아요. 쓰세요.” 나는 되물었다. “여기 방해하지 말라고 쓰여있는데?” 그러자 “자기들도 뭐라고 썼는지 몰라요”라고 만의가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한 번은 식당에 들어갔는데 입구에 “Welcome to our hotel”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여기가 호텔 건물에 있는 식당이냐 물었지만 아니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방은 19층에 있었다. 나는 만의와 조식을 먹으러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엘리베이터는 별로 넓지 않았는데, 어떤 여자도 같이 타니 거의 꽉 찼다. 엘리베이터는 곧 1층에 도착했는데 “지잉”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열림 버튼을 눌러댔지만 같은 소리만 낼뿐이었다. 순간 나는 중국에서 일어난 수만 가지의 사건사고가 떠올랐다.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바닥으로 꺼진 사건, 버스가 낭떠러지로 떨어진 사건, 그리고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추락했다는 나의 사건이 머릿속에서 뉴스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서웠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 다시 19층에서 문이 열렸다. 그때 우리가 왜 내리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다시 시도해보자는 미련한 생각을 했는지, 우리는 셋 다 같이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같은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내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우리는 다시 19층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다른 것으로 바꿔 타 내려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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