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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ABA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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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Mar 16. 2018

BABA PROJECT – 시안(XIAN)

 시안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도시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왕조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서쪽에는 로마, 동쪽에는 시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영했던 도시다. 나는 중국의 칭다오로 들어와서 지난을 거쳐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 중이다. 내가 서쪽으로 가는 이유는 옛 서양과 동양의 상업과 문화교류의 길이었던 ‘실크로드’에 이르기 위함이다.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동양과 서양의 여러 가지 교역품과 문물이 오갔는데, 주요 물품이 비단이었기에 실크로드(Silk Road)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시안은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라고 하니 나에게는 의미 있는 도시이고, 이제야 본격적인 중국여행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윽고 기차가 시안역에 도착했다. 중국의 여느 기차역과 다를 바 없이 시안역도 굉장히 컸는데 역을 빠져나오니 아침 11시였다. 아무래도 밝을 때 도착하니 전처럼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꼭 밝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무런 기대도 않고 있던 나의 눈 앞에 거대하고 중국스러운 성벽이 위용을 드러냈다.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놀라고 말았는데 정말이지 나는 그동안 중국에 있던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짙은 안개가 뿌옇게 끼었고 꽤 쌀쌀한 바람이 불었으며, 성벽 아래에서는 중국인들이 옥수수와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이 정겨운 음식은 찬 공기를 만나 고소한 김을 모락모락 뿜어냈으며 고향의 냄새를 풍겼다. 사람들은 괴상한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머리까지 두르고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장면이 중국의 고전영화를 보듯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것이다. 이 장면에서만큼은 중국말이 정겹게 느껴졌다.  


 나는 나지막한 미소를 띠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음껏 여행자 티를 냈다. 왠지 이곳에서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내가 중국에서 정겨움을 느낄 줄이야. 정말 웃기는 일이다. 나는 어느새 지난 일들은 씻은 듯이 잊어버렸다. 숙소를 지도에 찍어보았는데 거리는 1.2KM 정도, 그러니까 걸어서 40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누가 뭐라도 나는 배낭여행을 온 것이다. 배낭은 앞 뒤로 메어 무게가 약 25KG 정도 됐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배낭여행자보다도 조금 더 무겁게 다니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배낭여행을 시작하고, 배낭을 멘 채로 오래 걸은 적이 없었다. 중국의 버스가 워낙 싸고 노선이 잘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였지만 아무튼 나는 배낭을 메고 오래 걸은 적이 없었다. 시안역에서 숙소까지는 버스로 170원,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나는 걷기로 했다. 버스를 타지 않는 것이 바보같이 느껴져 걸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했는데, 나중에 배낭을 멘 채로 불가피하게 걸어야 할 때를 위해 미리 걸어본다고 생각하니 나름 이유가 됐다. 가방을 다시금 질끈 매고 호기롭게 걷기 시작했다. 왠지 신이 났다. 걸어가는 동안 역시나 많은 중국인들이 말을 걸어왔는데 이제는 무시하는데 꽤 능숙했다. 절반 즈음 왔을 무렵에, 어깨가 접힐 듯 아팠고 추운 날씨에도 땀이 흘렀지만 포기하고 버스를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어렵지 않게 숙소에 도착했다. 


 배낭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 세계의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배우는 것을 상상했지만 그동안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외국인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 한국인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여행을 떠나온 지난 일주일 간은 완벽하게 중국인들과 함께해왔다. 그래서 나는 중국에 그렇게 빨리 질려버렸는지도 모른다.  

 기대하던 시안의 숙소에 들어가자 직원들이 “닌하오”가 아닌, “Hello”라고 인사했다. 그 인사가 어찌나 반갑던지, 나는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여기서 지내는 한국인이 얼마나 더 있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네 명이 더 있다고 대답했다. 어쩐지 이곳에서는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진하게 들었다. 숙소를 배정받고 올라가는 길에 로비를 지나쳤다. 로비에는 6명의 사람들이 제각각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전부 서양인이었으며 여기저기서 영어가 들려왔다. 영어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방에는 한국사람이 있을까, 외국인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첫눈에 보인 것은 그동안 내가 그토록 찾던 배낭여행자들의 배낭이었다. 배낭이 숙소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여긴 정말 나 같은 배낭여행자들이 모이는 숙소가 맞았다. 너무도 반가워서 그들의 배낭을 몰래 한 번 스윽- 훑어보았다. 그들이 무엇을 들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나와 같은 처지의 그들은 어떤 옷을 챙겨 다닐까, 세면도구는 어떻게 가지고 다닐까, 전자기기를 나처럼 많이 들고 다닐까, 이 친구들은 어떻게 다니고 있을까 하는 것들이 무척이나 궁금하고 반가웠다. 나는 널브러진 배낭들 사이에 내 배낭도 잘 어울리게 널브러트려 놓고, 어김없이 스타벅스를 찾았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이었다. 그때까지도 방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체구가 작고 마른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인사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 친구는 싱가포르에서 왔으며 영국을 시작으로 6개월째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총 80개국을 돌았으며 얼마 전에는 북한에 다녀왔다고 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확하게 만나고 싶던 사람이었다. 이 친구가 북한에서 사 온 기념품이라며 내게 이것저것 보여줬는데 신기한 것이 많았다. ‘로동신문’의 첫 장은 김정은의 사진으로 빼곡했으며 모두 컬러사진이었다. 다음 장부터는 일반 뉴스의 사진들이었는데 전부 흑백사진이었다. 신문에서 남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온통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 혹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욕뿐이었다. 또한 그 친구는 북한 초등학생들의 수업을 관람하고 왔다며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술시간인 듯, 아이들은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림의 가운데에 트럼프가 서있었으며 양 옆으로 아이 둘이 서서 총에 달린 칼로 목을 찌르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는 그림 위로 온갖 잔인한 말이 적혀있었다.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으며 이건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자정을 넘겼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방이 꽉 차있었다. 어제 늦도록 들어오지 않던 친구들은 로비에서 밤새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나와 휴대폰 통신사에 갔다. 어젯밤부터 휴대폰이 말썽이었다. 칭다오에서 산 심카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도무지 인터넷을 잡지 못했다. 줄곧 “검색 중”이라고만 나올 뿐이었으며 수십 번을 껐다 켜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지도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찾아갈 수도 없었으며, 심각한 방향치인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것도 큰일이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내가 익숙한 대부분의 어플리케이션을 통제하여 사용할 수 없는 탓에 스트레스가 더욱 극에 달했다. 나는 통신사를 찾아가 번역기를 사용하여 도무지 휴대폰이 인터넷을 잡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직원은 자기 휴대폰에서 심카드를 빼내어 문제의 내 것을 꼽아보며 테스트를 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한 번 끄덕였다. 얼핏 보기에 그의 휴대폰에서는 잘 작동하는 듯 보였다. 그는 힐끗 나를 보며 “너도 봤잖아?”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번역기에 무언가 적더니 나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네 것이 고장이야”라고 쓰여있었다.  

 사실 이것을 미리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숙소에서 와이파이가 될 때 검색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보았는데 휴대폰 고장의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작은 희망을 갖고 찾아간 것이었지만 역시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로비에 앉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중국에서 휴대폰을 새로 사야 하나 싶어 정보를 찾아보았는데, 중국에서는 아이폰이 무척 비싸고 몇몇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으며 고장 났을 때 한국에서 수리를 받을 수 있을 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이내, 그렇다면 중국 휴대폰을 사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 싫었다. 결국 어떤 답도 찾지 못하고 머리만 싸매고 있었다. 하루 걸러 하루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나는 일단 이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먼저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트북을 열어 글을 적어 넣고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업로드 실패’, 몇 번을 다시 시도해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온몸의 피가 말라버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너무도 답답했다. 홈페이지에 글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여행하는 동력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간신히 잡고 있던 팽팽한 실에 몹시 날카로운 칼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그러자 너무도 쉽게 ‘툭’ 하니 끊어져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중국에서 여행할 의미가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닫고 고민 없이 바로 결정했다. 중국여행은 여기서 끝내버리고 바로 네팔로 넘어가겠다고, 더 이상 이 중국이라는 나라를 여행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나갈 채비를 했다. 머리가 아프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땐 잠시 모든 것을 내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방문을 열기 전에 싱가포르 친구와 작별인사를 했다. 이 친구는 곧 ‘청두(Chengdu)’라는 도시로 이동하고 이후에 라오스로 떠날 것이라고 했다. 배낭여행자들은 친해지기도 쉽고 그만큼 헤어짐도 쉽다. 우리는 각자 갈 길이 있고 그것에 대해 아쉬움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모든 여행자가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취향과 목적에 맞게 각기 다른 길을 스스로 계획하여 나아간다. 정확하게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던가. 나는 싱가포르 친구에게 다음 목적지까지 무사히 이르기를 바란다며 인사하고 먼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인사를 하고 로비로 나와 어디를 구경할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핸드폰을 고칠 수 있는 아주 고전적인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아직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이것은 예부터 사용되던 효과적인 방법인데, 핸드폰을 몇 대 후려 치는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끄고 액정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세게 후려쳤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아마 그들도 내가 왜 핸드폰을 이렇게 내려치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다시 켰다. 내 생각에 이 방법은 동의보감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민간요법이다. 인터넷을 정확히 잡았다. 물론 완전히 고쳐진 것은 아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인터넷을 잃어버리곤 했지만 몇 대 후려치면 다시 연결됐다. 정말이지 완벽한 방법을 찾았다. 나는 얼떨결에 핸드폰 문제를 해결하고 시안 시내를 나섰다. 시안에는 구경할 곳이 많이 있다. 시간도 많고 여행 첫날이기 때문에 가볍게 소수민족(회족) 거리를 둘러보았다. 그동안은 전혀 보이지 않던 소수민족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회족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한 소수민족인데 대부분 이슬람 신자들이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이슬람과 관련된 기념품이나 음식을 팔고 있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강한 향신료 냄새와 ‘고수’를 싫어하는 모양인데, 운이 좋게도 나는 입맛에 잘 맞았다. 그래서 길거리 음식에 대해서는 전혀 거부감이 없었고, 뿌릴 수 있는 향신료는 모조리 뿌려먹었다.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은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이다. 나는 서너 시간 정도 거리를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노트북을 챙겨 로비로 나가서 다시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려고 시도했다.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겠으나 아까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업로드가 한 번에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됐다. 이것도 얼떨결에 해결되어버렸다. 정말 알 수 없는 나라다. 어쨌든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됐고 원래 계획대로 중국여행은 제자리를 잡았다.


 

 쉬고 있는데 직원이 로비의 사람들을 모아 ‘비어 퐁’ 게임을 하자고 했다. 나는 할 것도 없고 이제 사람들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기꺼이 알겠다고 했다. 이 게임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외국인들과 한두 마디씩 대화를 나누었고, 게임이 끝나자 근처 외국인들이 전부 우리 테이블로 모여 10명 정도가 함께 앉았다. 그리고 저쪽에 한 테이블이 더 있었는데 한국인 남자 둘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말을 걸까 했지만 결국 그러지는 않았다. 친해진 외국인들은 이랬다. 프랑스 1, 이태리 1, 호주 1, 미국 1, 독일 2, 말레이시아 1, 한국 1, 모두 영어를 할 줄 알았고 드디어 기가 막히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저쪽 구석에는 중국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이 자리에 낄 수 없었다. 이곳에선 우리가 주인공이었다. 그동안의 설움을 한방에 씻어내는 듯했다. 여기서 중국어를 쓰다간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을지도 몰랐다. 대화 내용은 당연히 중국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웃긴 것은 중국이 아름답다거나 멋지다거나 하는 것 따위의 여행 이야기가 아닌, 온통 중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여기서 큰 위안을 얻었다. 내가 중국에서 겪은 설움 따위 비교도 되지 않게 백인들은 더욱 많은 설움을 겪었다. 미국 친구는 중국인이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해서 먹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사라져 계산을 하고 나와야 했단다. 호주 친구는 룸메이트가 중국인이었는데 침대에 누워 면도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단다. 그 외에도 많은 서양인 친구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바가지를 당했다고 했다. 이 친구들은 “상해는 절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도시”라고 입을 모았다. 이태리 친구는 다음 목적지가 상해였는데 수만 가지의 충고를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 같이 입을 모은 또 다른 말은 “그래도 시안은 좋다”이었다. 모두 느끼는 것이 같았다. 우리는 배낭여행자들이다. 바쁘고 삭막하고, 빠르고 어지러운 도시생활이 지겨워 배낭을 짊어지고 세상으로 나온 사람들이 상해 같이 번잡한 도시를 좋아할 리 없었다. 나는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한껏 취해 잠에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중국에 오고 처음 가진 술자리였다. 


 새로운 룸메이트가 왔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사람을 보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와 수염은 새하얗게 질렸으며 얼굴엔 온통 주름 투성이었다. 햇빛을 이용해 불을 붙일 수 있을 만큼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있었고 허리는 꼽추처럼 굽어있었다. 그럼에도 키는 나보다 커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 사람의 나이를 여든 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배낭을 메고 6인실 방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룸메이트가 된 것이었다. 나는 적잖이 놀랐지만 그래도 그러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딱히 실례가 될 것 같아서라기 보다는 촌스러운 한국인으로 보이기 싫었다. 나는 마치 “당신 같은 사람 많이 봤어”라는 표정을 지으며 태연하게 인사했다. 그도 내게 인사를 했다. 짐을 풀고 앉은 그는 여느 노인과 다를 것이 없었다. 원래 노인들이란 한 번 말이 터지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하듯 말을 시작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왔는데 중국에서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기침을 해대었는데 하얀 콧수염에 콧물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그런데 그게 더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며칠간 여기 머물며 쉬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나는 그중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노인의 웅얼거리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계좌 잔고를 확인하고 싶다고 인터넷 되는 기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갖고 다니는 아이패드를 보여주었는데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켜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저런 걸 들고 어떻게 중국 여행을 하고 있나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아이패드를 할아버지에게 빌려줬다. 조용히 한참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데 곧 내게 와서는 포기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네 나이 때는 컴퓨터도 없었단다. 나는 이런 기기들에 익숙하지 않아”하며 산타클로스 같은 웃음을 내보였다. 도대체 중국여행은 어떻게 다니는 것이며, 아니 그보다 인터넷도 사용할 줄 모르면서 중국 기차는 어떻게 끊고 상해에서 여기까지 왔는지 놀라웠다. 아이패드 화면에는 캐나다 은행의 사이트가 켜져 있었는데 계좌 확인하는 페이지로 접속해서 건네주자, “내가 익숙한 페이지군. 여기부턴 내가 할 수 있네. 고맙네”라고 하고 다시 기기를 가져갔다. 나는 한참 동안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 번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밤이 깊어 방 안의 룸메이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잠자리에 들 때면 유독 기침을 심하게 했는데, 나는 그의 기도가 막혀 숨을 쉬지 못할 까 봐 걱정이 되었다. 기침을 한 번 시작하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이 정도 되면 여행을 멈추고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론 그것은 그의 자유였다.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만약 정말로 숨이 막히거나 위급한 상황이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따위의 생각 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익숙한 듯 언제나 아침엔 제일 먼저 일어나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낯선 룸메이트였다. 


 어제 술을 마시며 오늘 함께 여행할 멤버가 모였다. 약속된 시간에 로비로 나가자 두 명이 나와 있었다. 호주와 이태리 친구. 다른 친구들은 시간이 다 되어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각자 다른 계획이 있는 모양이다. 시안에는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약 13KM 길이의 성벽이 있는데, 이 성벽에 올라가 자전거 타고 한 바퀴 돌 수 있는 투어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기로 했다. “자, 출발할까?”라고 호주 친구가 말했고 우리는 직원에게 인사하고 당당하게 문을 나왔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바로 길을 잃었다. 이 녀석들은 나오자마자 바로 “근데 어느 방향이야?”라고 했는데 나는 정말 거리가 떠나가라 크게 웃어버렸다. 내가 중국에 와서 이렇게 웃었던 적이 있나 싶었다. 우리는 다시 로비로 들어가서 지도를 확인했다. 길을 확인하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그저 “남쪽으로 계속 가면 되겠네”라고 하고 끝이었다. 외국인들은 정말 지독한 녀석들이다. 아마 핸드폰에 중국 지도 하나 없을 것이다. 이 날은 길을 걷는 내내 지도 따위 보지 않았고 돌아올 때는 “북쪽으로 가면 돼”라는 식으로 길을 찾았다. 이따금 “이 방향 맞지?”라고 서로 확인하곤 했는데, 나는 조용히 핸드폰 지도를 보고 확인하고도 “아마도”라고 했다. 핸드폰에 중국 지도가 있다는 치부를 절대로 이 녀석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쌍두마차를 얻은 마냥 든든했다. 거리의 주인공이 된 듯했다. 중국인들의 시선이 싫지만 많았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도로를 무단횡단해야 할 때엔 “진정하고, 차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따위의 말장난을 하며 걸었는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무단횡단이 재미있는 놀이로 느껴졌다. 나는 시끄러운 한 아줌마를 보고 “중국인들은 항상 화내는 듯 해”라고 했는데 호주 친구가 “쟤 화난 거 맞아”라고 장난을 쳤다. 그러자 그렇게도 듣기 싫던 그것마저 신기한 구경거리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그동안 스트레스받던 모든 것들이 이 친구들과 공유하고 공감하며 너무도 재미있는 놀이와 구경거리로 바뀌어 버렸다. 정말이지 신기하고 짜릿했다. 중국이 질리거나 밉지 않고 신기하고 흥미로운 나라로 바뀌어 버린 것은 그저 종이 한 장을 뒤집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었다. 시안 성벽은 평화로웠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성벽 위에는 사람을 셀 수 있을 정도로 한가했다. 동, 서, 남쪽으로부터 모인 세 명의 다른 인종은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성벽을 휘저으며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다음 여행지, 중국의 취두부 냄새, 한국의 된장 냄새, 이탈리아의 레스토랑, 호주 친구의 꿈(라이더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동안 다닌 여행지 등 정말 세계를 아우르는 굉장한 대화를 했다.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나는 잠깐 잠에 들었는데, 그 사이 밤늦은 시간에 이탈리아 친구는 상해로, 호주 친구는 청두로 각자의 길로 떠났다. 말했듯이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나는 그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그들은 내 기억 속에 여행의 즐거웠던 한 부분으로 기억된다면 충분하니 말이다.  



 나는 분명히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했다. 다음 날, 조용히 혼자 병마용에 다녀오기로 했다. 시안이라 하면 실크로드의 출발지, 삼장법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 옛 동양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진시황의 병마용이 발굴된 곳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짐을 챙겨 나왔다. 시안을 방방곡곡 돌아다녔더니 이제 길이 훤하다. 두렵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병마용 가는 버스를 잡아 탔다. 버스를 타고 한참 가는데 깜빡 잊고 가지고 오지 않은 물건이 생각났다. 나는 지금까지 중국에 와서 이것을 단 한 번도 놓고 나온 적이 없었는데 정말 까맣게 잊고 놓고 온 것이다. 그것은 마스크였다. 나는 가방을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마스크는 없었다. 어디 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그것을 후회하거나 하진 않았다. 사실 가방에 있었어도, “여기 있구나”하고 다시 넣었을 것이다. 별로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병마용에 도착했다. 넓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갔지만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중국은 항상 무엇을 상상하던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앞으로 중국을 여행할 때 조금씩 더 과장해서 예상하면 얼추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내리고도 입구까지는 꽤 걸어야 했는데 어느 틈에 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걷고 있었다. 이들은 이상한 깃발을 들고 다니고 있었는데 비슷한 무리가 곳곳에 있었다. 한 무리가 약 50명쯤 되어 보였는데 가이드가 움직이면 그들이 우르르 따라가는 모양이란, 정말 나는 뛰어서 도망가야 할 것만 같았다. 일부로 일요일을 피해 월요일에 왔지만 역시나 예상을 뛰어넘는 인파였다. 중국의 유명한 여행지를 조용히 감상하고 싶다면 그냥 가지 말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병마용 사진을 찍기 위해 앞사람 뒤에 줄을 서고 기다렸다. 딱히 줄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냥 어떤 사람 뒤에 서서 그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줄은 절대로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는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얼굴과 어깨를 비집고 밀고 들어오는데 내 차례가 절대 올 것 같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중국에서 투어는 전쟁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그들을 전부 밀쳐버리고 가장 앞자리를 꿰차 양다리에 힘을 주고 전봇대처럼 버티고 섰다. 사진도 찍지 않았다. 병마용도 보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은 내 자리를 지키는데 급급했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해야 나를 인정한다. 이내 이곳은 완전히 내 자리가 되어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얼굴 양 옆으로 들이미는 핸드폰과 카메라까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야 나는 병마용을 볼 여력이 생겼는데,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여유롭게 이것들을 감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간신히 사진만 찍고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딜 가나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유롭게는 아니더라도, 천천히 구경하려 애썼다. 중국인들의 투어와 엇박자로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물밀듯이 몰려오는 이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병마용 투어가 어땠느냐고 물어본다면 그저 그랬다. 병마용 발견의 역사적 의미와 그 규모가 웅장하고 얼굴의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섬세함과 기원전에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장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저 그랬던 투어를 괜히 굉장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인 지식이 짧았거나,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투어가 아닌 전쟁을 치렀거나 하는 나름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저 그랬다. 그러나 살면서 꼭 눈에 넣어야 하는 것임은 분명했다. 그래도 혼자만의 투어가 좋았다. 조용하진 않았지만 편했다. 아무와도 대화치 않고 혼자 보고 느끼는 시간. 나는 분명히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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