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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ABA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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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17. 2018

ANNAPURNA CIRCUIT TREKKING, #2

#3 – 차메(Chame, 2,700m) 

 아침식사로 전날 주문해 놓은 죽을 먹었다. 보통은 아침으로 밥이나 든든한 것을 먹지만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식사를 하자니 지출이 너무 커서 아침은 간단히 죽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네덜란드 친구는 먼저 간다며 훌쩍 떠났고, 그녀와 나, 포터, 그리고 폴란드 부부와 이들이 고용한 포터 둘, 이렇게 7명이 함께하게 됐다. 우리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파른 경사를 만났다. 역시나 끝이 보이지 않는 경사를 보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어제의 피로가 남아서인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바로 옆이 낭떠러지라 발을 헛디디면 정말 위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씩, 한 계단씩 천천히 그리고 단단히 내디뎠다.  


 나는 서양의 여자들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우리와 함께 다닌 폴란드 부부의 아내, 그녀는 체력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아무리 가파른 경사라도 그녀는 매우 빠른 속도로 올라갔고, 이따금 멈춰 남편을 기다렸는데 숨찬 기색 없이 여유롭게 사진을 찍었다. 심지어 그녀는 양 손을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신발 바닥이 다 터져버렸지만 상관없다며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체력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또 한 번은 이런 여자도 만났다. 잠깐 앉아서 쉬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엄청나게 큰 배낭을 메고 지나갔다. 배낭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뒤에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걷고 있는 두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연히 기회가 생겨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러시아에서 온 그녀는 혼자 트레킹을 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녀의 배낭의 무게, 무려 27KG이었다. 부끄럽게도 내 배낭의 무게는 15KG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것도 보통 남자들이 들고 다니는 배낭의 무게보다 조금 더 나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배낭 안에 텐트가 있다고 했다. 텐트라니, 영하로 떨어지는 이곳에서 이따금 그녀는 텐트를 치고 잔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여자들이다.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고작 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 걸음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지쳐버렸다. 스스로 진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침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작 한 그릇의 죽으로 15KG의 배낭을 업고 산에 오르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고, 졸음까지 몰려와 줄곧 하품을 했다. 쓰러질 듯 눈 앞이 흐렸다. 다리를 질질 끌며 흙먼지를 휘날렸다. 그리고는 도저히 움직일 힘이 없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배가 곯다 못해 쓰렸다. 힘 없이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고 포터가 “15분, 15분만 더 가면 식당이야!”라고 했다. 이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나는 딱 15분만 더 걸을 수 있는 힘을 쥐어 짜내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정말로 곧 작은 식당이 하나 보였다. 나는 배낭을 내려두고 곧장 식당으로 가 메뉴도 보지 않고 달밧을 시켰다. 내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리필이 가능한 달밧밖에 없었다. 식사 주문을 받고 움직이기 시작한 식당 주인이 바가지에 쌀을 퍼가는 것이 보였다. 최소 한 시간이었다. 땀에 젖었던 옷이 찬 바람을 만나 한기가 들었다. 감기에서 벗어 난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는지 그녀는 뜨거운 물을 한 통 사서 내게 나누어주었다. 그때 마신 뜨거운 물을 잊을 수가 없다. 한 잔을 마시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모금의 뜨거운 물이 식도를 통해 어디쯤 넘어가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컵을 쥐고 있는 손이 따듯했고, 마신 속이 따듯했다. 나는 염치없이 다섯 잔도 넘게 마시고 잠이 들었다. 


 나는 코까지 골며 잤다. 얼마나 잤을까, 식사가 나왔다며 그녀가 나를 깨웠다. 밥이다, 밥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밥이 눈 앞에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도 잊은 채, 코를 밥에 묻었다. 한 숟갈을 입에 넣고 국을 한 모금 마시면, 입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숟갈 더 떠서 입에 넣고 반찬을 넣으면 또 입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고개를 들 일이 없었고,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을 때였다. 나는 밥을 추가해 다시 코를 묻어버렸고, 입이 짧은 그녀가 남긴 볶음밥까지 모조리 먹어버렸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엄청난 양을 먹었다. 나는 소화를 시키고자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리에, 손에,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장난감 로봇에 건전지를 교체해준 것처럼, 부분 부분 힘이 차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살며시 일어나 보았는데, 매우 가벼웠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꼈다. 나는 오르막 내리막 할 것 없이 잘도 걸었고 순식간에 차메까지 이르렀다. 어쩌다 보니 차메에서도 폴란드 부부와 같은 롯지에서 지내게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왼쪽 끝 방에서 젊은 한국인 남자 둘이 나와 우리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녀와 나도 인사를 하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이하게도 이 둘은 형제였는데, 태국을 시작으로 인도를 거쳐 3개월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동생은 곧 군대에 가야 하는데,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는 형이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형제끼리 여행을 한다니,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형은 매우 밝고 활발한 성격이었고 동생은 형에 비해 굉장히 말수가 적고 조용한 친구였다. 우리는 식당의 난로 근처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신나서 이야기가 많던 형과 달리,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동생이 슬며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너무도 성격이 다른 형제, 그러나 나는 동생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거짓 없는 모습이 좋았달까, 낯선 이들과 갑작스럽게 같이 있게 된 동생의 기분이 어떨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4 – 어퍼피상(Upper Pisang, 3,316m) 

 하루 중 가장 괴로운 때는 아침에 일어나 침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나무판자에 스펀지가 덧대어진 허름한 방은 따듯하기는커녕 오히려 밖보다 더 추웠다. 어렵사리 침낭 지퍼를 열고 나오는데, 입고 있던 패딩과 침낭이 스치는 소리가 무척이나 건조하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침낭을 개고, 배낭을 다시 꾸렸다. 머리는 도저히 감을 수 없었고, 세수를 하자니 물이 너무 차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넘겼다. 10분도 안돼 출발 준비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이미 몇 명 나와있었다. 나는 어젯밤 자기 전 아침식사로 볶음밥을 주문해놨다. 전날 죽을 먹고 오전에 쓰러질뻔한 이후로, 아침에는 무조건 밥을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가 입김이 나는 겨울 산속에서 볶음밥을 먹고 따듯한 커피를 한 잔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고 했다. 


 오늘의 일행은 이랬다. 그녀와 포터, 차메에서 만난 형제, 폴란드 부부와 포터 둘, 그리고 나. 그렇게 9명이 동행했다. 나는 먼저 출발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우르르 나오는 모습을 보니 왠지 흐뭇했다. 우리는 걱정이 많았다. 미리 구간의 정보를 찾아본 친구들은 이제부터 매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내리막과 오르막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해발 3,300m까지 고도를 꽤나 올리는 구간이었다. 이제부턴 가만히 있어도 숨이 거칠어질 수 있었고, 고산증세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걱정이 많은 그녀는 전날부터 뜨거운 물을 몇 리터는 먹고, 고산약과 포도당 등을 섭취하며 부지런히 고산병 예방에 힘썼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을 걸었다. 어느새 시간은 12시, 햇살이 머리 위에서 직선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마을의 한 식당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어보았다. 이따금 걸을 때마다 왼쪽 네 번째 발가락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벗겨진 양말과 함께 노란 먼지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나는 콜록거리며 손을 휘휘 저어 먼지를 날려 보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나는 통증이 있는 발가락을 유심히 보았는데 작은 물집이 올라와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군대에서 행군할 때 뒤꿈치가 까져 피가 나고, 내성발톱이 발가락을 파고들어 고름이 나오던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물집을 터트릴까 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언제나 점심은 꿀맛이다. 아무리 밥풀이 휘날리고 양념이 짜거나 싱거워도 맛있다. 심지어 나는 ‘Boiled Noodle’이라는 음식을 시켰는데, 아무런 간이 되지 않은 정말 삶은 생 면이 나왔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면 위에 소금과 후추, 그리고 케첩을 뿌려 먹었는데 이것마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우리는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우리 9명의 대가족이 갈림길에 들어섰다. 왼쪽과 오른쪽 길, 두 갈림길이었는데, 왼쪽은 로어피상(Lower Pisang), 오른쪽은 어퍼피상(Upper Pisang)으로 가는 길이었다. 간단히 말해 로어피상은 내리막길로 평평하고 쉬운 길, 어퍼피상은 오르막길로 경사가 가파른 구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폴란드 부부와 인사를 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남편의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로어피상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걸으면서 다리를 만지기도 했고, 고산증세도 있어 보였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그들은 왼쪽 길로 우리는 오른쪽 길로 갈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어퍼피상에 도착했다. 



 어렸을 적 미술 시간에 풍경을 그리라면 나는 항상 같은 그림을 그렸다. 먼저 도화지의 왼쪽 모서리 구석에 동그랗게 태양을 그리고 주변으로 선을 그어 햇빛을 표현했다. 정면에는 커다란 세 개의 삼각형을 그려 산을 나타냈고, 그 산자락 아래로 삼각형과 사각형을 이용해 여러 개의 집을 그렸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내가 어렸을 적 그린 그림의 실제를 보았다. 눈 앞이 커다란 도화지였고, 정면에 안나푸르나 설산이 송곳니를 세우고 있었다. 왼쪽 위로 고개를 들어보면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산기슭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파란 삼각지붕의 나무집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우리가 묵을 숙소였다. 주인이 우리를 각자 방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먼저 “인터넷 돼요?”라고 물었는데, 숙소 주인은 “일주일간 마을 전체가 정전이야”라고 대답했다. 드디어 전기 없는 마을에 들어왔다. 오늘은 한국에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엄마에게 생존신고를 했는데, 아마도 엄마가 많이 걱정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고산지대에서 샤워는 고산병으로 이어질 수 있고, 특히나 찬 물로 하는 샤워는 더욱 위험하다. 그래서 다들 여기부터는 샤워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퍼피상쯤 오면 약 일주일간은 샤워를 하지 않고 산행을 한다. 순간 나는 군 시절 영하 20도의 추위에서도 찬물로 샤워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어렸을 때도 했는데, 여기서 못할 것이 뭐가 있겠냐는 생각에 조금 과감해졌다. 나는 주인에게 가서 찬물로 샤워하겠다고 물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웃으며 진심인지 여차 되물었고, 옆에 있던 포터는 고산에서 찬물 샤워는 조심하라고 진지하게 일러주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은 나를 샤워장으로 데려가서 커다란 원형 통에 찬 물을 가득 담아 주고 그 위에 작은 바가지를 하나 올려주었다. 나는 일단 작은 바가지로 물을 퍼서 머리에 부었다. 머리의 모든 구멍이 꽈악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잠깐 쉬고 다시 한 바가지를 머리에 부었다. 숨이 차올라 헐떡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원형 통을 들고 남은 물을 전부 몸에 부어버렸다. 5분도 안돼 끝나버린 굉장히 터프한 샤워였다. 머리카락이 얼었는지 수건으로 잘 털리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내복을 입고 두꺼운 옷을 모조리 끼어 입었는데, 이제야 매우 상쾌했다. 뜨거운 물로는 느낄 수 없는 다른 상쾌함, 산의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침낭에 누워 잠깐 잠에 들었다. 눈을 뜨니 시간은 오후 6시,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올라갔다. 나무로 지어진 식당의 가운데에 난로가 있어 따듯했다. 이따금 포터가 난로의 뚜껑을 열고 장작을 넣어 다시금 뜨겁게 만들어 주었다. 식당에는 못 보던 한국인 아저씨 한 분이 있었는데 내가 잠든 사이 혼자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우리 일행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당에 모인 사람은 이랬다. 그녀와 포터, 영국인 남자 두 명과 포터, 한국인 형제 둘, 아저씨, 그리고 나. 이렇게 9명이었다. 추위와 트레킹에 지친 우리 모두는 한동안 난로 근처에 모여 멍하니 있었다. 서로 아무런 말도 없었고, 나는 벽에 기대고 앉아 핸드폰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새 밖이 어두워지면서 식당도 어두워졌다. 전기가 없어 불을 켤 수 없었다. 그러자 식당 주인이 손전등으로 식당 내부를 밝혀주었다. 듬성듬성 빛이 들어찬 식당은 아늑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둘셋 모여 도시락을 까먹듯이, 옹기종기 음식을 가운데에 모았다. 하나의 음식만 시키고도 여러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난로 주변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하루는, 몹시 낭만적이었다. 타닥타닥 난로 안에서 장작 타는 소리, 굴뚝에서 피어 나오는 연기, 고소한 탄내 우리는 난로 앞으로 손을 가져다 모았다. 트레킹에 대한 이야기, 한국에서 살아온 저마다의 이야기 등 각자의 추억거리를 나누며 우리는 외로움을 달랬다. 형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늘이 더 좋다고도 했다. 정말 그랬다. 그 어느 날보다 낭만적이고 포근했다.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나는, 낯선 이곳에서 오랜만에 그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2018년 1월 3일, 우리는 히말라야 산맥의 산골 자기의 일주일간 정전이 된 한 작은 산장에서, 산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여 그윽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글을 쓰는 지금, 오로지 노트북의 빛만이 방을 밝히는 이곳이 전혀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다. 



#5, 6 – 마낭(Manang, 3,537m) 

 새벽 6시,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슬리퍼를 지익- 지익- 끌며 문을 열었는데 밖은 아직 어두웠다. 나는 공용화장실로 가서 핸드폰으로 불을 비추고 세수를 했다. 바가지에 물이 들은 채로 얼어있어 머리는 감을 수 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설산이 잘 보이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곳곳에 물이 얼어있어 꽤나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떠는 것이냐면, 해가 뜨면서 하얀 설산의 송곳니에 빨간 모자가 쓰이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낼수록, 송곳니는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쓴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양 손을 주머니에 넣고 덜덜 떨면서 해가 뜨길 기다렸다. 이윽고 먼 곳에서 해가 뜨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 맞지 않아 설산에 빨간 모자가 쓰이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되지 않는 것이었다. 작은 기대를 하며 줄곧 기다렸지만 서서히 밝아지다가 이윽고 그저 아침이 되었다. 나는 아침부터 그리 부지런을 떨었건만, 전부 물 건너갔다. 


 아침 식사를 7시까지 준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40분이 지나서야 식사를 받았다. 갈 길이 멀어 일찍 출발하려고 했지만 많이 지체됐다. 나는 그녀와 작별인사를 했다. 포카라에서부터 출발해 4일을 함께한 그녀와 드디어 각자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나는 다음 마을인 마낭(Manang)까지 한 번에 가기로 했는데, 직선거리로 약 20km 게다가 고도를 꽤나 올리는 가파른 구간이었다. 그녀는 체력과 고산병을 염려해 마낭까지 이틀에 걸쳐 천천히 올라가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무사히 트레킹을 완주하길 바랬다. 그리고 그녀라면 걱정 없었다. 걱정이 유달리 많은 그녀는 준비성이 누구보다 철저했기 때문에 충분히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거의 무계획으로 온 나를 그녀가 걱정했다. 나는 앞으로의 여정은 한국인 형제와 함께 하기로 했다. 우리는 그녀와, 그리고 숙소에 있는 친구들과 인사를 마치고 다시 산행에 나섰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 남자 셋이 걸으니 사소한 것마저 몹시 재미있었다. 그동안 숨겨놓았던 장난기가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트레킹을 하다 보면 소나 염소가 많이 보였는데, 우리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엉덩이를 한대씩 때리고 지나갔다. 가끔은 무심코 옆을 지나치는 척하다가 지나는 순간 ‘워!’하고 놀래 키기도 했다. 그러면 깜짝 놀라 엉거주춤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렇게 낄낄댔다. 주변을 지나치는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언뜻 보기에 고대어로 뭐라 쓰인 석판을 보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들고 사진을 찍었다. 계곡물이 얼어붙어 있으면 돌을 던져 얼마나 꽝꽝 얼어붙었는지 확인했다. 지나가다 야크의 뿔을 발견했는데 그것으로 배를 찔러보며, 야크가 우리를 공격한다면 얼마나 아플지 실험해보기도 했다.  


 재미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급경사를 만났다. 산 하나를 통째로 오르는 것이었는데, 지그재그로 된 길이 산 꼭대기까지 이어져있었다. 우리는 지름길을 찾아가며, 혹은 길을 직접 만들며 올라갔다. 지그재그로 된 길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자면 너무도 빙빙 둘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직선으로 올라가려 애썼다. 해발고도 3,400m가 넘는 곳에서 가파른 산 길을 오르다 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미친 듯이 숨을 헐떡일 뿐이다. 중국 야딩에서도 비슷한 산행을 했지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15KG짜리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오르는 것이었다. 오르고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숨은 턱 끝까지 차 올랐다. 아무리 산소를 빨아들이려 부단히 노력해봐도 턱없이 부족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성향이 있는데, 그것은 여행을 하다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형제와 나의 성향은 어쩌면 정 반대였다. 나는 힘든 일을 앞두고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그것을 빨리 끝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타입이라면, 형제는 매우 여유로운 타입이었다. 그러니까 이를 테면, 나는 시간을 고려해서 12시까지는 이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해가 지기 전까지 다음 목적지인 마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는 정말 여유로웠다. 지그재그를 오르는 것이 유독 힘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우리는 5분 걷고 쉬고를 반복했다. 형제는 한 번 쉬기 시작하면 배낭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쉬었다. 나는 이 속도로 가다가 해지기 전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형제는 그저 아무런 걱정 없는 표정을 하고 설산의 절경을 감상했다. 형제는 내가 조금 조급해 보였는지 혹은 급한 내 성격이 보였는지, “형님 먼저 가셔도 괜찮아요”라며 “저희는 설산 보러 온 거라 천천히 감상하며 가고 싶어서요, 시간에 쫓겨서 가는 게 싫어서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한 번 모든 것을 이들에게 맞추어보기로 했다. 


 지그재그 길을 통과하자 거의 1시가 됐다.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늦어버렸다. 머릿속의 계산기는 끊임없이 시간을 계산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이 속도로 가다간 해가 지기 전에 마낭까지 도착할 수 없었다. 아마도 혼자 있었다면 주변 절경이고 뭐고 나는 속도를 높였을 것이다. 나는 그래야 마음이 진정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형제는 어김없이 멈추어 절경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형제가 시계를 보는 일은 없었다. 이때부턴 나도 계산을 포기하고 즐겨보기로 한 것 같다. 힘들게 오른 보람이 있게 절경은 굉장했다. 시야의 끝에서 끝으로 눈이 수북이 쌓인 하얀 히말라야 산맥이 송곳니를 날카롭게 세우고 세상을 선 그었다. 뜨거운 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듯, 설산의 송곳니 주변으로 눈보라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사실 그것이 구름인지 눈인지도 잘 모르겠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연의 위압감에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저곳에 있었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언제나 마음이 급한 내게 이 친구들의 여유는 배워야 할 것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여유란 무엇인지 유심히 지켜보기로 했다 


 계산대로 우리는 역시 늦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2시를 지났고, 마낭까지 거리는 약 9KM가 남았다. 산 속이라 오후 3시만 되어도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쉬지 않고 걸어도 2시간은 걸릴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아침에 체력을 거의 소진한 탓에 한 걸음 떼기도 힘들었다. 가끔 바닥에 낮게 솟아있는 돌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기도 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바닥에 주저앉아 과자와 견과류를 먹었다. 고된 산길을 걸으면 인생의 어떤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저 머릿속엔 “힘들어 죽겠다, 어깨 아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얼른 도착해서 어깨에 지독히 매달려있는 이 짜증 나는 배낭을 내팽개치고 식당으로 달려가 뭐든 먹고 싶었다. 이윽고 산맥 뒤로 해가 모습을 감추었다. 해가 져버린 산속은 몹시도 추웠고, 건조했다. 코는 가득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줄곧 입으로 숨을 쉬어온 탓에 입술은 마르고 갈라졌다. 뜨거운 태양에 그을린 얼굴은 새빨개졌고, 찬 바람에 피부가 텄다. 물집 난 부분이 줄곧 따끔거렸고, 왼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중에도 가장 힘든 것은 어깨, 정말 어깨가 부서질 듯이 아팠다. 우리는 2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고, 오후 4시 30분 드디어 마낭에 도착했다. 

 마낭의 숙소를 잡고, 침대에 배낭을 내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 음식부터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몸에 열기가 식기 전에 대충이라도 씻고 싶었다. 화장실과 샤워장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돌려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주인에게 묻자 수도관이 전부 얼어붙어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히 마당에 물이 졸졸 나오는 곳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에서 빨래를 하거나 씻는다고 했다. 야외라 샤워는 안될 것 같았고 나는 머리라도 감기로 했다. 나는 두 다리를 쩍 벌리고 고개를 푹 숙여 머리를 감았다. 어쩌면 이리도 물이 찬지, 두피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 위로 물을 몇 번 더 뿌렸는데 그때마다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적당히 헹구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는데 또 머리카락이 바로 얼어버렸다. 나는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 난로에 머리를 들이댔다. 형제가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난로 주변에 동그랗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트레킹 여섯째 날은 고산 적응도 하고 체력도 회복할 겸 마낭에서 하루 푹 쉬었다. 오랜만에 늦잠도 잤고, 하루 종일 난로 앞에 앉아 멍도 때렸다. 늦잠이래도 고작 8시까지 자는 것이었다. 일찍 자는 탓에 항상 일찍 깼다. 우리는 전부터 기대하던 영화 히말라야를 한 편 보았는데, 창 밖의 절경이 다시 보였다.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비수기라 그런지 대부분 닫아있었다. 이따금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았는데 하나같이 콧물이 입까지 흘러 내려와 굳어있었고, 머리를 며칠은 감지 않은 듯했다. 나는 아이들 가까이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나마스테”, 아이들은 멀뚱멀뚱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사진을 몇 장 찍고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나는 미리 엄마에게 연락해서 앞으로 몇 일간은 인터넷이 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마낭 이후의 마을부터는 전기와 인터넷은 안 된다고 봐야 했다.  


#7 – 레다르(Letdar, 4,230m) 

 일곱째 날, 목적지는 레다르, 거리는 약 12km, 고도를 4,230m까지 올리는 날이다. 아침 7시 30분, 우리는 식사를 마쳤지만 밖이 몹시 추워 난로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장작을 태우며 불꽃을 피우는 난로를 보고 있으면 그저 멍- 해졌다. 난로에 잠시 홀렸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8시가 넘었고 우리는 서둘러 트레킹에 나섰다. 하루를 쉬고 나왔건만 배낭을 짊어지자마자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걸었다.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한 길이 산 등성이를 타고 이어졌고 우리는 그 위를 걸었다. 아무래도 지대가 높아졌다 보니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우리는 한 지점에 멈추었다. 그리고 문득 영화 히말라야에서 나오던 노래가 듣고 싶었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은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무거운 배낭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쌓여있는 돌무더기 위에 주저앉아 눈 앞에 펼쳐진 설산을 바라보며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잔잔한 하모니카 소리와 따듯한 햇살, 노란 흙모래가 검정 바지에 묻어 온통 더러워져도, 쓰고 있던 모자가 땀에 젖어 축축해져도 상관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이나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절경이 나올 때면 멈추어 사진을 찍었다. 평범하게 찍는 것을 싫어하던 형제는 줄곧 재미있는 포즈를 찾았다. 해발 4,000m, 보통 사람들은 고산병을 걱정하여 움직임을 조심할 높이 혹은 부족한 산소에 한 걸음 떼기조차 힘들어할 높이다. 다행히도 우리 셋은 고산증세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기괴한 포즈를 찾아가며 사진을 찍었고, 나중에는 점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찾은 다음 포즈는, 설경을 배경으로 앞에서 인간 피라미드를 쌓는 것이었다. 두 형제가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굽혀 나란히 서서 지지대를 만들고, 나는 두 친구의 허벅지를 밟고 올라가 피라미드를 쌓기로 했다. 나는 카메라에 타이머를 맞추어 놓고 뛰어와 두 형제의 허벅지를 밟고 올라섰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 우리를 지켜봤다. 그리고 나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져 왼쪽 무릎과 발목이 살짝 꺾였다. 긴장이 풀려서는 그렇게 장난을 치더니 결국 산에게 혼이 난 것이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어서 다시 걷는데 문제는 없었다. 정말 아찔했다. 


 레다르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줄곧 오르막길이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았고 완만하게 끊임없이 오르는 길이었는데 고산이라 숨이 차 올랐다. 우리는 10분 걷고 멈추어 쉬었고, 또 10분 걷고 숨을 헐떡였다. 어깨는 한계에 이르렀는지 통증이 극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저 쉬다 걷고, 쉬다 걸으며 앞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2km 남았다!”, “1km 남았어!”, “700m!”, “500m!”라며 줄곧 지도를 확인했다. 숨이 차오를수록 지도를 보는 빈도도 점점 잦아졌다. 우리는 레다르를 약 20분 정도 남기고 주저앉았다. 셋 다 몹시 지쳐있었고 이제는 옷을 아무리 두껍게 입어도 추웠다. 우리는 넋을 놓고 쉬다가 웃기게도 동시에 잠에 들어 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친구들을 깨웠다. 3분 정도 잠에 든 것 같았다. 너무 추웠다. 걸으면 숨차고, 쉬자면 추웠다. 고통스러웠다.  


 레다르에 도착했다. 마을은 매우 작았다. 아니, 마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저 롯지 하나 달랑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식기 전에 세수하고 머리 감고, 그리고 발까지 씻어보려 물을 찾았지만 전부 얼어있었다. 숙소 주인에게 물었지만 주방 말고는 전부 물이 얼어 쓸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물티슈로 세수를 하고 더러워진 발을 닦았다. 며칠 전부터 있던 왼쪽 네 번째 발가락에 잡힌 물집이 몹시 커졌다. 걸을 때 통증은 없었지만 이대로 놔두다간 계속해서 커질 것 같았다. 나는 물집을 터트리고 그 위로 밴드를 붙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발목과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장난치며 삐끗한 것이 인대가 놀란 모양이었다.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정말 고행의 시작인데, 걱정이었다. 


 역시 전기가 안 된다. 저녁을 먹고 모두들 난로 주변에 앉아 각자 할 일을 했다. 폴란드 부부를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부부는 서류를 보며 줄곧 일을 했고, 이태리 친구들은 카드게임을 했다. 형제도 포터와 함께 셋이 카드게임을 했고, 나는 난로 옆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난로 옆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은 참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문명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낭만적 일지는 몰라도, 이대로 살 수는 없었다. 며칠을 씻지 못해 다들 꼬질꼬질했고, 전기와 인터넷 없이 살자니 답답했다. 어느덧 트레킹을 하는 이유가 ‘토롱라패스(Thorong La Pass), 5,416m’를 넘겠다는 목표가 아닌, 얼른 전기와 인터넷을 마음껏 쓰고 따듯한 물로 씻고 싶다는 하찮은 이유로 바뀌어있었다. 다들 할 것도 없고 고된 산행에 피곤했는지, 저녁 8시가 지나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한국에서 이토록 바른생활을 한 적이 있던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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