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유 없는 호의, 불신, 마음의 거리. 내가 잠시 속해있는 이집트 여행 커뮤니티가 있다. 한 남자가 대화의 주제를 열었다. “오늘 피라미드에서 만난 현지인이 사진 찍어주고 가이드해주고 밥 사주고.. 정말 좋은 사람 같긴 한데 이렇게 따라다녀도 괜찮을까요?”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글에서 이집트인 몰래 적은 다급함이 보였다. 그에 따른 대답들. “안돼요”, “한국에서도 낯선 사람이 밥 사준다고 따라가지 않잖아요, 해외면 더 조심하셔야죠”, “한국이든 해외든 이유 없는 호의는 없습니다” 등등, 피하라는 의견이 전부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 생각도 같았다.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저 상황이었어도 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 30분 후, 그에게 대답이 왔다. “그 친구가 이집트 양식의 집을 보여주겠다며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가족들을 소개시켜줬어요. 이때까진 좋았는데 보답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으니 돈을 달라는 이야기였어요. 결국 흥정을 하다가 상당한 액수를 주고 나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그리고 나는 문득 중국이 생각났다. 중국에서도 본능적으로 이런 것들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모두에게 벽을 쳤던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조건 없는 호의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중국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나는 조건 없는 호의보다는, 이유 있는 접근이 차라리 편했다.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혼란스럽다, 어디까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네팔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길을 걷고 있었다. 정처는 없었고, 그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남자가 내게 붙어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고 나는 별 다른 거리감 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어디서 왔어?” – “한국에서” – “반가워, 난 네팔인이야” – “응 반가워” 그는 영어를 공부 중이며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의 영어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대화 중 한 골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사원이 있는데 한번 가볼래?” 그리고 골목 사이로 정말 사원이 하나 보였고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게 사원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가이드처럼. 여기부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그가 영어공부를 하기 위함인 줄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몇 사원을 더 둘러보았다. 마침내 그는 내게 말했다. “내겐 여동생이 있어, 네가 오늘 내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면 여동생에게 빵 하나만 사줄 수 있도록 돈 좀 부탁해” 그리고 그는 “그럼 신이 너를 지켜줄거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됐다고, 이제 그만 같이 다니자고 했다. 크진 않았지만 서운함과 배신감이 들었다. 그는 나를 따라오며 몇 번을 더 “신이 너를 지켜준대도?”라고 했지만, 내게 그것은 전혀 무의미했다. 줄곧 따라오는 그를 향해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사라졌다. 나쁜 친구는 아니었다. 이집트인처럼 강요는 없었고 간절히 부탁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나는 점점 더 독해지고 있다. 아닌 것은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하고 싶다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고 있다.
#2
표정이 없는 두꺼운 가면, 어쩐지 소슬한 느낌마저 든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무표정의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하다. 가면 안에서는 수많은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가면을 벗는 일은 거의 없다. 나를 감추고, 참고, 나대지 않고, 조용히 묻혀가고,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가는 한국사회에서 우리의 가면은 점차 두꺼워져만 간다.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무표정의 가면. 내가 돌아다니며 본 한국인 들은 대부분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한국에서 오랜 기간 사회생활에 내 얼굴에도 찌든 때가 가득했고 이윽고 본연의 얼굴이 가려져있었다. 우리는 가면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는 중이다. 세상과 어울려야 한다. 그렇게 무의식 속에 감추어버린 나의 참 얼굴과 표정, 그것들에 솔직해져야 한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다. 그들이 노래하면 같이 노래하고, 춤을 추면 함께 춘다. 먼저 하이파이브를 권하기도 하고 헤어질 땐 고마웠다고 포옹을 하기도 한다. 사실 ‘노력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가면을 벗고 진짜 내 얼굴을 보이며 마음으로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3
22일간의 네팔 여행을 마치고 인도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집을 나온 지 70일이 지났네요. 중국과는 너무도 확연히 다른 여행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던 시간이었어요. 네팔은 정말 여행하는 맛이 나는 나라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언젠가 꼭 다시 네팔을 찾을 생각이에요. 아직 가지 못한 절경의 코스가 많이 있어요. 그것들을 언젠가 다 돌아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생겼네요.
인도, 인도를 여행한 분들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좋겠다, 인도 정말 좋은데”, “또 가고 싶다 인도”라고 하시며, 동시에 상반되는 “사기꾼 많아요, 조심해요”, “냄새나고 더럽고”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해주셨어요. 그러니까 그 누구도 인도가 ‘왜!’ 좋은지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자유롭고 좋다”정도만 쓰여있고, 책을 읽어도 마음의 고향이라는 둥 도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만 듣고 직접 가서 느껴보려고 합니다. 지금껏 제가 들은 인도는 저와는 상당히 맞지 않아요. 더럽고 냄새나고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사기 치려 들고 사람 많고 복잡하고 질서 없고 막무가내인 그런 것들은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별 수 있을까요,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가서 직접 느껴보는 수밖에요. 인도, 가보면 알겠죠.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