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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17. 2018

ANNAPURNA CIRCUIT TREKKING, #3

#8 – 토롱 하이캠프(Thorong High Camp, 4,925m) 

 레다르에서 출발해 토롱페디에 도착한 우리는 따듯한 차를 한 잔 하며 잠시 쉬어갔다. 이어 토롱 페디(Thorong Phedi, 4,450m)에서 토롱 하이캠프(Thorong High Camp, 4,925m)까지는 약 500m를 가파르게 오르는 구간으로, 안나푸르나 서킷 트레킹의 모든 코스를 통틀어 가장 힘들기로 알려졌다. 5,000m에 다다르는 매우 높은 고도에 상당히 가파르고 위험한 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넘어갈 수 있는 고지가 아니었다. 미국, 아일랜드, 호주,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이 모두 토롱 페디의 식당에 모여 거사를 치르기 전 휴식을 갖고 배를 채웠다. 몇몇 친구들이 먼저 출발한다며 용기 있게 나섰고 우리도 이어 배낭을 짊어졌다. 이내 다른 친구들도 우리를 뒤따라 출발했고, 수십 명이 줄을 지어 산을 오르는 장관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규칙, 절대 무리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부터 지키지 못했다. 앞에서 가는 사람은 멀어졌고, 뒤에서 오는 사람은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나는 뒤쳐졌다는 말이다. 나는 허덕이며 죽을힘을 다했다.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심장의 소리가 몸을 통해 고막을 울렸다. 산을 타고 넘어온 바람이 몹시도 세게 불었고 가파른 숨을 오로지 입으로만 쉬어야 했다. 입술이 바짝 말라 찢어졌고 심지어 목구멍까지 말라버려 침을 삼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바닥만 보고 걷다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면 머리가 핑- 하고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만약 중심을 잃어 발을 헛디딘다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한 가장 큰 실수라면 힘들 때 쉬지 않은 것이었다. 한 명만 간신히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에서 내가 뒤쳐지면 뒤에 있는 친구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데 이것이 꽤나 위험하고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보내자니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걸었고 마침내 마을이 보였다. 먼저 오른 친구들이 마을 입구에 빙 둘러앉아 우리에게 환호와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마지막 몇 걸음만 더 오르면 됐다. 나는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더욱 무리했다. 그리고 남은 힘을 전부 쥐어 짜내 꽤나 선두로 토롱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더 이상 서 있을 작은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배낭 내려놓을 곳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눈 앞에 보이는 아무 곳에나 스틱을 던지고 힘겹게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순간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고 속이 메스꺼웠다.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운동선수들이 운동을 심하게 하면 구토를 하곤 하는데 딱 그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고산병의 증상이었다. 나는 어쩌면 여기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고산병이 심해져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할 정도가 되면 구조헬기를 불러야 할 수도 있는데 얼만지도 모를 만큼 가격이 엄청났다. 나는 일단 안정을 취해야 했다.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은 채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양 손으로 머리를 쥐어 감쌌다.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했다. 후우- 후우- 동시에 올라오는 구토를 억눌렀다. 나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환호하고 자축하는 저들 사이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호주에서 온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부도 천천히 올라와 여유롭게 웃고 있는데 옆에서 구토를 해버리면 자존심이 매우 상해버릴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미 한 번 나를 감싼 고산증세는 산을 내려갈 때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었다. 


 나는 몰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배낭을 다시 메고 방으로 들어오는 사이에도 숨이 차 올랐고 구토를 억눌렀다. 나는 누워서 몸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고 생각해서 천천히 일어나면 바로 머리가 핑- 돌며 속이 메스꺼워졌다. 미칠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있자니 땀이 식으면서 점점 추워지는데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있는 배낭까지 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도와줄 사람은 없었고 누군가 도와준다 해도 나는 싫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땀으로 젖은 옷을 전부 벗어버렸다. 춥고 어지럽고 메스껍고, 배낭은 왜 이리 무거운지 지퍼를 열기도 쉽지 않았다. 나는 가지고 온 모든 옷을 껴입고 고산병약을 찾아 먹었다.  


 그리고 나는 식당으로 가보았다. 식당에는 이미 형제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일단 점심식사로 ‘차우면’이라는 네팔의 면 요리를 시켰다. 식욕은 없었지만 무엇이라도 먹어, 어떻게든 몸에 기운을 채워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따듯한 코코아를 한 잔 마셨는데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다. 그나마 컵이 따듯했기 때문에 양 손으로 소중히 꼭 잡고 있었다. 차우면은 꽤나 맛있었지만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에 입맛이 없어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다행히도 먹은 것이 역류할 정도로 상태가 나쁘진 않았다. 잠시 창가에 기대고 앉아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앉아있었는데 아무래도 어지러움이 가시질 않았다. 마치 술을 많이 마시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형제에게 말을 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오후 2시 반, 태양으로 4,900m 가까이 올라온 세상은 몹시 화창했다. 하지만 나는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방에 들어와서 침낭 안으로 몸을 묻고 그저 창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핫팩 중 하나를 뜯었다. 그리고 이것을 선물해 준 친구가 문득 생각났다. 나는 핫팩을 몇 번 흔들다가 침낭 안에 넣었다. 한 번 흔들 때마다 머리가 울려 충분히 흔들지는 못했다. 그리고 배낭에서 초코바를 하나 꺼내 먹었다. 배고파서 먹은 것은 아니고 당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고 가만히 누워있자니 몹시 심심해서 책을 읽어보았지만 속이 메스꺼워 한 줄을 읽기가 힘들었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낮잠만은 자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인터넷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밤이 찾아오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곤 자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해 아무리 피곤해도 자지 않고 저녁식사 후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만약 낮잠을 자버린다면 생각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만은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느샌가 나는 잠에 들어버렸고 눈을 떴을 때는 오후 5시, 여전히 창 밖은 밝았다. 


 나는 조심히 몸을 일으켜보았는데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려고 물통을 집어 들었는데 물이 얼어있었다. 방 안에 있는 물이 얼 정도면 이곳도 영하라는 소리였다. 나는 다시 식당으로 갔다. 저녁식사를 하러 사람들이 식당에 모여 난로를 틀어 줄 시간이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자기 전처럼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식당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난로 주변으로 모여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중에는 동양인도 몇 보였는데 물어보니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이라니, 오랜만에 보는 중국인이었다. 역시나 영어를 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난로를 쬐고 있는 형제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나는 난로 주변에 모인 사람들과 내일의 트레킹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들 걱정이 많았다. 마침내 토롱라패스 5,416m를 건너는 구간이었다. 모두들 이곳을 지나기 위해 씻지도 못하고 며칠에 걸쳐 걸어온 것이었다. 네팔 가이드들은 지금껏 올라온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거친 구간이라고 했다. 산소가 매우 희박해 숨이 가빠서 쉬기 어려울 것이고 몹시도 추운 데다가 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워낙 세차게 불어 쉬어도 정신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불필요한 짐은 전부 배낭에 넣으라고,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토롱라패스는 그저 잠시 머물다 지나는 곳이지, 몇 시간이고 환호하고 자축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아무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처음에 있던 자신감은 두려움으로 뒤집혔다. 고산병에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으로 고통스러웠고 이제 이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었다. 게다가 신발도 걱정이었다. 러닝화를 신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참 운이 좋았다. 심지어 매사에 걱정이 없어 보이던 수염 쟁이 친구들마저 내 신발을 보고는, 그것을 신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며 앞으로 올라갈 구간은 정말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아무튼 아무리 걱정이 많이 돼도 여기까지 와서 돌아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택지는 단 하나,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형제가 내게 물었다. “형, 올라가다가 고산병 심해지면 다시 내려오실 거예요?” 그리고 내가 대답했다. “토하면서 올라가야지” 형제는 “저도요”라며 웃었다. 지금 걱정이 많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산증세까지 겪었고 네팔 가이드들도 쉽지 않다고 고개를 젓는 구간이다. 사람마다 정상까지 3시간이 걸린다느니 5시간이 걸린다느니 각자 어디선가 들은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쓸모없는 이야기들, 이런 것들을 전부 들을 필요는 없다. 내일 내가 직접 가면서 보고 느끼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어떤 문제가 닥쳐도 나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쓸 것이고 그렇다면 걱정은 없다. 나는 필요한 정보는 머릿속에 새겨두고 더 이상 사람들의 의미 없는 떠듦은 듣지 않기로 했다. 


 저녁식사는 거르기로 했다. 고산병까진 아니지만 모두들 고산에서 일어나는 증상을 확실히 겪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신이 멍- 해졌고, 숨이 차올라 매우 어지러웠다. 이로 인해 입맛이 없어졌다. 형제는 이 느낌이 꼭 술 마신 마냥 붕 뜨는 느낌이라고 했다. 먹은 것이라곤 낮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차우면 요리가 전부였는데 줄곧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도 입맛을 없앤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무튼 다들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매우 저조해있었다. 나는 며칠간 씻지도 못해 꾀죄죄했고 피부는 굉장히 건조했다. 며칠간 감지 못한 머리카락은 뻑뻑했고, 발은 새카맸다. 몹시 강한 햇볕과 찬 바람에 귀가 터서 찢어졌다. 발가락은 물집 잡혔고, 걸을 때마다 무릎과 발목이 아팠다. 그리고 정말 너무도 추웠는데 매일 밤 잠자리에 드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난로에 모여있던 친구들은 7시가 지나자 잠자리에 들러갔고 나와 형제는 남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시간 후에 들어갔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무섭게 불어 방 문을 두드렸다. 자동차 경적소리, 술 취한 사람이 소리 지르는 소리, 오토바이 지나는 소리, 이런 것들이 내가 한국에서 잠에 들 때 창문 밖으로부터 들려오던 소리라면, 고요한 산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곤 무자비하게 불어대는 바람소리뿐이었다. 후웅- 후웅- 하는 소리를 내며 건강하게도 불어댔다. 내일 태양이 뜨기 전 어두운 새벽, 저 녀석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을 생각을 하니 오히려 설레기도 했다. 얼른 시간이 흘러 내일이 오면 좋으련만, 잠에 들지 못한다. 낮잠을 잔 탓도 있겠지만 숨이 차서 잘 수가 없었다. 그저 누워있을 뿐인데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밤,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잠들려 애써보지만 눈만 감고 있을 뿐 자꾸만 잡생각이 들었다. 또 바람이 불었다. 무섭게도 불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곤하다고 하던데 다들 잘 자고 있는지 궁금했다. 만약 잘 자고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잘 자는 사람이다. 두 시간을 뒤척였다. 침낭에 들어가 있는 몸은 그나마 따듯했지만 코가 매우 시렸다. 나는 이윽고 머리가 어지러웠고 또다시 두통이 왔다. 침낭에서 나가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지만 나는 힘겹게 일어나 고산병약을 먹었다. 이제 남은 약도 없다. 부디 내일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탈 없이 토롱라패스를 넘길 바랄 뿐이었다.  


 두 개를 겹쳐놓았던 베개를 하나 뺐다. 고산약을 먹은 덕분인지, 베개를 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까스로 나는 잠에 들었다. 추위와 숨 막힘에 몇 번 깨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밖에서 얼음이 와그작와그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누군가 일어나 트레킹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나는 알림을 4시 30분에 맞추어 놓았지만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나는 문득 지금 내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자마자 카메라를 세워두고 내 모습을 찍어보았다. 세상에, 못 봐주겠다. 얼굴이 터질 듯이 퉁퉁 부어있었고 며칠을 감지 못한 머리는 새집을 지었다. 정말이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한 장의 내 모습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코스, 모든 것을 쏟아붓는 구간이었으므로 준비할 것이 많았다. 나는 가져온 모든 옷을 끼어 입었다. 보통은 얇은 옷 몇 가지와 점퍼만 입어도 충분했지만 오늘은 태양도 뜨지 않은 영하 20도의 새벽, 그리고 태풍 같은 바람을 뚫고 5,416m까지 올라야 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남은 핫팩을 뜯었다. 다섯 개뿐이던 핫팩을 정말 필요할 때 쏙쏙 골라 잘 썼다. 특히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것은 나를 지켜주리라. 마지막으로 걱정되는 한 가지는 여전히 어지럽고 몸에 기운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어제저녁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참 웃기게도 배가 고팠다.  


#9 – 쏘롱라패스를 지나 묵티나트로(Muktinath, 3,671m via Thorong La Pass, 5,416m) 

 지금껏 지나왔던 숙소와는 다르게 식사가 늦지 않게 나와 제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다. 새벽 6시, 아직 어두웠다. 눈 앞에 있는 산들이 그저 까맸다. 어젯밤 그렇게 방문을 두드리던 바람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었다. 갈 테면 가보라는 듯이. 우리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배낭을 끈을 질끈 조였다. 가만히 있어도 뛰던 심장이 잠깐 힘을 주자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의기양양한 바람을 치우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어둠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숨이 차 올랐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출발한 지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첫 번째 고비에 닥쳤다. 랜턴의 불빛이 비추는 저 편까지 길이 전부 얼어있었다. 얼어있는 길은 고작 한 명이 지날 수 있는 넓이였고, 길의 오른편은 낭떠러지였다.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어둠의 낭떠러지로 추락해버릴 것이었다. 부상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사망이었다. ‘아이젠’이라는 것이 있으면 매우 편하게 갈 수 있었겠지만 러닝화를 신고 온 나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형제도 없었다. 나는 먼저 스틱을 단단히 고정하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뎠다. 정말 무서웠다. 무서운데 재미있었다. 얼음을 위태롭게 밟고 있는 신발의 오른편으로 까만 낭떠러지가 보였다. 한 걸음을 떼는데 수 초가 걸렸다. 차라리 바닥을 기고 싶었다. 그렇게 한 고비를 지나면, 이어 곧 더욱 장대한 얼음 길이 나왔다. 그렇게 얼음 길만 지나는데도 곧 해가 떠버렸다. 



 내가 트레킹을 하며 느낀 것을 굳이 한 가지 꼽자면 나는 정말 여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의식적으로 여유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각자 정한 시간에 식사를 한다. 나는 새벽 6시에 식사를 하고, 그는 7시에 식사를 한다. 그리고 나는 7시에 트레킹을 출발하고, 그는 8시에 출발한다. 나는 그보다 한 시간이나 앞섰다. 성격이 매우 급한 나는 걸음 또한 매우 빠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아니 어쩌면 그런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질 새도 없이 빠르게 걸었다. 걷다 보니 앞에 그녀가 걷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새벽 5시에 식사를 하고 6시에 출발했다. 그녀는 가다가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싸온 간식을 먹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은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추월하고 으쓱했다.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했지만 나는 그녀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었다. 이제야 잠깐 멈추어 앉아 여유를 즐겨볼까 한다. 싸온 과자를 꺼내 먹으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뒤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8시에 출발한 그다. 그가 저 멀리서 나와 가까워지는 것이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너무 오래 쉬었나” 이윽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목적지까지 간다. 절경은 잊은 채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이것이 트레킹을 하던 나의 모습이다. 나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와 동행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먼저 가셔도 돼요”라고 했다. 내 안에 있는 급한 마음이 보였던 것이겠다. 트레킹을 하는 내게 여유는 없었다. 형제와 함께 동행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추월해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이렇게 모두 우리를 추월해가면 마치 우리는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가 출발이 빨랐으면 저들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데 그저 하염없이 쉬며 추월당하는 것이 싫었다. 레다르에서 하이캠프로 올라가는 구간, 나는 거의 선두로 올랐다. 숨이 미칠 듯이 차오르고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것을 참고 선두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선두로 들어왔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아픈 것도 몰랐다. 

 

 토롱라패스를 넘는 본격적인 오르막 구간. 그 지옥같이 힘들고 숨차던 길에서 나는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었다. 약 500m의 높이를 4시간 동안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는데, 나는 5시간이 걸리더라도 절대로 나의 페이스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첫째로 누군가의 추월에 조급해하지 말 것이며, 둘째로 멀어져 가는 누군가를 무리하게 따라가지도 말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뱀처럼 길게 늘어선 오르막길을 나만의 보폭으로 걸으며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두 걸음 걷고 두 숨 쉰다. 그리고 다시 두 걸음 걷고 두 숨 쉰다. 이렇게 걷다가 만약 숨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지면 두 걸음 걷고 네 숨 쉰다. 이런 식으로 절대 숨이 미칠 듯이 차오르지 않게 했다. 그리고 나의 페이스는 매우 느렸다. 함께 출발한 형제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갔고, 나보다 늦게 출발한 호주 할머니 할아버지마저 나를 추월해갔다. 나는 그럴 때면 차라리 멈추어 옆으로 비켜주며 먼저 가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철저하게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어느덧 나는 꼴찌로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하게 숨이 차오르지도 않았고, 어지러움이나 메스꺼움은 있었지만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윽고 나는 일반인에게 허용된 가장 높은 고지, 5,416m의 토롱라패스에 이르렀다. 나를 추월하고 먼저 도착한 아일랜드 친구 네 명, 이태리 친구 세 명, 미국인 친구 두 명 그리고 형제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내게 환호를 질렀다. 이곳에 오기까지 꼬박 10일을 걸었다. 사실 올라와보니 별 것은 없었다. 그저 성공적으로 온 것을 축하한다는 팻말 하나, 주변 경치도 별로 멋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을 멋지게 만든 것은 우리였다. 우리는 서로 환호하며 축하했다. 전부 같이 팻말 근처로 모여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몹시 세게 불었지만, 이제 이것은 우리의 성공을 축하해주는 팡파르였다. 이윽고 숨 쉬기가 매우 힘들어, 우리는 다시 하산했다. 말했듯이 이곳은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다.  



 여유란 무엇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게는 그것이 없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여유를 갖는다고 가져지는 것일까,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앞서가는 사람이 멀어져 희미해지면 불안하고 뒤따라 오는 사람이 가까워지면 조급해진다. 심지어 추월이라도 당해버리면 그땐 불행해진다. 누군가의 추월이 내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우리는 겁먹는다. 나만의 페이스를 알아야 할 것이다. 멀어져 가는 누군가를 무리해서 따라갈 필요도 없고 뒤쫓아 오는 누군가로부터 멀어지려고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일등도, 꼴찌도 행복할 수 없다. 힘들 땐 쉬어가고, 신날 땐 뛰어도 보자. 레일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고, 묵묵히 나의 흐름을 따를 것이다. 그리고 의도가 아닌 정말로 내가 그럴 수 있을 때, 그때야 나는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토롱라패스에 잠시 머물렀다가 곧이어 하산해서 묵티나트(Muktinath, 3,760m)라는 비교적 큰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숙소에 이르자마자 전기는 되는지, 인터넷은 사용 가능한지, 혹시 뜨거운 물로 샤워는 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대답은 전부 “OK”였다. 날뛸 듯이 기뻤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배낭을 던져놓고 바로 한국에 연락부터 했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여 살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있던 일들과 사진들을 여기저기 보내며 자랑을 해댔다. 핸드폰을 손에서 떼기가 너무도 어려웠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일단 노트북, 카메라 등 죽어가는 전자기기들을 충전시켜놓고, 마침내 샤워를 하러 올라갔다. 묵티나트도 3,760m나 되는 고지대에 있는 마을인데 완전히 적응되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태리 친구가 먼저 샤워를 하고 있어 나는 잠시 앞에 앉아 기다렸다. 그리고 곧 문을 열고 나왔는데 샤워장 안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Amazing, Fantastic” 나는 숙소가 떠나가라 웃었다. 기분 정말 최고였다. 걱정하던 토롱라패스를 무사히 넘고 게다가 뜨거운 물로 샤워라니, 그것도 몇일만에 샤워인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온몸을 박박 씻었다. 아마도 몸무게가 1KG은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푸짐하게 식사를 하고 각자 방으로 가 일찍 잠에 들었다. 이제는 끝이다. 정말 지쳤다, 그만 내려가서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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