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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17. 2018

ANNAPURNA CIRCUIT TREKKING, #1

# 포카라(Pokhara)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버스에서 보낸 7시간, 이제는 어쩐지 모자랐다. 이곳에는 잘 알려진 한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한국인들은 트레킹을 하기 전 이곳에 모여 정보를 얻거나 장비를 빌려가기도 하는데, 나는 이곳에 들러 얻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얻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인이 그립기도 했다. 한가하고 고요한 페와(Phewa) 호수 곁으로 하얀 건물이 하나 있었다. 훤히 뚫린 입구로 익숙한 생김새 몇 명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사람의 얼굴이다. 그 사이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내가 미리 연락해놓은 게스트하우스 주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사람은 사는 곳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지, 그의 표정은 한적한 페와 호수만큼이나 여유로웠다. 그는 곧 내게 ‘안나푸르나 서킷 트레킹(Annapurna Circuit Trekking)’에 대해 설명해주고,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아무거나 집어가라고 했다. 신발장 옆으로 커다란 포대자루 몇 개가 있었는데, 안에는 겨울 옷이며 장갑, 모자, 양말 등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제육볶음을 휘저어 고기만 골라내듯, 포대자루를 뒤져 필요한 것들을 골랐다. 그렇게 나는 조금 두꺼운 양말 세 켤레, 스틱 한 쌍, 뜨거운 물을 담을 수 있는 물통, 챙이 넓은 모자, 등산화 한 켤레 그리고 무릎 보호대를 빌렸다. 막상 가져가라고 멍석을 깔아주니, 무엇을 가져가면 좋을지 몰랐다.  


 나는 그에게 이곳이 참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좋다고, 그리고 그 동안은 중국에서 거의 혼자 지내왔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오늘 저녁에 보쌈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혹시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고, 나는 제안을 덥석 물었다. 한국인들과 함께 보쌈파티라, 네팔이 점점 좋아졌다. 나는 저녁을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호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한 여자가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왔다. 그녀는 주인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주인은 내게 “허정씨, 이분도 내일 트레킹 가는데, 둘이 가는 길이 같아요. 그러니 내일 같이 가요”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동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내게도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좋았다. 나는 그녀와 인사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6시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저녁시간이 됐다. 테이블 몇 개를 붙여 20명도 넘게 앉을 수 있는 커다란 하나의 만찬 테이블이 만들어져 있었다. 달마시안의 점박이 무늬마냥 사람들이 둘 셋씩 무리 지어 듬성듬성 앉아 있었고,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친해 보였다. 나는 그들 사이에 조심스레 끼어 앉으며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리 한국사람들 사이라고 해도, 이런 자리는 몹시 어색했다. 나는 한참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이따금 사람들이 잔을 채워주며 말을 걸어왔다. 매우 인상적인 것은 세계여행자가 꽤 많았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 둘은 한국에서 떠나온 지 3개월즈음 됐다고 했는데, 태국에서 만나고 마음이 맞아 네팔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여행을 매우 좋아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장기여행자는 아니었지만 정말 안 가본 나라가 없었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던, 그리고 사투리를 아주 구수하게 쓰던 두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는데, 이제야 회사를 그만 두고 일 년간 세계여행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어떻게 그런 어려운 선택을 하고 나오셨어요?”라고 물었는데, 내가 “아시잖아요”라고 대답하자, 방긋 웃으며 “알죠”라고 했다. 이곳은 한국에서는 꽤나 드문, 어려운 선택을 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고 이야기가 무르익자, 나는 차라리 돌아가 자고 싶었다. 이미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내게 정보를 주려는 건지, 자기자랑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힘들고 어려웠던 것을 자기에게 맞춰 내게 말했는데, 나는 “당신이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는 거에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느낀 것과 내가 느낄 것은 분명히 다를 것인데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겸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듣기 싫은 것 혹은 나를 걱정하는 척 하며 하는 자기 모험담은 웃으며 흘려 보내고, 정말 필요하겠다 싶은 것들만 새겨들었다. 세계를 떠도는 그들은, 서로 자기가 다녀온 곳이 굉장하다고 자랑하기 바빴다. 누군가 스페인이 굉장했다고 말하면, 그것을 듣고 절대 끼어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누군가 “아, 거기 그거 맛있는데”라며 꼭 다녀온 티를 냈다. 나는 정말 그것들을 옆에서 듣고 있자니, 진절머리가 났다. 한국사람들이 그리워 참여한 자리였지만, 역시나 이들이 모여 하는 대화라고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였다. 나는 말을 아꼈다. 이들의 자기자랑을 듣고 있는 것만도 이토록 괴로운데, 대답도 간신히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마음이 맞는 몇 사람과 가벼운 대화를 주고 받으며 조용히 돼지보쌈만 집어 먹었다. 그나저나 보쌈은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다음 날 새벽 6시, 나는 약속 장소로 갔고 곧 그녀도 왔다. 그런데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포대자루를 뒤져 찾은 트레킹화가 엄지발가락이 기억 자로 접힐 정도로 작아 도저히 이것을 신고 산에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출발 전에 이것을 반납했다. 주인은 내 신발을 보더니 “그걸론 안 되는데”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런닝화를 신고 있었다.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들어진 런닝화는 험난한 산행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에 눈이나 비를 맞기라도 한다면 발가락이 동상에 걸려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별 도리가 없었다. 새벽시간이라 신발을 살 수 있는 곳도 없었고, 더욱이 파는 곳이 있다고 해도 비싼 트레킹화를 사기에는 부담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가는 길에 신발가게 보이면 사서 갈게요!”라고 하고 그곳을 떠나왔지만, 사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녀와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버스로 옮겨 탔다. 그리고 우리는 4시간동안 베시사하르(Besisahar)로 가는 것이었다.  



# 베시사하르(Besisahar, 820m) 

 버스는 매우 허름했다. 문은 자동이 아니었고 남자승무원이 직접 문을 열고 닫았다. 말이 승무원이지, 그저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젊은 네팔친구였다. 정류장이 따로 없는지 버스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문을 활짝 열고 호객을 해댔다. 심지어 가끔은 승무원이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마을을 휘저으며 호객을 하다가, 손님이 없으면 다시 달리는 버스로 뛰어들어왔다. 이따금 버스에 타겠다는 손님이 있어도 버스는 멈추지 않았다. 버스는 그저 속도를 줄일 뿐, 천천히 달리고 있으면 손님이 알아서 버스에 뛰어 올라탔다. 버스는 어느새 꽉 찼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손님을 태웠다. 도로에서 큰 트럭 한 대가 버스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버스기사는 경적을 요란하게 울렸고, 그래도 트럭이 비키지 않자 승무원이 달리는 버스 문을 열고 몸을 바깥으로 빼내어 트럭 기사에게 나오라고 소리쳤다. 트럭이 옆으로 살짝 비키자 버스는 역 주행을 하며 트럭을 지나쳤고, 승무원은 기사를 향해 뭐라고 한 번 더 소리쳤다. 덕분에 베시사하르로 가는 네 시간이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볼거리가 있어 오히려 웃으면서 왔다. 오후 1시, 버스는 베시사하르에 도착했고, 우리는 지프(Jeep)를 타고 4시간을 더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는 버스 안에서 그녀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2살 어린 그녀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그래서 연수에 들어가기 전까지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 혼자 히말라야에 등산하러 오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사는 곳을 물었는데, 강원도 원주에 산다고 했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많은 그녀는 짐도, 정보도 정말 한 보따리였다. 나는 그녀가 이미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인 줄 알았다. 트레킹에 대한 모든 정보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필요한 것들이 전부 배낭 안에 있었다. 가냘픈 그녀가 들기에 온갖 것이 들은 배낭은 너무도 컸는데, 그래서 그녀는 ‘포터’를 고용했다. 포터란 쉽게 말해 ‘짐을 대신해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녀가 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산을 타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포터가 대신 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포터는 모든 여정을 따라다니며 그녀를 보좌하고 가이드역할까지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셋이 함께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베시사하르에서 점심을 먹고 나는 지프기사들과 흥정을 했다. 네팔사람들은 일단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고, 나도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다. 그렇게 서로 흥정을 해가며 적정선을 찾아 지프를 구했다. 우리는 이것을 타고 4시간을 산 속으로 올라가 트레킹 시작지점인 참제까지 가야 했다. 그렇게 잡은 5인승 지프에 총 8명이 올라탔다. 운전석 1명, 보조석 2명, 뒷좌석 4명 그리고 트렁크에 1명이 한 차에 탔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기사는 우리 셋을 받고 추가로 4명의 손님을 더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들이 지금껏 살아온 생활방식이므로, 우리는 군말 없이 갔다. 지프를 타고 오르는 산길은 매우 거칠기로 유명하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기사는 운전석에 오르고 들썩이는 네팔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지프는 엄청난 힘으로 달렸는데, 기사는 여전히 무표정의 순진한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놀이기구를 타는 마냥 재미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릴 수 없이 흔들렸다. 롤러코스터를 네 시간 동안 탄다고 하면 이해가 조금 될 것이다. 크고 작은 돌이 가득 박힌 산길을 오르며 차는 미친 듯이 요동쳤고, 이에 따라 내 몸도 이리저리 튕겨져 나갔다. 가끔 벽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고, 엉덩이가 의자로부터 떨어질 정도로 높이 떠올라 천장에 머리를 박고 목이 꺾이기도 했다. 그렇게 네 시간을 차에서 잡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쥐어 잡고 매우 경직된 상태로 왔다. 지프에서 내리자 온몸이 뻐근했고 특히 어깨와 목이 아팠다. 그녀도 어깨를 부여잡으며 목이 아프다고 했다. 우리는 시작도 전에 만신창이가 됐다. 



#1 – 참제(Chamje, 1,430m) 

 우리는 이윽고 드디어 참제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하다 보면 중간중간에 작은 마을들이 형성되어있는데, 힘들거나 해가 질 것 같으면 롯지(Lodge)에서 쉬거나 하루 묵어갈 수 있다. 롯지는 우리나라의 ‘산장’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제는 그 중 초입부근에 있는 마을로,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롯지를 골라 들어왔다. 안에는 프랑스인 남자 두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건너편 롯지에는 영국인 남자 두 명, 그리고 한국인 노부부가 있었다. 우리는 몹시 배가 고파서 짐을 풀자마자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뭐가 많기도 했는데, 이런 산 속에서 이것들을 만들어 준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녀는 계란볶음밥을, 나는 네팔 전통음식인 ‘달밧(Dal Bhat)’을 주문했다. 달밧은 커다란 접시 가운데 밥이 나오고 주변으로 국, 감자, 절인 야채 등이 함께 나오는 음식이다. 내가 달밧을 시킨 가장 큰 이유는 밥을 무한으로 제공해주기 때문이었다. 돈 없고 많이 먹는 욕심 많은 내게 딱 맞는 음식이었다. 한국 쌀과 다르게 밥알이 한 톨씩 휘날렸지만, 배고파서 그런지 맛은 끝내줬다. 그리고 나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는데, 한참을 물을 틀고 기다렸으나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산속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듯 했다. 도시에서 벗어난 산속의 기온은 뚝 떨어져 추웠고, 어디서도 불빛 하나 없어 매우 어두웠다. 롯지의 분위기는 우중충하고 침침했다. 조용한 나무산장에선 이따금 설거지하는 소리와 삐그덕거리는 나무판자 밟는 소리, 그리고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소리만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녀와 나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이런 곳에 나 혼자였다면 외로웠을 텐데, 대화상대가 있다는 것이 매우 큰 위안이 됐다. 심지어 이 날은 2017년 12월 31일, 한국은 2018년 1월 1일로 넘어갈 준비가 한창이었다. 거의 되지 않는 인터넷을 부여잡고 한국과 분위기를 함께 느껴보려 애썼지만, 사실 거의 포기상태였다. 이따금 연결에 들떠 메시지를 확인해보면 벌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자를 서로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왠지 더욱 서글퍼졌다.  


 COUNT DOWN, 5 4 3 2 1. “땡, 땡-“ 아마도 한국은 굉장히 시끄러웠을 것이다.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 함께 집에 있던 가족들, 그리고 함께 있던 누군가와 서로에게 새해 복을 기리며 축하하고 술잔을 맞대었을 것이다. 그런 세계인의 축제 중에 나는 네팔의 깊은 산 속, 어두운 산장에 있었다. 심지어 한국이 2018년 1월 1일 00:00되던 시간, 모두들 환호하며 폭죽을 터트리고 잔을 맞대던 그 시간에 이곳은 8시 45분. 그저 아무것도 아닌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한국은 종쳤네요.” 그러자 그녀는 “그래요?”하고 대답했다. 여전히 어둡고 추웠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옆에서 떠들고 있는 프랑스인들과 동질감을 느끼기에, 그들의 고향은 아직 새로운 해를 맞이하지 않았다. 8시 45분은 나와 그녀에게만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의 새해는. 무언가 다짐 같은 것을 빌어야 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준비된 빌 것도 없었다. 그저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어떻게 산을 올라야 할 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옆에 한국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 그녀마저 없었다면 나는 아마 방에서 혼자 울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의미 있는 새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잠든 사이, 조용히 네팔의 새해도 스쳐 지나갔다.  



#2 – 바가르샤합(Bagarchhap, 2,160m) 

 2018년 1월 1일 아침 7시, 식사 후 본격적인 트레킹 채비를 했다. 우리는 참제를 출발하여 딸(Tal)과 다라파니(Dharapani)를 거쳐 바가르샤합(Bagarchhap)까지 가기로 했다. 그녀와 포터 그리고 나, 우리 셋은 배낭을 단단히 매고 첫 발을 내디뎠다. 산속 아침의 공기는 매우 찼다. 바닥이 얼어있는 것을 보니, 밤새 온도가 영하까지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꽤나 들떴다. 어제의 씁쓸한 기분은 사라졌고 새해 아침의 산행이 산뜻했다. 커다란 배낭을 질끈 메고 터벅터벅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는 내 모습, 정말 세상을 씹어먹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급경사를 만났고, 우리는 오르는 동안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르고 올라도 고개를 위로 들어보면 오르막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고, 나는 입고 있던 패딩자켓을 가방에 넣어버렸다. 어느 정도 오르다 우리는 한 지점에 멈추어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짊어 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 나는 그냥 배낭을 맨 채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한숨을 푹 쉬며 주변을 둘러보니, 높기만 했던 산들이 어느새 나와 눈을 마주치는 높이에 있었다. 꽤 높이 올라온 듯 했지만, 여전히 오르막길은 계속해서 이어져있었다. 흐르던 땀이 차가운 바람을 만나 식으며 몸에 있던 열기를 빼앗아갔다. 그러자 이내 몹시 추워졌다.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고산에서 감기는 곧바로 고산병으로 이어질 수 있어,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쉬고 있는데,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프랑스인 두 명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왔고, 금새 우리를 지나쳐 갔다.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이들이 성큼성큼 무서운 속도로 지나치니, 왠지 모르게 조급해졌다. 자존심이 조금 상한 것도 같다. 그리고 이들은 이내 모습을 볼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형형색색 알록달록 칠해진 롯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Tal)에 도착한 것이었다. 마을이 정말 아기자기 아름다웠다. 티베트양식의 건물이 많았는데, 분홍색, 주황색등 여러 가지 어여쁜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커피를 한 잔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장 예쁜 롯지를 골라 들어갔다. 시내와 꽤나 떨어진 곳이라 전기와 물이 귀해서인지, 물가가 꽤 올라있었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어딜 가나 주던 뜨거운 물을 여기선 찬물보다 비싼 가격에 팔고 있었다. 우리는 롯지의 마당에 있는 노란 나무 의자에 앉아 따듯한 커피를 마시며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트레킹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는데, 그 중 대부분이 서양인이었다. 조금 아쉽긴 했다, 동양에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더 많다는 것이 말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어렵사리 2주정도 장기휴가를 받으면 보통 미국이나 유럽, 서양에 있는 국가로 떠난다. “이번 휴가에 어디에 다녀왔어?”라는 질문에 “네팔에 다녀왔어”보다는, “스위스에 다녀왔어”가 더욱 으쓱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제서야 휴가를 다녀왔노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에 가야,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가 네팔에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산다. 융프라우(Jungfrau)가 스위스에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말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했다. 이제야 알았다. 왜 산을 타는 것이, 걷는 것이 좋은지 말이다. 온갖 잡생각이 없어졌고, 그저 걸을 뿐이었다. 시간은 오후 2시, 앞으로 한 시간만 더 가면 목적지인 바가르샤합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라면 정말 힘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다리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짐을 줄인다고 줄였지만 배낭은 15KG에 육박했고, 그것을 짊어 진 어깨는 바닥으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어깨뿐만 아니라 목부터 허벅지까지 온 몸이 후들거리고 아팠다. 나름 운동을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산행은 전혀 다른 근육들을 사용하고 있어 그동안의 운동을 무안하게 했다. 등산화가 아닌 조깅화를 신고 산에 오르는 것이 왜 문제인지 알았다. 발목을 잡아주는 지지대가 없어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면 발목이 꺾여버렸다. 힘이 많이 빠진 상태로 발목이 꺾인다면 정말 발목을 접질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따금 발이 질질 끌리기도 하고 꺾이기도 했다. 험난한 산길에 런닝화는 부분부분 찢어져버렸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산길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오후 3시, 참제에서 출발한지 7시간 반, 우리는 이윽고 바가르샤합에 이르렀다. 바가르샤합은 다른 마을에 비해 매우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는 몇 없는 롯지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숙소에는 폴란드 커플과 네덜란드 친구가 있었는데, 이들도 우리와 같은 참제에서 출발했고 다음 목적지도 차메(Chame)로 같았다. 이전의 롯지에서는 콘센트가 없었다면, 이곳에선 다행히 방에 콘센트가 있어 전자기기들을 충전할 수 있었다. 내일의 롯지에서는 전기를 사용할 수 있을 지 없을 지 몰라, 이곳에서 최대한 전부 충전해가야 했다. 나는 정말 땀에 범벅이 되어, 몹시 샤워를 하고 싶었다. 롯지 주인이 공용 샤워장에서 뜨거운 물이 나온다기에 우리는 매우 좋아했지만, 먼저 샤워장으로 들어갔던 그녀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을 보니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는데, 역시 그랬다. 하지만 땀을 워낙 많이 흘린 터라, 나는 찬물로라도 샤워를 하고 싶었다. 물이 얼음장같이 차진 않았지만, 물이 살에 닿자 너무도 추웠다. 나는 정말 호들갑을 떨면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가스렌지가 있었지만 잘 사용하지 않았고, 땔감을 길러와 불을 피워 물을 끓이고 요리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훌륭한 난로가 되었다. 주인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불 옆에 모여 멍- 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 시간이 2018년 들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와 나는 식사를 마치고 각자 할 일을 하다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고산지대에 오르는 것이 처음이었고, 줄곧 고산병이 걱정된다고 했다. 걱정이 몹시 많은 그녀는 고산병에 대해 거의 전문가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군인처럼 매우 잘 지켰다. 찬 물을 마시면 좋지 않다는 말에 입에도 대지 않았으며, 하루에 따듯한 물 3L씩 먹어야 좋다는 말에 그녀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래서 뜨거운 물을 사는데 굉장한 소비를 해야만 했다. 입이 짧은 그녀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남겼고, 그로 인해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포도당을 아침저녁으로 섭취했다. 덕분에 그녀의 식사는 전부 내 배를 채웠다. 그리고도 고산병약, 이온음료 분말가루 등 정말 많은 것들을 챙겨왔다. 진심으로 그녀가 고산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랬다.  


 나는 밤에 추울 것이 걱정됐다. 그리고 포카라에서 한국인들에게 배운 하나의 방법이 생각났다. 뜨거운 물을 담아도 모양이 변하지 않는 물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그것을 침낭에 넣고 자면 밤새 따듯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물통을 꺼내 아침에, 그리고 트레킹을 하며 마시면 굳이 찬물을 사서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굉장히 기발한 방법이었기에, 나는 흘려 보낸 수 많은 이야기 중 이것만은 꽉 잡아 머리에 넣어두었다. 나는 뜨거운 물 1L를 사서 물통에 담아, 방으로 가 침낭에 넣었다. 난방시설이 전혀 없는 나무산장에서,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침낭에 들어가면 항상 발이 몹시 찼는데, 나는 침낭 안에서 두 발로 물통을 붙잡았다. 매우 따듯했고, 이내 침낭 내부에 열기가 돌았다. 나는 몸을 구겨 넣고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그리고 그 위로 이불을 덮었는데, 이내 나는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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