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을 떠나고, 인도로 출발하는 날. 나는 예정대로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7시에 출발하는 네팔과 인도의 국경지대인 소나울리(Sonauli)행 버스를 타야 했다. 숙소를 함께 쓰던 영국인과 미국인 친구 둘은 곤히 자고 있었고 나는 그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배낭을 싸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대문을 열고 나오면 항상 같은 자리에 슈퍼가게 아저씨가 앉아있었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우리는 여느 날처럼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는 지도를 확인하며 버스터미널로 걸었다. 낮에는 오갈 수 있던 골목길이 새벽이 되고 막혀있어 한참을 헤맸다. 6시 30분, 나는 버스터미널 직원이 오라고 한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그리고 직원을 따라 버스로 가서 배낭을 트렁크에 싣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잠시 후, 누가 나를 툭툭 치더니 이 버스가 아니라고 내리란다. 직원을 따라왔을 뿐인데, 나는 구시렁거리며 트렁크에서 다시 짐을 뺐다. 직원은 내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한참을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해지고 버스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직원이 다시 나타나서 나를 다른 버스로 데리고 갔다. 짐을 트렁크에 싣고 그들이 지정한 자리에 앉아있는데 조금 후에 또 한 남자가 와서는 자기 자리란다. 나는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직원에게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니 앞자리로 바꾸어주었다. 다리를 넓게 펼 수 있는 비행기의 비상구 좌석 같은 곳이었다. 나는 이 자리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직원이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가장 뒷자리로 가서 앉으라고 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일 처리를 묻고 따지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었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다시 뒤로 가서 앉았다.
네팔의 도로는 몹시 거칠었다. 전혀 포장되어있지 않던가 포장되어 있더라도 파이고 손상된 곳이 많았다. 버스는 그에 따라 많이 흔들렸다. 책을 좀 보려고 하면 너무 흔들리는 통에 글을 읽을 수 없었고 심지어 물을 마시려면 턱받이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이런 버스에서 자는 것은 꽤나 익숙했다. 한 번 잠들었다 하면 아무리 흔들려도 두 시간은 잤다. 잠시 후 버스는 한 휴게소에 멈추었다. 나는 음료수를 한 병 사서 마시고 있었는데 서양 여자 둘이 내게 와서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 그리고 우리는 짧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 두 친구는 이태리 친구들로 서로 사촌 지간이었다. 나와 함께 이 버스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이들은 소나울리에서 내려 두 발로 인도 국경을 넘고 바라나시까지 갈 것이라고 했다. 나와 가는 길이 같았다. 그렇게 나는 바라나시까지 동행할 친구들이 생겼다.
한참을 덜컹거리며 달린 버스가 이윽고 멈췄다. 아침 7시에 카트만두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5시가 넘어 소나울리에 도착했다. 10시간을 달려왔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네팔과 인도의 국경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지점이었으므로 나는 자전거 릭샤를 잡아 국경까지 가자고 했다. 릭샤꾼은 나를 태우고 느릿느릿 페달을 밟았다. 차라리 걷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안개인지 먼지인지로 인해 뿌연 도로를 가다가 어느덧 혼잡한 지역에 이르렀고 수많은 호객꾼들이 나를 둘러쌌다. 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바로 네팔 출입국사무소로 걸어갔다. 직원이 내민 출국 서류 한 장을 쓰고 매우 간단하게 출국 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환전소로 가서 남은 네팔 화폐를 인도 화폐로 바꾸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 정확한 환율 계산이 어려워 맞게 바꾸어준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눈 감고 믿어보는 수밖에.
네팔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고 이제 걸어서 국경을 넘는 일만 남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Welcome to India라는 사인이 보였다. 저곳을 넘어가면 인도다. 난생처음으로 걸어서 넘는 국경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가 국경을 육로로 넘는 것은 매우 생소한 일이다. 대한민국은 지리상 거의 섬나라나 다름없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국경을 건널 기회가 없었다. 국가 간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유럽인들은 자동차, 기차, 자전거 등을 이용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여행한다. 중국에 국경을 맞댄 나라가 수십 나라다.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국경을 두 발로 넘나들며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언젠가 한국이 통일되어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와 스페인 혹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갈 수 있는 날이 오길 꿈꾼다. 국경에 들어서자 경찰이 여권을 확인하자고 우릴 잡아 세웠다. 무엇을 확인한지도 모르겠으나 여권 검사가 끝나고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고 의미 있게 밟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나는 마침내 고작 다섯 걸음으로 네팔을 건너 인도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인도 땅이다. 혼잣말로 “오, 인도다 인도”라고 지껄이며 얼굴엔 줄곧 미소가 띠어있었다. 순식간에 마주한 인도의 분위기는 아직 네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네팔보다 호객이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우리는 인도 출입국사무소로 갔다. 말이 좋아 출입국 사무소지, 인도에 발을 들이고 약 200미터를 더 가면 “STOP”이라는 작은 사인이 나오는데 거기서 멈춰야 간신히 보이는 작은 건물이었다. 그러니까 인도에 먼저 입국을 하고 알아서 출입국사무소로 찾아가 신고를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출입국사무소는 한국의 편의점보다도 작았다. 사람 10명 남짓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에서 한 동양인 남자가 나를 보고 “HI”라고 인사를 했다. 나도 그에게 무심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입국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동양인 남자가 내게 다시 와서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인 이세요?” 어찌나 반갑던지, 놀라서 나도 모르게 손을 꽉 잡았다. 이곳에서 한국인을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 방향만 같았어도 같이 갔을 텐데 그분은 나와 반대로 인도에서 네팔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인도 입국심사를 끝냈다. 바라나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거리 표지판에 바라나시까지 330km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였다. 수시로 멈추는 현지 버스를 타고 난잡하고 어수선한 교통체증을 뚫고 가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330km와 비교하면 안 되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이었다. 어느덧 6시가 넘고 어두워졌다. 혼자 있었다면 꽤나 두려울 시간이었지만 동행이 둘씩이나 있는 것이 큰 위안이 됐다. 바라나시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고락푸르라는 도시로 가야 했다. 저 멀리 고락푸르로 가는 버스가 마침 출발하려는 것이 보여 나는 뛰어가서 손을 흔들어 버스를 잡았다. 승무원이 짐을 트렁크에 쑤셔 넣고 억지로 문을 닫았다. 다행히 가방에 깨질만한 것은 없었다. 버스에 오르자 수많은 인도인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우리에게 몰렸다. 처음에는 불편하던 관심들이 이제는 익숙했다. 나는 적당히 눈웃음을 치다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리가 너무 좁았다. 직각으로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도 무릎이 앞자리에 닿았다. 의자가 어찌나 딱딱한지 중국 기차의 딱딱한 의자보다 더 딱딱했다. 의자는 뒤로 젖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앞사람이 의자를 뒤로 젖혔다면 내 무릎은 부서졌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가방도 무릎 위에 두었다. 인도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방을 따로 보관해두는 것이 아직은 불안했다. 이제 이러고 4시간을 가야 했다. 나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밖은 어둡고 안개마저 짙게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버스는 인도의 어딘가를 계속해서 달렸다.
고락푸르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옆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 그나마 다리를 뻗고 올 수 있었다. 인도의 길거리를 구경하는 것이 꽤나 흥미로웠지만, 그보다는 낯선 도시의 어둠에 두려움이 앞섰다. 우리는 이곳에서 또다시 야간 버스를 타고 바라나시까지 가야 했다. 우리를 향해 경적을 울려대는 수많은 오토릭샤 중 한 대를 골라 흥정을 하고 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잡아 탄 릭샤꾼은 미친 사람처럼 속도를 높였다. 한국이었으면 살인미수로 잡혀갈 수도 있을 만큼 막무가내로 도로를 휘저었다. 속도를 올리다가 앞 차랑 부딪힐 것 같으면 역 주행을 했고, 역 주행 중 차가 정면으로 부딪힐 것 같이 다가오면 오히려 더욱 속도를 올려 원래 차선으로 돌아갔다. 무서운데 헛웃음이 나왔다. 릭샤는 길가에 사람이 서있으면 멈추어 그들을 태웠다. 우리 세 사람은 배낭까지 있어서 더욱 자리가 꽉 찼는데 사람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지금까지 도로에서 듣던 경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차와 오토바이가 경적을 누르고 다녔다. 그러니까 경적을 계속 누르고 다니다가 가끔씩 뗀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경적소리에 옆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도대체 이들이 경적을 울리는 이유를 몰랐다. 뻔히 앞에 길이 막혀 비켜줄 수도 없는 상황인데도 끊임없이 경적을 울렸다. 나는 한 번은 너무 짜증이 나서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는 오토바이의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뒤에서 내게 나오라고 경적을 귀가 찢어져라 울려도 나는 길을 비키지 않았다. 사실 내 주변으로 사람이고 오토바이고 너무도 복잡해서 비켜줄 곳도 없었다. 잠시 후 길이 조금 열리고 경적을 울리던 오토바이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그가 내게 한 마디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으로 눈을 부릅뜨고 그가 나를 보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저 그렇게 나를 지나쳤다. 뒷모습에서 조금의 주저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나를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경적을 울린 것인가, 내가 느낀 바로 이들이 경적을 울리는 이유는 ‘그냥’이다.
릭샤가 멈추고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버스가 줄 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버스터미널인 모양이다. 나는 내려서 “바라나시”를 외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참 의아했다. “여기 바라나시 가는 버스 없어, 4km 더 가야 해”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를 이곳에서 내려준 것일까. 하도 인도에 사기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확실히 바라나시로 가는 버스가 없는지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정말로 없는 모양이었다. 별 수 없이 우리는 아까부터 줄곧 따라다니던 자전거 릭샤를 탔다. 어쩐지 오토릭샤보다 자전거 릭샤가 더 비싼 가격을 불렀다. 나는 이들이 합심을 하고 야밤에 인도에서 어쩔 수 없는 여행자를 뜯어먹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나는 흥정을 하려 했지만 어둡고 이기적인 인도의 밤에 흥정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꽤나 지쳐있어 아무래도 좋으니 얼른 바라나시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싶었다. 나는 바라나시에 도착할 때 까지는 바가지 쓸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전거 릭샤는 버스 한 대가 서 있는 황량한 길가에 섰다. 나는 이 버스가 바라나시로 가는 것이 맞는 지를 재차 확인했다. 기사에게 “바라나시로 가는 버스 맞나요?”라고 묻지 않고 “어디로 가는 버스예요?”라고 물어 확실히 했고, 버스에 탑승 후 앉아있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새벽에 정신없이 탄 인도의 버스가 도착했을 때 전혀 엉뚱한 곳이라면 끔찍할 것이었다. 모두가 나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라나시로 가는 버스가 확실했다. 버스는 여행자보다는 현지인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로 일명 ‘로컬버스(Local Bus)’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이 버스의 특징을 말하자면 가격이 싸고, 불편하다. 좌석이 빼곡히 붙어있어 엉덩이를 아무리 바짝 붙이고 앉아도 무릎이 앞에 닿았다. 다리를 어디에 두어야 편할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기대고 뒤척여보았지만 어떻게도 불편했다. 이 버스를 타고 밤새 가야 한다니 걱정이 앞섰다. 나는 야간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소변을 보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 한 친구에게 “화장실이 어디니?”라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이 인도라는 것을. 그저 흥미로운 대답과 나를 미친놈 보듯 하는 표정을 보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대답은 만족스러웠다. 그는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손가락으로 아무 곳이나 가리켰다. 나는 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당당하게 나무 옆으로 가서 소변을 보았다.
앞에 앉은 이태리 친구들이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며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오늘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여자 둘이었으면 정말 무서웠을 거야” 그리고 이것은 내게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같은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남자래도 안개가 자욱하게 낀 한 밤의 소슬하고 낯선 곳이 무섭긴 마찬가지이다. 밤 10시, 버스가 출발했다. 그리고 나는 이때부터 최악의 버스를 경험했다. 그동안 38시간의 기차, 12시간 동안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버스, 이틀 동안 산을 내려오던 짚(Jeep)차 등 많은 것을 타보았다고 자부했지만, 이 버스는 단연 최악이었다. 나는 버스가 출발하고 곧 졸음이 쏟아져 비니를 코까지 푹 눌러쓰고 마스크와 안대를 착용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잠에 들려 노력했다. 버스는 밤새도록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을 더 태웠다. 누군가 나를 툭툭 건드려 깨웠다. 얼굴을 전부 가려놓았기 때문에 누가 나를 깨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왜 깨웠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이 꽉 차서 자리가 없으니 두 자리를 차지한 내 다리를 치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나의 한 자리만 갖고는 몸을 웅크리고 쪼그려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 밤이 깊어지고 안개가 자욱해지면서 기온이 현저히 떨어졌다. 분명 버스의 모든 창문이 닫혀있었지만 어딘가로부터 마치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처럼 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너무 추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발에 감각이 없었는데 이것이 저려서 그런 건지 얼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온몸이 아팠고 특히 엉덩이와 무릎이 몹시 아팠다. 나는 물론 여행을 떠나와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에 와서 ‘안락’이라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웃긴 것이, 나는 그 상황에서 꽤 잘 잤다. 물론 수시로 깨긴 했지만 나는 꽤 잘 잤다고 할 수 있다. 어느덧 창 밖으로 해가 떴다. 영화 히말라야를 보면 황정민이 정상을 100m 앞두고 산자락에 매달려 뜨는 해를 보고 기뻐하며 “살았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문득 그것이 생각났다. 새벽 6시에 도착한다고 했던 버스는 결국 아침 10시가 되어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나는 카트만두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10시에 바라나시에 도착했으니 장장 27시간의 지독한 여행을 한 것이었다.
처음 맞이한 바라나시는 복잡했다. 그래도 마침내 따듯한 햇살에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우리는 달라붙는 사람들을 헤쳐가며 걸었다. 그리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지나자 이윽고 그토록 기다리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바라나시에 온 이유, 그것은 갠지스강이었다. 나는 여태껏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그리고 어디서도 보지도 못할 신비로운 풍경을 마주했다. 이곳은 마치 누군가 대지를 반으로 갈라 그 사이로 물을 흘려보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두 개로 나뉜 대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자아냈다. 한 편에서는 그저 황량한 모래사장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건물도 없었고 저 멀리서나마 희미하게 숲이 보일 뿐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신성시 여겨지는 다른 편으로는 강 줄기를 따라 가트(Ghat), 호텔, 빨래터 등 이들의 생활이 가득했다. 강기슭을 따라 수많은 배가 정박해있었다. 배는 색깔도 모양도 가지 각색이었다. 몇몇 모터가 달린 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배는 뱃사공이 직접 노를 젓는 배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싣고 유유히 갠지스강을 떠다니고 있었다. 강으로부터 계단까지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그 모습도 매우 다양했다. 직접 배를 만들고 있는 사람, 계단과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 갠지스강 물에 몸을 담고 씻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크리캣(Cricket)을 하며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좌판을 깔고 앉아 손수 만든 장신구를 파는 사람들 등 모두가 강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단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만큼 소, 개, 염소, 원숭이도 많았고 이들은 함께 상생하는 듯 보였다. 가만히 소를 보고 있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이 녀석들은 마치 사람처럼, 목적지가 있다는 듯 가다가 골목이 보이면 방향을 꺾어 들어갔다. 사람 두 명 지나다니기도 힘든 좁은 골목길에 소가 길을 막고 있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고, 어쩔 줄 몰라하면 인도인들이 소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비키라고 소리쳤다. 그러면 소는 느릿느릿 길을 텄다. 소는 길거리, 골목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대변과 소변을 휘갈겨놓았다. 인도에서는 바닥을 잘 보며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 똥을 밟고 미끄러져 온몸에 똥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바라나시는 갠지스강 말고도 골목길이 매력적인 도시다. 갠지스강을 등지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미로 같은 골목길이 나온다. 비록 골목길 바닥을 잘 보고 걸어야 하긴 하지만 바라나시에 온 사람들은 다들 이 골목길을 좋아한다. 정처 없이 골목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색적인 식당, 헤나(Henna)를 해주는 집, 옷 가게, 라씨(Lassi) 파는 집, 요가 배우는 집, 인도 전통 악기 배우는 집 등 다양한 재미가 있다. 나는 골목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에 놀라서 길을 비켰다. 한 사람이 같은 말을 소리치며 앞으로 걸어갔고, 그 뒤로 네 명의 사람이 들것을 어깨 위로 이고 따라가며 앞사람이 되풀이하는 말을 따라 소리쳤다. 그리고 들것 위에는 무언가가 여러 겹의 화려한 것들로 감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시체였다.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골목 사이사이를 빠른 속도로 지나며 줄곧 같은 말을 소리쳤다. 그들을 지나치던 많은 인도인들은 들것 위에 들린 시신을 보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이윽고 도착한 곳은, 화장터였다.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에는 약 10명 정도를 동시에 화장할 수 있는 터가 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성스러운 의식으로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이 공개적으로 거행된다. 하루에 약 200구정도의 시체가 화장된다고 하니, 화장터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을 성스러운 강으로 숭배한다. 이들은 갠지스강에 목욕을 하면 과거의 모든 죄업이 씻겨나가고, 생이 끝난 뒤 24시간 안에 바라나시에서 화장되어 강물에 유해를 흘려보내면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나시에서는 아침마다 갠지스강 물에 들어가 목욕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한 화장터에서는 이미 여러 구의 시신이 화장되고 있었다. 나는 따라온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갠지스강으로 들어가 시신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물에 넣었다 뺐다. 그리고 시신을 감싸고 있던 화려한 것들을 모두 벗겨내니 하얀 얇은 헝겊만이 남았다. 그들은 한 편에 자리를 잡아 나무를 허리 높이까지 쌓고, 시신을 쌓아둔 나무 위에 올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짚에 불을 붙여와 나무 밑으로 그것을 넣었다. 이윽고 나무에 불이 붙었고, 시신은 화장됐다. 시신의 화장이 끝나는 데는 정확히 3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누군가의 화장이 끝났다. 누군가의 화장을 끝낸 가족들은 시신의 유해를 모아 갠지스강에 던졌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화장터를 떠났다.
화장터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화장되는 모습을 경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웃는 이도, 우는 이도 없었다. 힌두교도, 여행자 그리고 죽은 자의 가족, 그 누구도 울지 않았다. 아니, 울면 안 되었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화장을 할 때 누군가 옆에서 울면 죽은 자가 극락으로 가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울어선 안됐다. 조금은 가혹하기까지 한 이 믿음 때문에 화장터에서 여자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오늘도 바라나시에는 죽음을 앞둔 혹은 이미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고, 마니카르니카 가트의 화장터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강줄기를 따라 길게 늘어선 가트를 걸었다. 중심에 있는 가트로부터 멀어지면서 점차 거리는 한가하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는 어느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한 부자가 있었다. 아버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소 두 마리를 데리고 갠지스강으로 들어갔다. 가끔 말을 듣지 않으면 소리치기도 했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세게 때리기도 했다. 남자가 소를 강으로 몰아넣은 이유는 씻기기 위해서였다. 솔 같은 것으로 박박 문지르기도 하고, 엄마가 애기의 얼굴을 씻겨주듯 소의 얼굴을 두 손으로 무자비하게 비벼댔다. 그리고 아들, 나이가 10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왜소한 남자아이는 늠름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는 큰 소에게 고함치며 몽둥이로 엉덩이를 세게 때려 갠지스강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심지어 이 꼬마는 순식간에 소의 등에 올라타서 얼굴이며 몸이며 마구잡이로 씻기기 시작했다. 꼬마는 다 씻긴 소는 밖으로 내보내고, 또 다른 소의 등에 올라타 씻기기를 반복했다. 나는 가다가 잠시 멈추어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현대에는 보기 어려운 낡고 오래된 건물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것이 과연 현시대에 존재하는 도시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천 년은 과거로 넘어온 듯했다. 지금 이곳에서 여행자의 모습을 지우고 “여기가 몇 세기인지 맞추어 보시오”라고 문제를 낸다면, 과연 몇 명이나 맞출 수 있을지, 누구도 이곳이 21세기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새벽 5시,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함께 방을 쓰는 친구들이 모두 자고 있어 나는 조용히 방문을 빠져나왔다. 5시 30분, 나는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나갔다. 내가 이른 새벽부터 나온 이유는 보트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나가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다만 걱정이라면 한 가지, 안개가 몹시 심하게 내려앉아있었다. 계단에 앉아 강에 정박해 있는 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곧 한 남자가 터벅터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내게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와서 “일출 보러 오셨어요?”라고 물어 나는 그가 한국인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순박해 보였고 말투에 은근한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청년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세 사람이 더 오는 것이 보였다. 소리의 진동은 안개를 타고 와 내 귀에 쏙쏙 꽂혔다. 그들은 한국인 모녀, 어머니와 두 딸이었다. 그리고 나는 미리 이들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 후로도 몇 명의 한국인이 더 모여 우리는 뱃사공을 만나 배에 올랐다.
여전히 어두운 새벽, 안개는 도무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그마한 나룻배에는 나와 경상도 청년, 그리고 세 모녀와 각자 온 한국인 세 사람, 이렇게 총 8명이 모였다. 뱃사공은 삐걱삐걱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노를 능숙하게 저었다. 건성건성 젓는 것 같이 보여도 한 번 저을 때마다 배가 앞으로 밀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태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뱃사공은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갠지스강을 유유자적 거닐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때문에 몰랐었는데 강 위에는 우리 말고도 배가 꽤 많이 떠있었다. 모두 우리처럼 일출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안개가 자욱이 낀 갠지스강 위의 나룻배에 모여 앉아 운치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어, 저기 해 떴다!”라고 소리쳤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저 멀리 새빨간 태양이 어느덧 꽤나 올라와있었다. 다만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어 태양은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했다.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 수천 년의 역사를 건너온 갠지스강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룻배에 앉아 뿌연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무런 말 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매우 낭만적이었으며 몽롱했다. 바라나시에 일출을 보러 온 날 마침 이렇게 자욱한 안개가 끼다니! 몽롱한 새벽의 일출은 우리에게만 부여된 특별한 낭만이었다.
나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가족을 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보트에서 함께 일출을 본 세 모녀 말이다. 나는 이들을 보고 줄곧 “어린 왕자들을 보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꿈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 이들은 이기적일 만큼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만 봤다. 대학생인 막내딸은 별을 몹시 사랑하는 아이였다. 별을 보며 예쁘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많이 보았지만, 별의 존재 자체를 이토록 순수하게 사랑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는데, 막내딸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외부의 빛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든 뒤 눈 옆에 갖다 대어 자신만의 작은 영화관을 만들었다. 나는 다가가 물었다. “별 보여요?” 막내딸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있어요 세 개!” 고작 세 개의 별을 그토록 오래 보고 있던 것인가. 나는 내친김에 히말라야 트레킹 중 찍었던 별과 은하수 사진을 보여주며 이곳에 꼭 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막내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맏이 언니, 언니는 세 모녀의 가이드이자 보호자였다. 마치 얼마 전, 내가 엄마와 함께 스위스에 다녀올 때처럼 언니도 엄마를 딸처럼 지극히 챙기고 보호했다. 한 번은 저녁식사자리에서 모녀의 엄마가 우리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언니를 보았는데, 그때 언니가 엄마를 바라보던 표정은 연인들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엄마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두 눈은 반달 모양을 만들어 엄마를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교사인 엄마. 안개가 자욱한 새벽, 약속된 장소에서 꽤나 긴장된 상태로 사람들을 기다리던 내게 아무런 거리감 없이 다가와, 어쩌면 평소보다 더욱 두꺼웠을지도 모를 마음의 벽을 한 방에 부숴버렸다. 엄마 앞에서 나는 그저 한낱 초등학생이었다.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이해, 관심, 배려, 사랑, 겸손 등 수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바가지 가격으로 여행객을 우롱하는 인도인에게 강력한 흥정은 필수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 다닌 이틀간 나는 흥정을 할 수 없었다. 몇 천 원 안 되는 돈으로 흥정하지 말자며 인자하게 웃으시는 통에 도저히 나는 그들에게 가격을 깎을 수 없었다. 세 모녀는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챙기고 예쁜 말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식당엘 가도 “여기가 바라나시에서 가장 좋은 식당인 것 같아”라고 말했고, 내가 보기엔 그저 사기 치려 드는 인도인일 뿐이었는데 그를 보고 “저 인도사람 참 좋은 사람 같아”라고 했다. 모녀와 함께 지낸 이틀간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도 바라나시는, 꽉 막혀버린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모습과 많이 달랐다. 나는, 정말 어린 왕자를 만났다.
나는 경상도 청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 친구에게 “맥주 한잔 하고 들어갈래요?”라고 물어본 것을 보고 알았다. 23살의 비교적 어린 친구는 또래에 비해 굉장히 겸손했다. 순수하고 허영 없는 모습에 나도 벽을 내려놓은 것 같다. 나는 이 청년과 세 모녀와 함께 바라나시에서 지내는 마지막 이틀간 같이 다녔다. 혹시나 나와 이 청년이 세 모녀의 여행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너희 덕분에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라고 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기분이 좋던지. 마음 같아서는 모녀의 다음 목적지인 델리(Delhi)까지 쫓아가서 지켜주고 싶었다. 바라나시는 그렇게 크지 않은 마을이다. 이틀이면 다 둘러볼 수 있고 일주일이면 친구가 생길 정도이다. 바라나시의 매력이라면, 채 일주일도 지내지 않은 내가 마치 현지인처럼 골목골목 인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다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도로 강하게 거리감을 두는 내가 그러고 다닌다니, 웃기는 노릇이다. 숫제 이 도시가 꽤나 좋아졌다.
바라나시에서 지낸 사람들이라면 모두 동의하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시간이 어떻게 간 줄 모르겠어” 그리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바라나시는 마약 같은 곳이다. 바라나시에서 할 것이라곤 골목을 쏘다니며, 가트를 걸으며 구경하고 먹고 하는 것이 전부지만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면 며칠이 지나있다. 이윽고 바라나시를 떠나는 날이 왔다. 나는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Khajuraho)로 가야 했다. 인도에서 기차는 처음이었다. 경상도 청년도 나와 같은 날 콜카타(Kolkata)로 떠나는 것이었는데, 참 착하고 순박한 그는 나보다 5시간은 늦게 출발하는 것이었지만 기차를 처음 타는 나를 위해 일찍 바라나시 역으로 함께 와주었다. 그리고 경상도 청년은 내게 기차 타는 법을 알려주고 기차 칸 앞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보기 드물게 착하고 호감이 가는 친구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도 쉽사리 기차로 오르지 못했다. 헤어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매우 아쉬운 순간이었다. 나는 어렵사리 청년을 뒤로하고 기차에 올랐다. 이제 인도의 다음 도시,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인도 카주라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