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ABA PROJEC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BAJUNG Apr 16. 2018

BABA PROJECT – 네팔 카트만두

 바바프로젝트의 두 번째 여행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Kathmandu)에 도착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들어서자 수백의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그토록 찾던 여행자들은 전부 여기에 모여있는 듯했다. 일단은 눈과 귀가 즐거웠다고 할까, 나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비슷한 가방을 메고 같은 곳을 향했다. 여기서도 한국인은 나 밖에 없었지만 이방인이라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네팔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공항에서 도착비자를 받아야 한다. 나는 비자를 받고 네팔에 입국하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비자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은 너무도 많은데, 공항의 일 처리는 몹시 느렸다. 네팔에 왔음을 실감했다. 공항을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택시기사들이 호객을 했다. 중국에서 49일, 허투루 있던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적당히 무시하다가 툭 던지는 말투로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그렇게 서넛의 기사와 흥정하다 보면 이곳의 물가가 얼추 계산된다. 그렇다면 이제 거기서 조금 더 낮춘 가격을 제시하여 기사와 흥정하는 것이다.  



 카트만두의 길거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난장판이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가끔씩 보이는 신호등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대부분은 꺼져있었다. 머리 위로는 수백의 전깃줄이 빗에 엉킨 머리카락처럼 엉켜있었고, 심지어 몇 줄은 끊어져 내 머리 근처에서 달랑거렸다. 오토바이, 차, 자전거가 질서 없는 경주를 했고,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은 몸부터 들이밀어 차를 멈추었다. 거리는 온통 흙먼지가 날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입에 흙 가루가 씹혔고,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 렌즈가 금세 노래졌다. 사방에서 빵빵대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고, 오토바이가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 떠오르는 이유는 없지만, 이것이 좋았다. 뭐랄까, 오히려 이런 질서 없는 어지러움이 이제야 나를 자유로운 여행자로 느끼게 했다.  


 나는 숙소를 찾지 못하고 길거리를 배회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관광이 주 수입원인 네팔은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여행자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네팔리(Nepali)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모든 국민이 기본적으로 영어를 하거나 혹은 매우 잘한다. 나는 아무나 잡아가며 길을 물었는데, 골목의 슈퍼가게 아줌마마저 내게 길을 설명해주었다. 이곳이라면 정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웃 간 서로 참 가까운 네팔 사람들은 “엘브러스홈(숙소이름)이 어디예요?”라고 물으면 “저쪽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옛 풍경에서, “김씨 아저씨 집이 어디예요?”라고 물으면 대답해주는 것 같이 말이다. 나는 주민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숙소를 찾았다. 6인실 방에 들어가자 침대 한 자리가 어지럽혀 있었는데, 이곳이 사장이 말한 일본인의 자리인 모양이었다. 나는 누워서 그 친구와 서로 바라볼 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누워서 쉴 때만큼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첫날은 딱히 한 것이라곤 없었다. 그저 거리를 쏘다니다 식사를 했을 뿐이었는데, 금세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12월 말, 카트만두의 밤은 꽤 쌀쌀했다. 나는 아무래도 도착한 날부터 밤에 돌아다니기가 조금 무서워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있는데 일본인 친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친구는 곧바로 침대에 앉아있는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고 굉장히 마른 친구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새카맸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짧은 대화를 했다.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33살의 이 친구는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곳을 여행했고, 일본에서도 등산을 즐기는 친구였다. 내가 앞으로 갈 나라를 이야기하면 “나도 거기 다녀와봤는데”라며 겸손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이 친구의 겸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게 건네는 한 마디의 말에서 배려가 느껴졌고 조금도 자랑이나 허세가 없었다. 이런 친구와 대화를 할 때면 오히려 내가 더욱 말이 많아져 버린다. 친구는 이윽고 내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잠깐 샤워하고 와도 될까?” 그렇게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이 밝았고, 일본인 친구는 굉장히 부지런했다. 나는 일어나고 친구의 침대를 흘깃 보았지만 헝클어진 이불뿐이었다. 나는 할 일이 많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바로 인도로 가야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미리 인도 비자를 받아야 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들고 카트만두에 있는 인도대사관에 찾아갔다. 이미 여러 명의 서양인이 있었고 일본인도 두 명 보였다. 나는 번호표를 뽑고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어떤 사람은 성공적으로 비자를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주 어두운 표정을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곧 내 차례가 왔다. 서류 준비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기 때문에 한 번에 성공하길 간절히 바랬다. 철 창살 안에는 뚱뚱한 인도 여자가 앉아있었고, 나는 준비해온 서류를 그녀에게 아주 공손히 건넸다. 누구라도 대사관에 찾을 때면 겸손해지는 법이다. 그녀는 내 서류를 뒤적이고는 어느 부분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부분이 맞을 것이다. 


 인도 비자 신청서에는 직업란이 있다. 나는 직업을 써야 하는 경우에는 보통 ‘학생’이라고 적곤 했는데, 여기에는 학생이라고 쓰면 학교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적어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적지 않으면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혹 직업을 쓰더라도 직책, 주소, 회사 전화번호 등 자세한 사항을 쓰게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그저 ‘여행만’하는 사람을 위한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 회사에 BABAJUNG, 직업에 TRAVEL WRITER, 집 주소, 그리고 한국 전화번호를 적어서 제출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부분이 지금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바바정이 무슨 회사야?” 나는 “아, 글을 올리는 사이트 이름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니까 바바정이 무슨 뜻이냐고”라며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실대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은 내 이름이고, 바바는 별 의미 없이 내가 지은 거야. 그리고 난 거기에 여행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어” 그녀는 다시 매우 짜증스러운 말투로 “그래서 이게 네 닉네임이라는 거야?”라고 했고 나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서류를 내게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지워, 바바정” 나는 까만 펜으로 바바정을 ‘찍-‘그어 지워버렸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비자 인터뷰에 통과할 수 있었고, 무사히 다음 여행지를 확보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는 앞으로 5일 후에 비자를 받으러 다시 대사관으로 가야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기보단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 와서 비자를 받으러 가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긴장이 풀리고 배가 고파져, 근처에 보이는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아줌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나마스테”라고 인사했다. 나도 기분 좋게 인사하고 씩씩하게 메뉴를 세 개나 골랐다. 항상 보면, 식사 양이 적어 세 개는 먹어야 배가 찰 것 같았다. 한 명의 손님을 받고 음식을 세 개나 팔게 되었으니, 주인 부부는 나를 보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주문을 마치고 앉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참 느긋한 네팔 사람들은, 음식을 주문하면 그때부터 밥을 짓기 시작했다. 네팔의 전통음식인 모모(MOMO,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한 음식)를 시켰는데, 그때부터 피를 빚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급하다고 다그쳐도 소용없다. 네팔을 여행한다면 먼저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다음 할 일을 하러 여행자센터로 향했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에는 ‘안나푸르나’라는 산이 있는데, 그 주변을 도는 유명한 트레킹 코스가 있다. 사람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4일 정도가 소요되고, 차량을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상정보를 등록하고, 입장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입장 허가증은 간단하게 입장료라고 생각하면 되고, 신상정보를 등록하는 과정은 혹시 모를 사고를 위한 것이다. 나는 바쁠 것도 없고 네팔에서 어떻게 버스를 타는지도 몰라 여행자센터까지 천천히 걷기로 했다. 카트만두의 거리는 정신없지만 어딘가로 걷는 이에게는 재미있는 요소가 많았다. 길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무언가 팔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저렇게 해서 언제 저걸 다 팔려나”하고 괜한 관심이 생겼다. 네팔의 군인들이 연병장에 오와 열을 맞추고 줄지어 서있었는데 어찌나 허술해 보이던지. 햇빛에 그을려 까매진 발 등에 신발을 신지 않아 발바닥이 먼지로 하얘진 여자아이는, 외계인이라도 보는 마냥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길을 걸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실감 나는 네팔 영화를 한 편 마치고 나는 여행자센터에 도착했다. 많은 서양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신청서를 쓰고 있었고, 나도 그 옆으로 앉아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입장 허가증을 받고 신상등록까지 마쳤다. 생각 외로 걱정하던 모든 일이 쉽게 풀렸다.  



 다음 날 아침, 일본인 친구는 도쿄로 떠났다. 부지런한 친구는 떠나는 것도 빨랐다. 네팔 카트만두의 볼거리라 하면 역시 대부분이 사원이다. 사원은 중국을 지나오며 지겹도록 봐온 터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카트만두에서 남은 하루를 장식할 무언가 필요했다. 어디를 다녀오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원숭이가 보고 싶어졌다. 약 2000년 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어 카트만두 시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새로운 마을에 오면 높은 곳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어울려 있던 마을을 한눈에 보는 것이 좋고, 지리를 익히기에도 매우 좋다. 그러나 내가 이 사원을 찾은 진짜 이유는 야생 원숭이 때문이었다. 스와얌부나트 사원 일대는 야생 원숭이의 집단 서식지다. 동물을 좋아하는 나에게 야생 원숭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역사적인 의미보다 중요했다. 이곳을 스와얌부나트라고 부르는 여행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몽키템플(Monkey Temple)’이라고 부른다.  


 오후가 되니 가방을 멘 어깨가 땀으로 젖을 만큼 더웠다. 사원 입구에선 소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었다. 한 계단씩 올라 사람들이 모인 곳에 이르자 수십 마리의 원숭이가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끼 원숭이들은 서로 장난치며 뒹굴고 있었고, 어떤 새끼 원숭이는 엄마 밑에 꼭 붙어 다녔다. 어떤 원숭이는 눈을 마주치자 ‘쌕- 쌕-‘하는 소리를 내며 공격적이기도 했고, 어떤 원숭이는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찍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두 다리를 잃어 앞 발로 물구나무를 서서 다니는 원숭이도 있었는데, 그렇게 보는 내가 무색할 정도로 매우 잘 걸었다.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이르렀지만, 나는 사원이나 시내를 내려보기보다는, 원숭이만 따라다녔다.  


 저녁식사는 미리 생각해둔 곳이 있었다. 카트만두에 있는 ‘대장금’이라는 한국식당이었다. 한식이 그리워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여행을 출발하기 며칠 전 남자승무원 동갑내기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잔을 기울이며 앞으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한 동기가 내게 이야기했다. “정아, 혹시 카트만두에 가게 되면 ‘대장금’이라는 곳에 가봐, 네팔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한국식당인데 나랑 친분이 깊은 곳이야.” 그리고는 ‘대장금’이라는 이름도 자기가 지은 것이고, 간판도 자기가 직접 디자인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연락이 끊겨버렸고, 사장님이 잘 지내시는지 아직 장사는 잘 하고 계신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었고, 그래서 사장님을 찾은 것이었다. 저쪽에서 키가 작은 한 네팔 사람이 매우 한국적인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정말 한국인의 미소였다. 피부색과 생김새만 달랐을 뿐 얼굴의 모든 근육이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한국말로 인사했고, 사장님도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에 답했다. 나는 동기의 사진을 보여주며, 명을 받아 대신 안부인사를 전해드리러 왔다고 했다.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사장님은 나를 데리고 어느 게시판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동기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3년 전 동기가 카트만두에 와서 사진 한 장을 드리고 갔는데, 그것을 아직도 보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진 위에는 L.O.V.E라고 적혀있었다. 동기는 자기가 적어 드린 것이 아닌데, 누가 적은 것이냐며 웃었다. 나는 사장님과 동기를 연결시켜주었다. 마치 오래전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는 듯 내가 설렜다. 둘은 오랜 세월을 건너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옆에서 흐뭇하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사장님이 내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메뉴를 보지도 않고 된장찌개를 골랐다. 메뉴의 그림에 손가락질을 하며 음식을 시키지 않은 것이 얼마만인지. 네팔 현지 직원들이 주방에서 부지런히 뚝딱뚝딱하더니 내게 먼저 김치를 가져왔다. 네팔에서 현지인이 만든 김치가 맛있어 봐야 얼마나 맛있을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는 된장찌개가 나오기 전에 먼저 김치를 먹었는데, 오랜만에 김치의 맛을 본 혀의 모든 감각이 짜릿했고 침이 고였다. 그리고 이어 된장찌개가 나왔는데, 이 맛이었다. 나는 된장찌개의 소중한 국물 한 모금 한 모금을 최대한 음미하며 아껴먹었다. 너무 아껴먹은 탓에 밥은 한 공기를 다 비워버렸지만 된장찌개는 반이나 남았다. 사장님은 비워진 밥공기를 보고 얼른 주방으로 가서 한 공기를 더 가지고 와서 말했다. “많이 먹어요” 나는 코를 다시 된장찌개로 파묻었다. 순식간에 두 공기를 깔끔하게 비우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배를 어루만지며 “아, 잘 먹었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여기까지가 한국인의 진정한 ‘식사’라는 것을 한 것이다. 찬물 한 잔을 마시고 사장님께 잘 먹었다고 인사했다. 인자한 미소는 여전히 입가에서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나는 계산을 하려고 했지만, 사장님은 극구 말렸다. 때로는 얻어먹는 것도 예의일 때가 있다. 나는 사장님께 다시 찾아뵙기로 약속하고 허리를 90도로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내가 나올 때 식당은 거의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꽉 차있었고, 나는 흐뭇하게 숙소로 돌아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BABA PROJECT – 티베트(TIBE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