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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ABA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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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16. 2018

BABA PROJECT – 티베트(TIBET)

  드디어 내가 가장 기대하던 도시, 그리고 중국의 마지막 여행지인 티베트의 라싸(Lhasa)로 간다. 티베트는 종교적인 이유로 외국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과거에 많은 모험가들이 미지의 땅인 티베트를 개척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리고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티베트는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대에 위치해있어 당시에는 마땅한 교통편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도전하던 탐험가들은 고산병에, 추위에, 배고픔에, 외로움에 실패한 것이다. 또한 당시 노상강도가 워낙 많아 돈과 식량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경우도 숱하다고 한다. 혹, 티베트까지 성공적으로 닿았다 하더라도 티베트인들에게 다시 쫓겨났거나 참수되었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오랜 기간 미지의 땅으로 존재했던 곳,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의 시대에 들어 내가 티베트에 갈 수 있게 된 배경은 어둡고 참혹하지만, 지난 세월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들을 기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티베트 지역을 여행할 생각이다.  


 티베트로 떠나는 기차역에 들어섰다. 밤 10시 55분 출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역은 어딘가 떠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는 시간이 남아 역 내에 커피라도 한 잔 하며 쉴만한 곳이 있나 찾아보았다. 에스컬레이터로 한 층 올라가 멀리 메뉴에 커피가 적혀있는 꽤나 넓은 식당에 들어갔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몸이 좋지 않아 따듯한 라떼를 한 잔 하고 싶었다. 카운터에서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일어났고, 만의가 나 대신 따듯한 라떼 한 잔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게 무엇이냐며 되물었고 만의가 메뉴를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대답했지만 찾지 못했다. 우리가 다시 “위에서 두 번째에 있는 저것이요!”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주문을 받았는데, 나는 그냥 따듯한 차로 바꿔달라고 했다. 무얼 만드는지도 모르는 것을 먹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차로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으슬으슬한 기운에 약을 먹고 따듯한 차를 마시니 몸이 많이 괜찮아졌다. 어느덧 말이 굉장히 많아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드디어 티베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고, 앞으로 38시간의 긴 여정을 떠나야 했다. 나는 기차역에 들어서면서부터 자리에 앉기까지 무려 네 번의 여권 검사와 허가증 검사를 받았다. 관문을 지날 때마다 가방을 열어 여권과 허가증을 보여주고 다시 넣기를 반복해야 했다.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티베트로 향하는 열차에는 중국 공안도 함께 탑승했는데, 이들은 내게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이 기차에 외국인은 나, 한 명뿐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나는 덕분에 유명인사가 되어 어디를 가든 여기저기서 “한궈, 한궈”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우리는 밤늦은 시간 출발한 기차에 몸을 싣고 머지않아 않아 잠에 들었다. 


 기차는 흔들흔들 달리며 언제나처럼 포근했을 것이다. 아무리 큰 어른이라도 기차의 자장가를 듣고 있으면 스륵 잠들 것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서서히 창문 밖에 파란빛이 돌 때 즈음에 나는 혼자 깨어났다. 그러나 정신만 깨어났을 뿐, 눈을 뜰 수도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이불을 코까지 덮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발 밑의 가방에 약이 있었지만, 집으러 앉을 수가 없었다. 곤히 자고 있는 만의를 깨우기도 싫었고 그저 잠들다 깨어 앓기를 반복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해가 뜨고 햇빛이 기차 안으로 밀고 들어와 답답함마저 느낄 정도였지만, 나는 여전히 오한에 떨었다. 잠시 후에 만의가 일어났고, 나는 약을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  



 몇 시간 자고 일어나 승무원들이 아침 식사로 파는 죽을 먹었다. 약 먹고 식사를 해서 그런지 컨디션이 많이 회복됐다. 나는 한국에서 아무리 아파도 약에 의존하기 싫다며 엄마를 걱정하게 하곤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몸살 기가 바로 올라와버렸다. 쉬고 있는데 승무원이 우리에게 종이 2장을 주었다. 나는 만의에게 종이의 정체에 대해 물었는데, 이것은 건강검진 설문서였다. 우리는 곧 열차를 바꾸어 타야 한다. 이 열차는 티베트의 고산지대를 넘어갈 수 없고, 산소 공급이 가능한 열차로 바꾸어 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달리는 열차로, 순간 최고 해발고도 5,024m의 하늘 길을 달린다. 그래서 열차를 갈아타기 전에 건강검진을 하는 것인데, 만일 열이 있거나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티베트 여행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승무원이 우리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괜찮은 척을 했다. 지금 체온을 잰다면 분명히 고열로 나올 것 같았다. 승무원의 질문에 대답은 만의가 대신해주었고, 나는 그저 옆에서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건강검진만은 피해갈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공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다음 열차로 이송됐다. 이제 이 기차는 남은 20시간 동안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것이다. 창 밖의 풍경이 참 멋지다고 소문이 자자한 구간이었다. 우리는 기차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침대로 와 누웠다. 빠트리지 않고 약도 챙겨 먹었다. 그리고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데 창 밖의 따듯한 기운이 실내를 감싸자 슬그머니 잠에 들었다. 기차에 스며드는 햇빛은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게 슬그머니 들어버린 잠은, 오후 창 밖의 풍경을 앗아갔다. 잠에서 깨자 해는 이미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린 시간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눈 앞이 핑 돌았다. 고산지대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쯤 익숙했다. 야딩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의는 숨쉬기 힘들고 어지럽다며 고산 증상을 신기해했다. 산속의 빛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창 밖을 보면 내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 승무원들이 눈 앞을 순식간에 뛰어 지나쳤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만의가 말했다. “형, 누구 숨 못 쉬나 봐요. 승무원들이 산소통 들고 뛰어갔어요.” 아, 이제 시작이다. 이래서 이 기차로 옮겨 탄 것이고, 그로 인한 응급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고지대로 걸어 올라가는 것은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천천히 적응하며 올라가서 괜찮다. 그러나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올라와서 갑작스럽게 고산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만의도 줄곧 숨쉬기 힘들다며 형은 괜찮은지 물었는데, 나도 숨쉬기는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나는 만의에게 금방 적응될 테니 숨 크게 쉬고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낮잠을 너무 많이 잔 탓에, 새벽 2시가 되어도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기차는 다음날 아침 10시 도착 예정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자야 여행을 할 수 있을 텐데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이왕 깬 김에, 승무원이 3시에 5,024m의 최고점을 찍는다고 해서 그것까지 보고 자기로 했다. 우리는 고도계 앞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렸다. 고도계는 기차가 움직이는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바뀌었다. 고도는 어느덧 5,000m를 넘겼고, 숫자가 1씩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차는 순간 5,024m를 정점으로 찍고, 그때부터 다시 하산하기 시작했다. 정말 굉장한 것이다, 이런 높이까지 철길을 만들어 기차가 다닌다는 것은. 아마 비행기가 위로 지나갔다면, 바로 아래에서 기차가 달리는 진귀한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의가 나를 보며 한 마디 했다. “이 길 만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요.” 내가 대답했다. “그만 들어가 자자” 



#라싸(Lhasa) 

 다음날 아침, 이윽고 기차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Lhasa)에 도착했다. 열심히 약을 먹은 덕분에 몸 상태는 매우 좋았다. 나는 티베트에서 보내는 이틀에, 중국에서 한 달 반 동안 쓴 것과 같은 금액을 쏟아부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공안에게 어딘가로 끌려들어가 입경수속을 했다. 이들도 이미 내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조금 걸어 나가니, 키가 작고 아주 단단한 체격에 얼굴이 시커먼 남자가 “HEO JUNG”이라고 쓰여있는 종이를 들고 서있었다. 우리는 단번에 그가 가이드임을 알았다. 티베트에서 외국인은 혼자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지인 가이드와 차를 빌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가격이 이렇게 비싼 것이었다. 만의와 가이드는 중국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언어가 있지만, 중국어를 모국어로 배워야만 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패전한다면, 가장 먼저 그들은 언어를 강요받는다. 만의와 가이드가 중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썩 좋게 보이진 않았다. 가이드는 이윽고 내게 와서 “Welcome to Tibet”이라며 목에 하얀 실크를 걸어주었다. 아! 영화에서 본 기억이 있다. 이것은 환영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실감했다. “아, 내가 정말 티베트에 왔구나.” 


 가이드는 영어를 잘했다. 차를 타고부터 가이드는 중국말이 아닌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는 가이드를 하기 전에 등반가였다는데, 에베레스트(Everest) 정상 등반에 성공했다고 했다. 티베트인답게 산을 매우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는 티베트에 대해 설명하다가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내 인상을 너무도 찌푸리게 만들어서 기억한다. 그의 말인 즉,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불교의 성지로 인디언(Indian), 네팔리(Nepali)등 많은 외국인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대부분의 티베트인은 외국으로 갈 수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너무도 간단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여권이 없었다. 몇몇 티베트인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아예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대부분의 티베트인은 여권이 없어 외국을 나가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많은 것이 걱정되겠지, 중국 입장에서는 이들을 가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관리일 것이다. 이후로도 나의 티베트 여행은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라싸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모습과 많이 달랐다. 티베트 전통과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를 상상했지만, 중국에 의해 무자비하게 현대화되어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하루가 다르게, 매년 라싸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도로에는 10미터에 한 번 꼴로 오성홍기가 펄럭였고, 중국 역대 지도자의 얼굴이 사방에 걸려있었다.  


 우리는 곧 호텔에 도착했고, 가이드는 우리를 체크인해주었다. 심지어 체크인을 할 때에도 가이드가 필요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가이드는 우리에게 “그럼 오늘은 고산 적응 잘 하고, 내일 보자!”라고 하고 떠났는데, 얼떨결에 나도 모르게 “응, 내일 봐!”라고 했다. 그리고 곧 나는 상황이 이상하게 흐름을 느꼈다. 티베트 여행은 4박 5일에 인당 80만 원씩, 합쳐서 160만 원을 지불했다. 23일-24일은 꼬박 기차에서 보냈고, 27일은 떠나는 날이었으므로, 25일 아침 티베트에 도착해서 26일까지가 여행의 전부였다. 그런데 25일마저 쉰다는 것이 나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26일 하루, 그저 라싸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160만 원을 부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외국인인 나는 가이드 없이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그래서 비싼 돈을 내고 가이드를 고용한 것 아닌가. 나는 순간 화가 나서 만의에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맞는 거야? 넌 알고 있었어?” 만의가 대답했다. “아니요, 저도 몰랐어요. 친구에게 물어볼게요”  


 시간은 이미 오후 1시를 지나고 있었고, 사전에 그 어떤 내용도 전달받지 못한 우리는 그저 멍하니 버려졌다. 미리 우리에게 첫날은 고산에 적응할 시간이라 이야기해주었다면 나는 다른 계획이라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버려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티베트에 떠나기 며칠 전부터 스케줄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번번이 기다리란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만의가 어떻게든 하겠지 라는 생각에 그저 믿고 기다렸다. 아무 생각 없이 믿었던 내 탓이다. 처음부터 너무 만의만 믿고 있었다. 만의 친구와 가이드에게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첫날은 고산 적응시간이고 둘째 날만 시내 투어라는 것이다. 이런 스케줄의 여행인 줄 알았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나는 티베트 주변 자연을 둘러보며 오프로드 여행을 하기 위해 차를 빌린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작은 승용차는 그저 시내를 돌기 위함이었고, 회사에서 차를 빌린 것도 아닌 가이드 본인 차였다. 이것이 하루 인당 80만 원짜리 투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려 든 기분이었다. 결국 내 탓이었다.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일단 무엇이라도 하자고 밖으로 나갔다. 


 온전히 여행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싼 돈 내고 와서 내가 왜”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계속 떠올랐다. 만의는 내게 미안하다며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다고 유명한 식당을 찾았다. 그러나 이것은 만의가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화나는 것은 여행사 친구와 가이드, 이들의 무책임한 태도였다. 라싸의 길에는 무장 공안과 군인이 많았다. 이들은 외국인을 검문하기도 하고, 티베트인을 감시했다. 나는 티베트에 당당하게 허가증을 받고 들어와 가이드까지 고용했지만, 도대체 ‘내가 왜!’ 공안과 군인의 검문이 무서워 말도 하지 못하고 다녀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만의와 이야기하다가도 공안이 보이면 입을 다물고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혹시라도 이들이 한국말을 듣고 내게 검문을 한다면, 가이드 없이 다닌 것이 문제가 될 것이었다. 가이드는 그런 문제가 생기면 자기에게 전화하라고 했지만,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는 만의가 찾은 유명한 식당에 들어갔다. 나는 한국인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매우 품위 있는 티베트 장족 여자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만의가 음식을 주문하는데, 여자가 “한궈”라고 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나중에 만의에게 물었다. “나 한국인인 것 들켰어?” 만의가 대답했다. “아, 여기 직원 중에 한국인이 오면 꼭 사진 같이 찍는 친구가 있는데, 오늘 쉬는 날이래요. 아마 형 오는 것을 알았다면 오늘 쉬지 않았을 거래요” 뭐야,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외국인에게 생각만큼 차갑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사장은 품위뿐만 아니라 서비스 예절이 굉장했다. 우아함마저 느껴지는 서비스에 나는 그녀가 우리에게 올 때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무시당할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어느새 식당은 꽉 찼음에도 그녀는 빠르면서도 우아하게 모든 테이블을 관리했다. 그녀 밑에 있는 직원들은 당연히 친절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매우 맛있었다. 야크 고기가 들어있는 탕이었는데, 다른 데서 먹었던 것처럼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다. 우리는 어떻게든 다 먹어보려 했지만 몹시 넘치는 양에 절반 이상을 남겼다. 그녀는 손도 컸다. 계산하며 정말 맛있었지만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해 미안하다며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왔다.  


 훌륭한 식사에 기분이 많이 풀렸지만 우리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그저 거리나 거닐자는 생각에 천천히 걸었다. 공안이나 군인이 자주 보였고 그때마다 우리는 대화를 끊었다. 거리에는 오성홍기가 많이 보였다. 들은 말로는 사람이 사는 모든 건물에는 오성홍기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괴상한 포스터도 많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 포스터의 내용에 대해 만의에게 물었다. 만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내용에 대해 전부 숙지하라는 내용이네요.” 나는 웃었다.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한어를 제 1국어로 공부하라’라는 등의 강압적인 포스터가 많이 붙어있었다. 그저 힘없는 티베트 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지도 못하고 조용히 억압과 독재 아래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외국인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여권이 없어 외국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이런 답답한 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이라곤 분신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밖에 없던 것이다. 그렇게 몇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나마 어렵사리 언론에 노출되면 ‘티베트인 독립투쟁’, ‘분신자살’이라는 보도에 눈살을 찌푸리며 “쟤들은 왜 저런데”라고 하고 넘길 뿐이다. 



# 암드록쵸 호수 

 기차에서부터 좀처럼 숨쉬기를 힘들어하더니 만의는 이제 거리를 걷는 것도 힘들어했다. 결국 우리는 차를 잡아타기로 하고, 곧 우리 앞으로 온 차에 탔다. 만의는 기사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내게 물었다. “형, 운전사가 제 고향사람이네요. 싼 가격에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데, 갈까요?” 나는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아까웠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지, 가자!” 그렇게 우리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향했다. 라싸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옛 모습을 간직한 건물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시내에서 벗어나 한적하게, 옛 선조들의 삶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티베트의 모습 이리라. 그러나 한 가지 아쉽고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면, 각 건물마다 하나씩 꽂혀있는 오성홍기. 그것만이 오직 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성지에 빨간 오점을 남겼다. 

나는 어느새 잠에 들었다. 고산지대에서는 공급되는 산소의 양이 부족해 자주 피곤하다. 가는 길에는 몇 번의 검문소가 있었고, 나는 몰래 피해갈 수 있었다. 끝없는 황야를 지나고 이제부터는 산 위를 오른다고 했다. 무려 4,998m까지 말이다. 눈 앞에 거대한 민둥산이 겹겹이 보였고, 산을 둘러서 길이 나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뱀이 산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차는 산에 난 길을 따라 빙빙 올라 이윽고 정상에 올랐다.  


 4,998m라니, 이렇게 높은 땅에 발을 디딘 것은 처음이었다. 매주 기록을 갱신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전망대로 걸어갔다. 숨이 턱 막혔지만, 문제 될 것 같진 않았다. 야딩에 다녀온 것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4,600m까지 걸어 올라갔을 때 쉰 소리를 내며 쌕쌕 대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심지어 조금 후에는 뛰어다닐 수도 있었다. 나는 전망대 가까이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넋을 놔버렸다. 황량하고 높은 민둥산 사이로 청량한 호수가 수줍게 흐르고 있었다. 사방으로 민둥산이 호수를 단단히 둘러싸 아무도 볼 수 없게 지키고 있었다. 이런 곳에 숨어있었구나, 예뻐서 미칠 것 같았다. 성별이 있다면 이 호수는 분명히 여자일 것이다. 멋지다기 보단 너무도 예뻐서 황홀함에 정신을 빼앗겨버렸다. 나는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뛰어다녔다. 그녀의 어떤 모습도 놓치기 싫었다.  


    

 문득 나는 그녀의 이름이 궁금해 운전수에게 물었다. “암드록쵸 호수요” 아, 아, 이곳이 암드록쵸 호수구나. 한국에 있을 때 티베트에 가게 되면 꼭 가보고 싶다고 지도에 별표까지 해두었던 곳이다. 그래, 이제야 기억났다. 내가 너를 한국에서부터 ‘찜’ 해두었구나.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나 보다. 암드록쵸 호수는 남쵸 호수, 마나사로바호수와 함께 티베트 3대 성스러운 호수로 불리는 곳이다. 지대는 4,482m로 설산의 눈이 녹아 만들어진 호수이다. 우리는 차를 타고 조금 더 가까이 갔다. 가까이서 본 호수는 잔잔한 파도를 만들었다. 아아 정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너무 욕심인 것은 아닌가, 이 모든 것을 한 나라가 갖고 있기에는. 어딘가에 속하지 않을 순 없었을까.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의 품에서 황홀한 시간에 홀렸다. 


 만의는 줄곧 힘들어 보였다. 올라오기 전에 산소를 두 캔 사 왔는데 모두 사용했다. 그것도 모자라 한 캔을 더 사고도 부족했다. 만의는 정말 숨을 쉬지 못했다. 한 마디를 하고 나면 숨이 차서 헐떡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 이만 그녀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내 평범한 일생에서 그녀를 한 번이라도 본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탔고 만의는 곧바로 잠에 들었다.  

밤이 어둡고 우리는 호텔로 도착했다. 기사에게 좋은 곳을 소개해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 계획은 만의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것이었지만, 만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머리가 아프다고,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만의는 감기약과 고산약을 먹고 누워 이불을 세 겹이나 덮었다. 나는 내게서 감기가 옮은 것은 아닌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혼자 

 다음날, 우리는 가이드와 아침 10시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일찍 일어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려는데 만의가 내게 말을 했다. “형, 저 몸이 너무 아파서 오늘 못 갈 것 같아요.” 이것을 듣고 나는 꽤나 실망했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그래도 같이 가서 보고 왔으면 했다. 여기까지 와서 가이드랑 둘이 다닐 생각을 하니,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는 알겠으니 쉬라고 하고 혼자 나왔다. 상상도 못했다, 티베트를 혼자 여행하게 될 줄은. 약속시간이 넘었지만 가이드가 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20분이 지나고서야 가이드가 도착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고, 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가이드와 둘이 라싸 여행, 아니 투어를 시작했다.  


 첫 투어 장소는 티베트 라싸에서 가장 유명한 ‘포탈라궁(Potala Palace)’로 갔다. 포탈라궁은 티베트 전통건축으로 해발 3,600m에 위치하고 있다. 17세기에 지어진 궁전은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건물이었고, 달라이라마의 거처이기도 했다. 포탈라궁은 하얀 건물이 빨간 건물을 받치고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하얀 부분은 정치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고 빨간 부분은 종교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 빨간 건물 안에 있었다. 새벽 5시면 티베트인이 전부 거리로 나와 한 손에는 염주 한 손에는 마니차를 돌리며 줄줄이 포탈라궁 주변을 도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포탈라궁에 도착하고 가이드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에게 돈을 주었다. 나는 그저 친구끼리 만난 모양이라 생각했는데, 가이드가 여기부턴 저 친구를 따라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굉장히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로 내게 “Hello”라고 인사했다. 나이가 마흔도 넘어 보이는 이 친구는 인상이 매우 좋았다. 내게 인사할 때 주름이 익숙한 자리를 찾아가 선한 미소가 지어졌다. 첫눈에 봐도 좋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친구와 가는 편이 더 좋았다. 나는 가이드에게 인사하고 포탈라궁으로 들어갔다. 이 친구는 내게 어색하고 굉장히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로 이것저것 설명해주기도 하고, 나를 찍어주기도 했다. 마흔이 넘은 형님을 귀엽게 느끼면 안 되지만, 나를 보고 웃는 모습에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나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게 해서는 안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까 그 가이드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셔 오늘 힘들어한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추어졌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늦게 온 것이고, 지금 숙취로 힘들어서 이 친구에게 돈을 주고 나를 넘긴 것이다. 정말 책임감이라고는 없는 지독한 새끼였다. 기분이 상당히 상했지만, 이 친구의 순수함에 다 잊어버리고 투어를 즐기기로 했다.  


 포탈라궁 내부를 돌아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티베트 불교의 신비한 역사와 웅장한 불상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 적고 싶다. 이 친구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나는 이 친구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종교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느꼈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내게 무언가 설명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다른 투어 그룹은 10-20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빠르게 지나가는데 비해, 이 친구는 나를 붙잡아두고 내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했다. 덕분에 설명을 두 번 세 번 들어가며 대부분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따금 그는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웠다. 티베트인이 신성하게 여기는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인데, 도대체 누가 이곳에 쓰레기를 버린단 말인가. 이 친구는 대부분 중국인이 버린 쓰레기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한번 오고 가면 쓰레기가 항상 이렇게 쌓인다고, 성수기에는 쓰레기가 말도 못 하게 많다고 했다. 이후로 이 친구와 나는 같이 쓰레기를 주웠다. 우리는 거의 투어 반, 쓰레기 줍는 일 반이었다. 내가 설명을 듣느라 쓰레기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면, 이 친구는 그것을 보고 쓰레기부터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포탈라궁 투어는 두 시간이 지나고 끝이 났다. 밖에서 가이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어땠냐고, 포탈라궁 앞에서 같이 사진을 찍자는 것이다. 내키진 않았지만 나는 먼저 가이드와 사진을 찍고, 이제 가자는 그를 잡아 이 친구와 나를 찍어달라고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기분 좋아지는 순수한 친구였다.  



 가이드는 나를 데리고 투어를 시작했다. ‘조캉사원’이라는 곳을 가는 투어였는데 이곳은 석가모니상이 안치되어 있어 티베트인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장소이다. 입구 밖으로는 티베트인이 줄지어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사원 안으로 들어가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확실히 그 친구보다 영어는 잘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다가 가이드는 내게 사진 찍을 시간을 주겠다며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을 했다. 그 친구는 내가 사진을 찍을 때면 옆에서 웃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라싸의 구시가지로 갔다. 걸어서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구시가지를 걸으며 그는 줄곧 핸드폰을 봤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 상점에 들어가 구경하라고 했는데, 딱 우리나라의 가이드가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충 둘러보고 나왔는데 역시나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이 친구가 없으면 돌아다닐 수 없으니 그냥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차로 데리고 가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했다. “OK! 투어는 끝났다.” 뭐? 시간을 보니 고작 오후 네 시, 그러니까 6시간의 투어에 160만 원을 지불한 것인가? 게다가 너는 아침부터 늦었고 심지어 포탈라궁은 너랑 돌지도 않았다. 너와는 고작 ‘조캉사원’에 들어갔다 와서 구시가지를 30분 걸은 것이 전부란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자식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 투어를 여기서 마쳤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면 만의는 누워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포탈라궁의 야경을 보러 갈 수도 없었고, 그냥 이대로 자다가 내일 네팔로 가는 것이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기분만 계속 나빠졌다. 나는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세게, 더 세게, 나중엔 쾅쾅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자 나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안에서 쓰러져 버린 것은 아닌가? 어디로 갈 만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나는 만의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로 받았다. “너 어디야?” “형, 저 너무 아파서 병원에 왔어요” 나는 순간 화가 났다. “만의야, 병원에 가면 나한테 연락이라도 하나 남기고 갔어야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나저나 그 정도로 힘들었구나. 나는 일단 만의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어떤 방으로 들어가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치료를 받고 있었고, 저쪽에서 만의가 링겔을 맞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가서 앉아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고산폐수종. 급성 산악병중 하나인 이것은 4,000미터 이상 등반 시 100명 중 1명꼴로 발병한다고 한다. 산소가 부족해 폐에 물이 차는 병으로 급격히 악화되면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는 입원을 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했기에 그러진 않았다. 나는 만의 옆에 앉아 잠에 들었다. 


 치료를 받고 돌아와 만의는 숙소를 바꾸어야겠다고 했다. 도저히 숨쉬기가 힘들어 산소공급이 되는 호텔로 바꾸자고 했다. 우리는 밤 9시 즈음 짐을 싸서 산소공급이 되는 호텔로 옮겼다. 여행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새로운 호텔로 들어와 짐을 풀고 누웠는데, 만의는 그래도 숨쉬기가 힘들다고 호텔 로비에 전화를 해서 무언가 요청했다. 그러자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몸통만한 산소통을 수레에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만의가 눕고 그 남자는 코에 산소호흡기를 끼어주었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산소가 공급되었고, 그제야 만의는 잠에 들었다.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여행 참, 다사다난하다. 혼자 여행할 때가 외롭지만 마음은 제일 편하다. 그렇게 나도 잠에 들었고, 기대했던 티베트 여행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 중국을 마치며 

 2017년 11월 9일, 한국 인천항에서 출발해 10일 중국 칭다오에 도착했다. 이후로 지난, 시안, 쫑웨이, 스쭈이산, 란저우, 둔황, 청두, 캉딩, 다오청, 야딩, 충칭을 지나 티베트 라싸를 마지막으로 중국 여행을 마쳤다. 지난 49일간의 중국 여행을 뒤돌아 생각해보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면 하루하루 온전히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칭다오에서 환전을 하지 못해 며칠을 굶었고, 지난에서 기차표 때문에 이제는 창구 여직원만 봐도 겁에 질린다. 시안에서 친구들의 과한 친절에 의심을 품었었고, 란저우에서는 룸메이트들이 방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며칠간 담배연기 속에서 살아야 했다. 둔황에선 지독한 외로움을 맛보았고, 청두에선 노트북이 부서져버리는 비극을 겪었다. 충칭에서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으며 기대했던 티베트 여행은 완전히 말아먹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오히려 그것들로 인해 내 여행의 이야기가 참 많아졌다는 것은 재미있는 모순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고작 월급 한 번 받을 수 있는 짧은 기간이지만,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티베트 라싸 국제공항에서 하루에 한 편 있는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네팔에 왔다. 공산국가로에서 벗어난 나는 사소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느꼈다. 그동안 막혀서 사용하지 못했던 핸드폰의 모든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길거리에 보이는 환전소에 가서 5분 만에 환전을 마쳤으며, 위조지폐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택시기사, 슈퍼 아줌마, 지나가던 꼬맹이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할 줄 알고, 의사소통의 자유로움에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다만 이곳도 문제가 많긴 하지만, 중국에서 지내던 때에 비해 많이 자유로워진 것은 정말 좋다. 내게 중국은 애증이다. 떠올리자면 고개를 절레절레하지만, 언젠가 분명히 다시 찾을 곳이 중국이다.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중국에서, 부디 다음에 중국에 찾을 때는 많은 것이 변해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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