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거의 세 시가 다 되어 잠에 들었다. 도무지 알 수 없던 중국이라는 나라가 점차 적응이 되어가고 마음이 편안해질수록 한국에서의 습관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는 배낭여행자에게 많은 이점이 있는데, 가격이 싸다던가 여행자끼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던가 하는 것 말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다는 점도 있다. 여행자들은 보통 굉장히 부지런한데 그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분주함에 덩달아 나도 일찍 일어나 부지런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습관 중 하나인 늦잠은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게스트하우스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가 시안에 와서 매일 아침 옥상으로 올라가는 까닭은, 충분하진 않지만 운동장비가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게 운동이란 밥을 먹는 것처럼 중요하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꾸준히 운동을 했는데, 여행 오기 전 가장 걱정되던 부분 중 하나가 운동을 못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관리하던 몸이 퍼지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꾸준히 맨손운동을 하고 있다. 결론은, 굳이 기구가 없어도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그러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몸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예상과는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씻은 후에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매일 다른 세계를 경험한 뒤에 숙소로 돌아와 커피를 한 잔 하며 글을 쓰는, 마치 건물주와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부유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굉장한 것이다.
나는 운동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풀어헤쳐져 널브러진 짐을 한 곳에 모아 배낭을 싸기 시작했다. 아직 시안에서 하루가 더 남아 있지만 그래야만 했다. 계획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계획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그러니까 계획에 너무 집착하고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다. 계획이 바뀐 이유는 오늘 만의가 시안으로 오기 때문이다. 만의는 내가 그동안 게스트하우스를 전전긍긍하며 고생한 것 같다며, 비싸고 좋은 호텔을 잡았다. 그리고 이제껏 나 혼자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좋았지만, 내 여행에는 절대 끼어들 수 없는 중국의 고급 호텔에서 하루쯤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의는 자기의 소수민족 친구들이 있는 도시에도 놀러 가고, 근처에 유명한 사막도 놀러 가자고 했다. 소수민족의 삶을 궁금해하는 나를 위해 그런 자리를 준비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의는, 자기를 만나면 모두 사줄 테니 내게 돈을 한 푼도 쓰지 말라고 했다. 이쯤 되어 나는 고마움보다는, 이 녀석을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의심이라는 것은, 이 글을 처음부터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본 그것이다. 나는 만의를 칭다오로 가는 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하루 본 것이 우리 인연의 전부인데, 그 친절이 너무도 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이 정도의 친절과 베풂은 가족은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나는 돈에 관해서는 친할수록 깔끔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심지어 한 번 만난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인이 나에게 이렇게 돈을 쓰는 것이 이해도 되지 않을뿐더러 몹시도 불편했다. 만의의 친절은 내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고 모든 것이 간섭으로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이 녀석이 내게 도대체 왜 이러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의심은 꽤 오래된 것이었으며 그것은 커질 대로 커져 거의 확정의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녀석이 분명 아무런 이유 없이 나에게 이런 호의를 보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남자로 마음에 들어서라던가, 나중에 큰 한방을 노리는 도둑놈이라던가, 친구들을 만나는 척하고 그들과 합심해 내 장기를 팔아넘긴다던가 하는 의심을 한 것이다. 그냥 넘겨선 안 되겠다 싶어, 만의가 오기 하루 전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처음에 만의가 내게 좋은 호텔을 잡았으니, 지내던 게스트하우스의 남은 하루는 버리고 호텔로 와서 편하게 쉬라고 한 것에 대한 나의 답장이다.
“만의야 내가 줄곧 생각을 해봤는데, 네가 중국에서의 내 생활을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것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나는 여행 중이잖아. 나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도 있고 목표도 있어서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는 것도 그중 일부야. 그런데 네가 내 방은 싸니까 버리고 좋은 호텔로 넘어오라고 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그리고 남자 둘이 한 방에서 자자는 것도 나는 내키지 않아. 말했듯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데 여행을 간섭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이런 말 하기 정말 미안한데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내일 방 빼지 않고 끝까지 채울게”
내가 이렇게 말을 한 것은, 만의를 한 번 밀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강력한 신호였다. 나는 이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만의가 시안에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막에만 한 번 다녀오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래도 사막은 가고 싶기도 했으며 분명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앓고 있던 문제들도 있었다. 나는 지독히 이기적인 놈이다. 만의에게 답장이 왔다.
“우선 오늘 형에게 그냥 싼 집 버리고 좋은 호텔로 오는게 사과 드릴 게요. 제가 그런 뜻이 아닌데 표현 문제 때문에 형이 그렇게 이해되서 미안해요. 정말 다른게 아니라 그냥 다음날에 같이 가야해서 형에게 편하게 하는 말이에요. 만약에 형에게 불편하게 느끼면 그냥 형이 하는대로 하셔도 됩니다. 불편한거 드리는거 저도 싫어서 오해 안했으면 좋겠어요. 미안해요 형.”
한 번 세게 밀고 나니 마음이 조금 후련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동안 받은 호의가 생각나더니 금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곧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만의의 말대로 숙소를 하루 일찍 빼고 다음 날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정말 지독한 놈이다.
숙소만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배낭은 대충 꾸렸다. 그리고 만의를 만나기로 한 호텔 앞에 도착해서 연락을 했다. 아무래도 어제 그렇게 쓴소리를 한번 나누고 난 뒤라 껄끄러운 마음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만의가 곧 나왔고,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래도 중국 땅에서 아는 얼굴을 보니 순간 진심으로 반가운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만의를 따라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나는 이때 불편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배낭을 멘 나는 호텔과 어울리지 않았다. 호텔 로비는 굉장히 고급스러웠는데, 어디선가 신기한 진한 향기도 흘러나왔다. 나는 이 향기가 내 배낭에 짙게 배어 오염시켜버리진 않을까 걱정했다. 나는 승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한 달에 거의 절반은 호텔에서 지냈는데도, 이곳이 몹시도 낯설게 느껴졌다. 호텔은 배낭을 멘 나를 더욱 이방인 취급했으며 직원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로비 한쪽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체크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 여권을 확인하고 역시나 그것을 인쇄했다. 중국에서 호텔이나 어느 숙박시설에 외국인이 들어가면 항상 여권을 확인하고 인쇄하는데, 그것은 공산당으로 보내어진단다. 나는 언제나 이것도 불편했는데 도대체 중국인들이 개인정보가 적힌 여권 인쇄물을 제대로 보관하고 처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여권을 인쇄한 것이 이미 열 차례도 넘는데, 이것이 정말 누출되지 않았는지 아무리 정부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이 녀석들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체크인이 끝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둘째. 남자 둘이 호텔 한 방에 들어가는 것이 몹시 싫었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호텔 방이란 게 어디를 가도 비슷하게 생긴 법이다. 널찍한 방에는 커다란 두 개의 침대가 있었고 화장실은 중국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심지어 양변기였다. 내가 중국에 와서 처음 본 양변기라 할 수 있겠다. 내 돈이 한 푼 들어가지 않은 넓고 깨끗한 호텔 방은 게스트하우스 6인실에서 하얀 수염에 콧물이 달랑거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보다 불편했다. 나는 화장실에서 먼 쪽의 침대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만의가 이야기했다. 시안에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오늘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맛있는 것을 사주기로 했으니 부담 없이 먹으면 된다고. 그동안 잘 못 먹고 다녔을 테니 이 기회에 먹고 싶던 것 전부 시켜 먹으라고 말이다. 나는 그것이 전혀 기쁘지 않고 딱히 내키지도 않았지만, 그것보다 방 안에 남자 둘이 있는 것이 더욱 불편했기 때문에, 알겠다고 하고 일단 얼른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거리를 거닐었으며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이를테면 계속해서 내 휴대폰에 오는 중국어 문자가 뭐라고 오는 것 인지, 길거리에서 싸우듯 시끄럽게 소리치는 저 남자는 도대체 뭐라고 하는 것인지 같은 것들 말이다. 정말 웃기는 것은 소리치는 사람 중에 진짜로 화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런 궁금증들이 하나씩 풀리니 재미있기도 했다. 그리고 곧 만의 친구와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안경을 쓰고 나온 친구는, 만의 친구라고 하기엔 꽤나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서른다섯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나는 “저 친구 너랑 동갑 맞아?”라고 물었는데, 만의는 “아니요, 형이랑 동갑이에요, 88년생”이라고 했다. 중국에선 나보다 나이가 10살은 많아도 ‘친구’라고 한다. 그러니까 만의가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의 나이는, 묻기 전엔 절대로 모르는 일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나이를 다시 고쳐 들어도, 이 친구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사실은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 고급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에 적힌 가격을 보았는데 음식을 두 개만 시켜도 내 하루 생활비였다. 두 명의 중국인 친구들과 종업원은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부지런히 무엇을 적어댄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간 종업원은 정말 쉴 새 없이 음식을 대령했다. 빨랫줄에 옷을 널듯 천엽 같은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나왔고, 한국의 닭고기 튀김, 고기 완자, 그리고 얇은 소고기 같은 것이 나왔다. 그리고 유명한 고량주 한 병, 이것의 가격은 자그마치 삼 일치 생활비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만의 친구, 친구랑 이야기 중에 이따금 나에게 그것을 통역해주는 만의, 그리고 통역에 “아~, 오~”따위의 추임새만 넣는 나, 이렇게 어색한 조합 세 사람이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그랬다. 정말 추임새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는데, 그것마저 귀찮기도 했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비싼 중국음식을 먹어 보겠나 싶어 부지런히 먹었는데, 사실 딱히 돈이 있어도 이런 것들을 사서 먹진 않을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 정문 앞에서 인상 좋은 아줌마가 파는 1700원짜리 국수 한 그릇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식사 중에 만의 친구가 종업원을 불러 뭐라고 하자, 곧 종업원이 중국식 샐러드와 커다란 탕 하나를 더 가지고 왔다. 게다가 오라지게 비싼 중국 고량주는 가격만큼이나 독했는데, 종업원이 한 병을 더 갖고 오는 것을 보고 내심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과일과 시안 디저트라며 과자 같은 것을 더 가지고 왔는데, 나는 도저히 이것들을 어떻게 다 먹으려고 이러는 건지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음식 더미를 도저히 올릴 곳이 없어, 다 먹어가는 음식들을 서로 합쳐가며 자리를 만들어 새로운 음식을 앉혔다. 그제야 중국 식당의 테이블이 불필요하게 넓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훌륭한 식당에서 곤욕스러운 식사가 이루어졌다.
나는 그 누구보다 한국인이라, 그가 시켜준 음식을 다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으로서 예의에 어긋나는 짓은 하기 싫었다. 그리하여 나는 식사 초반부터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는데, 그의 무자비한 주문에 질려버린 것이다. 만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 정말 다 못 먹겠으니까 제발 그만 시키라고 좀 전해줘. 예의 있게 말이야.” 만의는 그것을 친구에게 통역하지도 않고 내게 대답했다. “형 다 먹지 않아도 돼요. 아니, 다 먹는 것이 중국에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에요. 중국에서 예부터 전해지는 말이 있는데, 음식을 넉넉히 해서 부유하게 먹고 남겨야 잘 산다는 말이 있어요.” 아차 싶었다, 이곳은 중국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들에게 한국인의 예의를 차려야 할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예의를 먼저 배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조금만 먹고 남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말 복스럽게 많이 잘 먹은 뒤, 충분히 배가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남겼을 때만 그 의미가 충족되는 것이리라. 나는 친구가 시켜준 모든 음식을 최소한 한 번씩 맛본 뒤 식사를 마쳤다.
친구는 흡족하게 웃으며 식사를 계산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조금 쪼그라들었다. 나는 이 친구와 모르는 사이다. 만의와 친구라고는 하지만 이 둘마저도 10년 만에 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10년 전에 누구와 같이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들의 사이도 짐작이 간다. 그리고 만의와 나도 배에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친구는 내게까지 거하게 대접했다. 나는 돈을 조금이라도 보태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지만, 이것을 보탰다간 일주일 생활비가 한 끼에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쪼그라져 있었다. 나는 만의에게, 정말 맛있게 잘 먹었고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가 내게 음식을 대접한 것이 정말 고마웠다기보다는,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내야만 했다. 음식 앞에서 꽤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인지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두 병의 고량주가 피곤에 가속을 더하고 있는 듯했다.
이들은 돌아갈 생각은 않고, 차가 마시고 싶다고 했다. 만의도 역시 중국인이구나 싶었다. 10년 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나도 중국의 차 문화가 궁금하기도 해서 알겠다고 했다. 찻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기침을 몇 번했다. 담배연기가 너무도 자욱하게 끼어있어 목구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지독한 뿌연 연기 사이로 고풍스러우며 전통적인 분위기의 테이블이 보였다. 테이블은 거의 꽉 차있었으며,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답지 않게 유난히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우리도 한 테이블을 꿰차고 앉아 메뉴를 확인했다.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가격을 잘못 본 줄 알았다. 나는 또다시 쪼그라들어야만 했다.
곧 우리에게도 차가 나왔는데 직접 우려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한 재료와 도구가 많기도 했다. 만의가 익숙하게 차를 우려내어 한 잔씩 나누어 주었는데 맛이 상당히 부드럽고 담백했다. 이들은 차를 마시며 해바라기 씨를 같이 까먹었다. 그런데 간단해 보이던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 작업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외국인이 해바라기 씨를 잘 먹으면 중국사람 다 된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나는 어렵고 귀찮아서 두어 번 먹다가 포기했는데, 두 친구는 이것을 톡, 톡 잘도 까먹었다. 나는 피곤함이 극에 치달았다. 결국 만의에게 너무 피곤하니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징징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음 목적지로 가야 하는데 더 이상 무리하기 싫었다. 친구는 차 값마저 계산하고 일어났다. 생색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화끈한 친구구나 라고 넘기기엔 이들의 이런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화도 전혀 통하지 않는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넘치는 식사를 대접하고, 같이 있는 동안 호텔부터 모든 여행비용을 전부 대주는 만의, 나는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바로 자지 않고, 해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로비로 나왔다. 진한 새벽에 커피를 홀짝이며 한참을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어느덧 호텔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했고, 로비엔 나와 만의만 남게 됐다. 일을 먼저 끝낸 것은 만의였다. 만의는 이따금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사진을 정리하며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우리의 대화는, 그다지 많은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 일이라도 멈추어야만 하는 심도 있는 주제로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만의는 중국인으로서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한국에 온 만의는, 인천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중앙대’까지 23만 원을 지불했다. 홍익대학교 법학과 재학 시절, 아무리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도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던 만의는 중간고사 시험 전 동기에게 노트를 빌려달라고 부탁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이유는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한 번쯤은 들어보았거나 느껴보았거나, 혹은 자기가 직접 그래 보았거나 하는 그것이다. “우리는 경쟁상대야” 결국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새로운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만의는 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많이도 베풀었다. 중국인의 문화 중 하나인 이것은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한국인들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았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내가 중국에서 느낀 것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받고 무뎌져 있었다.
만의가 내게 말했다. “한국인들은 정말 너무 이기적이에요.” 나는 듣기 거북하고 불편한 이 말에, 분노했거나 기분이 나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온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모두 퇴근한 새벽 늦은 시간, 로비는 고요했으며 긴장감마저 돌았다. 어둠 속에서 머리 위의 조명이 우리를 직각으로 내리꽂고 있었다. 대화 소리가 호텔 복도에서 메아리쳤고,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자식들 나쁜 놈이네! 한국인들이 원래 그렇지 뭐”라고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이것은 내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나는 배에서부터 이 친구의 조건 없는 베풂을 굉장히 경계했다. 그 후로도 고작 한 번 만난 것이 전부인데, 중국까지 와서 내게 이런 대접하는 것에는 분명히 아무 조건이 없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한국인들은 철저하게 그리고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아무리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해도 그것은 변함없다. 그러니까 나는, 내 입장에서는 절대 조건 없이 오는 호의와 베풂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가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무 조건 없이 무언가를 베푼 적이 있던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었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중국인들의 ‘꽌시’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언젠가 나는 ‘꽌시’라는 것을 책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굳이 이것을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인맥’과 비슷한 것인데 명백하게 다른 의미이다. 정확하게 그것을 이해했다고 할 순 없지만, 내가 느낀 ‘꽌시’와 ‘인맥’의 차이는 ‘조건’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인맥이라는 것은 ‘Give & Take의 조건’이 맞아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미루어 보았을 때, 나는 그저 주기만 하고 상대에게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절대 인맥이 형성될 수 없다. 그런 관계는 오히려 ‘봉사’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혹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라고 어떻게든 합리화를 해야만, 그나마 인맥이라는 끄나풀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인맥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역겨운 자화상이다. 그러나 ‘꽌시’는 달랐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아주 좋은 예가 있지 않던가. 중국의 ‘꽌시’를 알고 나서야 나는 그동안 만의가 내게 보였던 모든 행동이 이해됐다. 만의 친구가 내게 대접한 푸짐한 식사가 혼란스러운 것은 나뿐이었다. 이 친구가 내게 바라는 것은 작은 콩알 한쪽도 없었으며 만의가 데려온 친구니까 대접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나 혼자 불편해서는 “한국 오면 내가 꼭 보답한다고 전해줘”라고 무언가 줄 것을 찾기에 급급했다. 만의가 이야기했다.
“형 저는 한국에서 받은 상처가 정말 많아요. 그래서 형이 중국에서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가요. 한국인들은 중국을 싫어하잖아요. 저는 형마저 중국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형이 중국에서 좋은 기억만 갖고 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형을 도와주는 것도 그래서 그런 거예요. 너무 경계하지 말고 저를 믿어요 형.”
그리고 마저 이어나갔다.
“중국인들은 대접하는 문화가 있어요. 아까 그 친구도 제가 오랜만에 시안에 왔으니까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제가 돈을 쓰면 저희 꽌시는 거기서 깨지는 거예요. 우리 내일 보러 가는 회족 친구들은 더 푸짐하게 대접할 거예요. 그게 중국 문화예요. 그러니까 형, 제가 중국에 와 있는 동안은 부담 갖지 말고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재미있게 즐겨요.”
우리는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방에 들어왔다. 우리 사이의 모든 오해가 허물어졌다. 만의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오해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들어온 방은 편안했다. 당연히 호텔 방은 게스트하우스의 6인실 방보다 훨씬 편한 것이다. 화장실은 뜨거운 물이 콸콸 잘도 나왔고, 짐은 여기저기 풀어헤쳐 놓아도 누가 훔쳐갈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됐다. 침대는 내가 대자로 뻗어도 남았고 솜이불은 나를 포근히도 감싸 안았다. 아침에는 로비에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호텔 조식인지 아침부터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그리고 들어와 부지런히 짐을 챙겨 나왔다. 비행기를 타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절대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벌써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말 언제든 계획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비행기 값은 만의가 내주었고, 나는 부담 없이 그것들을 받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