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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ABA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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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26. 2018

BABA PROJECT – 카주라호(Khajuraho)

카주라호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싣고 나는 자연스레 인도 기차와 중국 기차를 비교하게 됐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 꽤 많았다. 먼저 기차 칸의 등급, 인도는 중국보다 조금 더 잘게 구분되어있었다. 크게 보아 에어컨이 있는 구역과 선풍기가 있는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그리고 에어컨이 나오는 구역은 또다시 세 등급으로 구분되어있었고, 선풍기가 나오는 구역은 SL(Sleeper Class)로 그저 누워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머지 구역은 앉아서 가는 곳이었는데,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가난한 현지인들 이 이곳을 이용한다. 누워갈 수 있는 칸 중에서는 SL의 가격이 가장 저렴하기에 대부분의 배낭여행자는 이 칸을 선호했고, 나 역시 인도 기차여행의 시작은 SL로 했다. 그러나 지독하게 찌는 인도의 여름에는 에어컨 칸을 선택해야 할 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자리를 찾는 것 까지는 중국의 기차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첫눈에 보인 기차의 분위기, 이곳은 마치 교도소 같은 느낌이었다. 중국 기차는 창문이 매우 커서 낮에는 바깥의 햇볕이 실내로 들어와 밝고 따듯한 분위기였으며 밤에는 전등이 환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인도 기차는 창문이 기차에 비해 몹시도 작아 햇볕이 충분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밤이나 낮이나 우중충했다. 심지어 그나마 있는 작은 창문도 몇 개는 철문으로 굳게 닫아놓아서 정말 교도소가 따로 없었다. 나는 자리를 찾아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마 후 기차가 출발했다. 인도 기차는 지연으로 악명이 높다. 5시간, 10시간 그리고 20시간 이상 지연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심지어 출발 역인 경우에도 몇 시간이고 지연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운이 좋았는지, 우리 기차는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출발했다. 나는 어쩐지 중국 기차가 그리웠다.  


 나는 자기 전에 근처 빈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철컹철컹 부서질 듯 흔들리는 기차에서 몇 시간을 집중하다 보니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멀미를 하나 싶어 노트북을 덮고 자리로 가서 누웠다. 그리고 책을 좀 읽으려는데 아무래도 줄곧 속이 너무 안 좋고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심지어 조금 후에는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멀미의 증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도 여행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소위 ‘물갈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 지독한 병균이 내 장에도 침투한 모양이었다. 인도에서 단연 조심해야 할 것이라면 ‘물’이다. 인도에서 물을 잘못 먹다간 이 물갈이에 걸리게 되는데 이것을 조심하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음식은 물에 의해 조리되니 길거리에서 음식을 잘못 먹어도,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구다가도, 또는 슈퍼 주인이 페트병에 몰래 수돗물을 채워 판 것을 마셔서도 걸릴 수 있다. 그러니까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물갈이라는 것이 단지 설사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갈이에 걸리면 먼저 배가 꾸르륵거리며 아프기 시작하고, 울렁거리고 구토가 몰려오며, 마침내는 고열까지 발생한다. 마치 장염과 몸살을 동시에 앓는 듯한 상태이다. 아무튼 나도 무엇을 잘못 먹은 건지 모르겠지만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꾸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위로는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열이 나서 한기가 돌았는데 나는 침낭 안으로 푹 들어가 지퍼를 끝까지 채웠다. 침낭마저 없었으면 정말 지독하게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올라오는 구토를 꾹 참았다. 기차에서 구토까지 했다간 정말 서러워질 것 같았다.  



 기차의 창문은 철문으로 닫혀있었지만 견고하진 못했다. 철문은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열렸다 닫혔다 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기차가 철로를 달리는 소리가 아무런 장애 없이 들려와 기차가 부서지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나는 힘겹게 잠에 들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때, 완전히 나의 잠을 달아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눈을 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 1층에 있는, 그러니까 내 밑에 있는 러시아 남자가 “가, 꺼지라고!”라며 화를 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보자, 한 인도 남자가 러시아 남자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Hungry, Give me, Your phone”등 기괴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침대에 있던 페루 남자도 그것을 보고는 그를 도와 인도 남자보고 꺼지라고 소리쳤다. 이것이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있는 나를 보고 페루 남자가 “짐 조심해”라고 일러줬다. 그제야 그 인도 남자는 주변에 있던 친구들과 낄낄대며 기차를 빠져나갔다. 그 인도 남자는 거지이자, 소매치기이자, 양아치였다. 그것은 구걸이 아니라 시비였고 조롱이었다. 인도 기차 SL의 최대 단점은 이런 잡상인과 거지, 소매치기들이 자유롭게 기차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밑에 숨겨놓은 짐이 걱정되어 얼른 밑으로 내려가 보았는데 다행히도 무사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올라가 누운 나는, 잠이 완전히 달아나버렸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데 웬 미친놈까지 보아버렸으니 잠은 다 잔 것이었다.  


 새벽 6시, 바라나시에서 출발한 기차는 13시간의 여정을 마치고 카주라호(Khajuraho)에 도착했다. 1시간 정도 지연된 것이었는데 인도에서 이 정도 가벼운 지연은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거지가 내린 후 기차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몸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나름 틈틈이 잠도 잘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고 역시나 수많은 호객이 붙었다. “오토릭샤?”, “숙소 있어요?”, “어디 가요?”, “한국사람?” 이들은 몹시 정신없게 굴었다. 몸이 아프니 하나하나 거슬리고 짜증 났다. 인도인이 쓰는 호객 영어가 어찌나 듣기 싫던지, 이들은 내게 한국말로도 호객을 해왔는데 그것이 너무 싫었다. 나는 릭샤꾼 중 한 사람을 골라 숙소까지 가격을 물었다. 뻔뻔하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고 나는 짜증 가득 섞인 표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가격을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보다는 조금 더 받아야 한다며 지금은 어둡다는 둥, 거리가 멀다는 둥 말이 많았다. 이들은 내 표정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끊임없이 내게 바가지를 씌우려 들었다. 나는 줄곧 돈을 더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떠들어대는 그의 말을 자르고, 알겠으니까 일단 가자고 힘없이 말했다.  


 그의 오토릭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오토바이의 속도에 맞불어오는 새벽바람이 몹시 찼다. 오토바이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들리던 평화를 깨고 릭샤꾼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 “남한이야, 북한이야?”, “하하하”, “북한 나쁜 나라”, 또 같은 질문이다. 인도에 온 후로 수천 번 받은 질문이다. 인도 사람들은 한국인만 보면 똑같은 패턴의 질문을 마치 짜기라도 한 듯했는데, “나는 남한 사람이야”라는 대답만 하루에 수없이 해야 했다. 그리고 질문의 끝은 항상 영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이런 식의 대화에 질려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대답만 간신히 하며 가고 있는데, 이제는 릭샤꾼이 오토바이를 아주 멈추어 세워서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카주라호의 사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고 앉아있는 것만도 내게는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나는 이윽고 정말 폭발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이 설명이 끝나고 나면 분명히 돈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지겨웠고 스트레스였다. 나는 설명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매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저기, 됐으니까 그냥 좀 가줄래?” 그러자 그는 “너 바쁘구나, 알겠어”라고 하며 다시 릭샤를 몰았다. 글쎄, 모르겠다 그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물론 카주라호에 온 외국인이 반가워서 좋은 뜻으로 다가온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인도인을 믿지 않는다. 여행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사기를 치려 드는 몇몇 인도인들 때문에, 나는 그들에 대한 모든 신뢰를 없앴다. 모두를 믿어 상처받고 몇 좋은 사람을 얻을 바에야, 나는 차라리 모두에게 마음의 문을 닫겠다. 그러니까 결국 그가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나는 그저 얼른 숙소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마침내 숙소 앞에 도착했다. 릭샤꾼은 어디 가려면 연락하라며, 내게 연락처를 물었는데 나는 괜찮다고 뿌리치고 숙소로 들어왔다. 의미 없는 번호들이 핸드폰에 저장되어 어지럽혀지는 것이 싫었다. 나는 로비에 앉아 체크인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숙소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는데, 그도 내게 한국말로 대답했다. 우리는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나는 그와 함께 아침을 먹으러 숙소 옥상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아무래도 속이 좋진 않았지만 비어있는 것보단 무엇이라도 먹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그는 서울에 사는 24살의 친구로, 비행기 조종사가 꿈인 친구였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한 달간 인도 배낭여행을 나온 것이었는데 혼자 다니는 여행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에 선함이 묻어있는, 부모님 말을 잘 듣는 보기 드문 착한 친구였다. 요즘엔 떠들썩하고 유쾌한 사람보단,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 좋다. 식사를 마치고 친구는 내게 ‘카주라호 사원’을 구경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것인지 물었다. 그러나 나는 물갈이를 하는 중이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늘은 쉬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침대로 돌아와 누웠고, 친구는 나갔다. 


 낮에는 사실 거의 잤다고도 할 수 없을 만큼 화장실을 들락였다. 본격적으로 물갈이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잠에 들라치면 꾸르륵거려 화장실로 가서 설사를 했고, 누우면 곧 또다시 배가 꾸르륵거렸다. 아침에 먹은 것을 아무것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듯했다. 인도의 물갈이는 소문으로 듣던 만큼 지독했다. 아마도 병균의 종류가 다른 탓이겠지만 한국에서 가져온 지사제로는 약효가 없기 때문에 더욱 골치 아프다. 그래서 인도의 약국에 가서 지사제를 구해 먹어야만 하는데, 혼자 열이 펄펄 끓는 채로 나와 끊임없이 들러붙는 인도 사람들을 뚫고 약국까지 가는 것이 여간 서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 됐든 다행히도 나는 탈수 증세가 있거나 열이 심하게 나거나 하진 않아서 굳이 약을 사러 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점심식사를 하고 한 번 설사를 했고 저녁식사를 하고도 한 번 설사를 했다. 그러나 아침만큼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점점 낫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몸이 많이 좋아지면서 깨지도 않고 꽤 잘 잤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내가 아니라 이 친구였다. 표정이 반쯤 죽어가던 친구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이야기했다. “형, 오늘은 제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이유인 즉, 물갈이에 걸려 어젯밤 새도록 수 차례 설사를 한 것이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이랬다. 보통 여행자들은 인도인이 걸어오는 말을 대부분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이 친구는 그러지 않았다. 정말 착한 이 친구는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사기를 당하더라도 모든 사람과 친해지려는 성격, 덕분에 이 친구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많이도 뜯기고 다녔다. 어젯밤에도 한 인도인이 말을 걸어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도 사기 치거나 뜯어먹으려는 괘씸한 사람은 아니었고 정말 호의로 다가온 한 인도인이었던 것 같다. 인도인은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친구는 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나쁜 의도는 없어 보여 집으로 따라 들어가 가족들과 인사하고 저녁식사로 생선요리를 대접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생선으로부터 물갈이가 시작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생각해보면 카주라호는 인도 내륙 가운데 있는 곳으로, 신선한 생선이 있기에는 바다가 너무 멀었고 옆에 있는 호수에서 잡았다고 하기엔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이 친구가 걸린 물갈이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독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친구를 뒤로하고 나는 ‘카주라호 사원’으로 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도 카주라호에 있는 사원군은, 고대 인도의 ‘성 지침서’인 ‘카마수트라’를 토대로 조각된 남녀의 교합 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조각상이 매우 정교하고 대담해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사실 카주라호로 오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오로지 이 사원을 보기 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꽤 비싼 입장료를 요구하는 사원은, 밖에서 보기에 매우 들어가고 싶을 만큼 잘 관리되어 있었다. 사원 주변으로 푸른 잔디가 깔려있어 사람들이 쉬고 있는 것이 보였고, 인도답지 않게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사원의 조각을 가까이서 보고 싶기도 했지만 잔디나 벤치에 누워 책을 읽으며 햇볕을 내리쬐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는 사원 매표소에 입장권을 사러 갔다. 외국인 500루피, 게스트하우스 다인실 숙소 값이 하루 300~500루피를 생각하면 여행자들에게는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그리고 한 인도인이 옆으로 와서 입장료를 계산하는데 달랑 30루피를 건넸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다, 현지인과 외국인의 가격이 다르다는 것은. 나는 그에게 500루피를 영수증을 한 번 보여주고 살며시 웃어보았는데 그의 대답이 참 잊혀지지 않는다. “Yes, this is India” 


 사원 입구에는 X-ray가 있었고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도대체 왜 ‘카메라 삼각대’를 빼앗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해도 그들의 대답은 “Professional”이 전부였다. 아마도 전문적인 사진을 찍을 까봐 그런 것 같은데, 나를 찍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별 수 없이 삼각대를 포기하고 사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했다. 눈 앞으로 초록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사이사이 우뚝 솟아있는 사원이 더욱 고풍스러워 보였다. 카주라호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도로에서 오토바이들이 비교적 경적을 울리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도에서는 드물게 참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이곳은 그 안에서 더욱 한적하고 아름답게 잘 꾸며진 사원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사원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원 벽면을 따라 늘어선 조각들은 매우 정교했다. 남자가 무릎 위에 앉은 여자의 가슴을 만지는 조각부터 시작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담한 조각이 많았다. 심지어 동물과 인간이 성교를 하는 조각도 있었고 그들의 성기가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었다. 이것이 1,000년 전 그러니까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놀라웠다. 나는 사원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무 그늘 아래 조용해 보이는 한 벤치에 가방을 베고 누워 글을 읽었다.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 석가모니가 끊임없이 자아에 침잠하고 성찰하여 이윽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내용을 다룬 책이다. 인도에 와서 싯다르타를 읽다니, 정말 최고다! 여행하며 해당 나라와 문화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나는 인도에서 여행하는 한 달간 부지런히 힌두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의 삶을 면밀히 지켜보려고 한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원 잔디밭을 거닐기도 했고, 집중해서 사원 조각을 감상하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그토록 하고 싶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누워 책을 읽기도 했다. 나는 슬슬 배도 고파졌고 친구는 좀 나아졌나 궁금해져 숙소로 돌아갔다. 오후 5시, 방의 전등은 전부 꺼져있었고 그 안에서 친구는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방에 들어온 소리에 금방 깼다. 나는 친구에게 몸은 좀 괜찮은지 물었으나, 아직 나아지지 않았고 심할 땐 구토도 올라온다고 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약국으로 가기로 하고 나왔다. 지긋지긋한 호객꾼들, 역시나 또 붙어대었는데 이 친구는 또 일일이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친구는 나름 무시한다고 지나치는 것 같았지만 꼭 “No, No”라도 대답했다. 나는, 너의 대답이 이 친구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말라고, 약국으로 바로 직행하자고 말했다. 정말 답답하게 착한 친구였다. 우리는 곧장 약국으로 가 인도 지사제를 샀다. 인도의 약국은 처음 와본 것이었는데,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약사가 아니었다. 그는 과자 사이에 파묻혀 있는 약을 꺼내어 주었다. 그래도 약 이름을 미리 알아보고 간 터라 의심 없이 받아오긴 했지만 믿음이 전혀 안 갔다. 그리고 우리는 근처 인도인이 하는 한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나도 아직 물갈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 친구와 약을 하나씩 먹고 곧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숙소 로비에 앉아있는데 한 동양인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한국사람이에요?” 그리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본 그녀는 23살, 혼자 여행 중이었다. 23살의 어린 나이에 여자 혼자 인도에 온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더욱 감명 깊었던 것은 앞으로 7개월간 더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동남아시아 몇 개국을 돌아온 것이었고, 인도에 온지도 꽤 됐었다. 나의 23살은 어땠나 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친구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당시 군대를 전역하고 썰매장에서 안전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복학 준비를 하고 있던,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한 청년이었다. 31살의 늦은 나이에 큰 결심을 하고 나온 나와 지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가 다시 한번 큰 아이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 자전거를 빌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녀볼 생각인데 혹시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매우 유쾌하고 발랄한 그녀는 바로 좋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와 친구 그리고 그녀와 함께 셋이 함께하게 됐다. 


 그녀와 친구는 서로 매우 다른 성격이어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재미있었다. 친구는 착하고 조용하고 순한 성격이라면 그녀는 유쾌하고 발랄하고 웃음과 장난이 끊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이들의 보호자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내 나이가 그렇게 됐나 조금은 씁쓸했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고 자전거를 빌렸다. 굉장히 무거우면서 다 부서질 것 같은 자전거 3대였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지도도 보지 않은 채 페달을 밟았다. 큰길을 하나 지나고 작은 골목을 지나니 어느덧 길거리에 즐비하던 상점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길이 눈 앞으로 주욱 나있어 우리는 그저 그 길을 따라갔다. 나는 그토록 무겁게 가지고 다니며 몇 번 쓰지도 않은 스피커를 드디어 꺼내어 노래를 틀었다. 이런 날을 위해 갖고 다닌 것이리라, 우리는 평야를 가르며 길게 늘어선 길을 달리며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평야는 어느덧, 노란 유채꽃 밭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인도가 맞는가, 이곳은 제주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유채꽃의 밝은 빛이 들어왔고, 자유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얼굴에 부딪혔다. 감미로운 노래가 우리 주변으로 울려 퍼졌고, 이따금 우리 곁을 지나가던 인도인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느껴지는 이 자유로운 행복으로, 우리는 여행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한참을, 그저 거닐다가 이르게 된 어느 곳을, 갑자기 선물처럼 받은 그곳을, 처음 만난 3명의 여행자가 만나 부서져가는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달렸다.  


 얼마쯤 갔을까, 작은 마을이 보였다. 그리고 커다란 목장 같은 곳이 보였고 적잖은 수의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그 옆에서 마을의 아이들이 스무 명쯤 나와 연을 날리기도 하고 그저 뛰어다니기도 하며 놀고 있었다. 근처로 커다란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한 여자가 도르래를 이용해 바가지에 물을 뜨고 있었고, 다른 여자는 옆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 이곳에 자전거를 멈추어 세웠다. 그리고 셋 다 큼지막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를 본 몇 아이들이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그곳에 있던 스무 명 가까운 아이들이 그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가만히 보았는데, 그녀는 아이들의 이름을 묻고 손바닥에 펜으로 그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주고 있었다. 나는 정말 보호자라도 된 듯 아니, 오빠라도 된 듯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한 편에서는 친구가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태워주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자전거가 꽤나 타고 싶던 모양이었으나 키가 작아 페달을 밟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는 아이를 안장에 앉히고 자전거를 끌며 태워주었는데, 그녀의 주변에 모여있던 아이들 중 절반은 다시 자전거를 따라 뛰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내게 한 아이가 이리 와보라고 했다. 그 아이 곁으로 가자, 자기가 날리고 있던 연을 내게 주며 날려보라고 했다. 아이가 갖고 있을 때는 하늘을 훨훨 잘도 날던 연이 나에게로 오더니 바닥으로 꼬꾸라져 바닥에 꽂혀버렸다. 나는 머쓱해하며 다시 아이에게 연을 주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나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었다. 



 나이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청년이 우리에게 와서 능글맞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에게 꽃 이라며 작업을 걸기도 했다. 웃기지도 않는 놈이었다. 그 청년은 우리에게 마을을 소개하여주겠다고 했다. 어느 여행 책자에도 나오지 않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당연히 우리는 모두 이곳을 구경해보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한국말로 인사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이유를 들어보니 이 작은 마을에 있는 학교에 한국어 수업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한국인 선생님이 있냐고 물었는데 지금은 한국에 돌아갔다고 했다. 선생님은 매년 이곳에 와서 6개월간 수업을 해주고 6개월은 한국에서 지낸다고 했는데, 누가 이런 시골마을까지 와서 한국어 수업을 해주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청년을 따라 마을을 구경했다. 조그만 집이 여러 채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사원 몇 개가 있었다. 직접 와서 가까이서 보니 더욱 작은 마을이었다. 많은 마을 어르신들이 나와서 앉아있었고, 지나가는 우리를 보면 “나마스테”하고 인사를 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그 누구도 우리에게 호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에 이르렀는데 마을의 크기에 비해서 학교는 꽤 컸다. 대여섯 개 되는 교실에 아이들이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곧 선생님이 직접 나와 우리에게 인사하고 학교를 설명했는데, 우리는 직감적으로 나중에 돈을 요구하겠구나 생각했다. 학교에 있는 모든 아이들의 눈이 우리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아이들에게 한국어 강의하는 척을 해보고 싶었다. 한 아이에게 보드마커(Board Marker)를 빌려 칠판에 “안녕하세요 = Namaste”라고 적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몇몇 아이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따라 했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우리는 그렇게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되어 나가려는데 역시나 선생님이 우리를 잡았다. 이 학교에 대한 의견을 적어달라고 부탁해서 따라 들어간 방에서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이를 건넸다. 그동안 이곳에 왔던 사람들이 돈을 주고 간 내역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기부를 부탁했는데,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마을 구경을 마치고 다시 우물이 있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놓고 간 자전거가 걱정됐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그곳에 쉬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친구는 다시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태워주며 놀고 있었고, 나는 근처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전거를 태워주던 친구가 무언가에 놀라 자전거를 멈추었다. 자전거를 뒤따라오던 한 아이가 갑자기 자전거 뒤에 매달리다가 넘어진 것이었다. 피가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이 살갗이 하얗게 살짝 갈려있었다. 몹시 놀란 친구가 혹시 우리에게 약이나 밴드 같은 것 있냐고 물었지만 당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때, 아이들보다 조금은 큰 여자아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여자아이는 아마도 아이들의 큰언니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이 여자아이는 넘어진 아이를 우리 앞으로 데리고 오더니 상처 난 부위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보이며 “이렇게 다쳤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눈치챘다. 그러니 이 아이의 눈빛은 그런 의미가 분명했다.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순간 주변에 모여 있던 많은 아이들의 눈이 두렵게 느껴졌다. 심지어 아이들의 부모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친구에게 “아이 상처 우리 때문에 그런 것 아니니까 당황하지 마요, 우리 당황하는 거 보고 이 여자애가 기회다 싶어서 돈 뜯으려는 것 같으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늦었으니 우리는 이만 가봐야겠다고, 친구들을 데리고 급하게 자전거로 올라탔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조금은 도망치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이 마지막 날을, 카주라호에서 지내며 가장 좋았던 날로 꼽았다. 나는 인도에 와서 가장 좋았던 날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 지점에 멈추어 길바닥에 누워 노래를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교복 입은 인도 학생들이 우리 주변으로 모여,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웃었다. 햇볕은 매우 따듯했으며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순박했다. 평화롭고 한적한 시간이었다. 비록 당황스러운 상황이 몇 번 있었지만, 인도 사람들을 새롭게 본 계기가 됐다. 이윽고 카주라호를 떠나는 날이 왔다. 나는 아침 7시 30분 버스를 타고 떠나야 했고, 친구는 9시 기차를 타고 떠나야 했다. 그녀는 밤 11시 기차였다. 나는 새벽 6시 30분에 눈을 떴고 친구도 나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출발 준비를 마치고 숙소 로비로 우리는 같이 나왔다. 친구는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조금 일찍 일어났다고 했다. 마침내 나는 먼저 떠날 시간이 됐다. 친구는 숙소 현관까지 나를 따라 나왔다. 나는 친구에게 “아프지 말고, 몸 건강하고, 여행 즐겁게 마치고 우리 한국에 돌아가서 만납시다, 조종사 꿈 꼭 이루길 바래요”라고 했다. 친구도 내게 인사를 하며 줄곧 “아쉬워요”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친구는 혼자 여행하는 것이 처음이었고, 여행에서 이런 헤어짐에는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만남과 헤어짐이 익숙해져도, 정들어버린 사람과 작별하는 것이 아쉽긴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어쩔 수 없으니,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나는 그와 진하게 인사하고 각자의 갈 길로 헤어졌다. 다음 목적지는 인도 남부, 경제도시 뭄바이(Mumbai)를 거쳐, 해안도시 고아(Goa)로 향한다. 엄청난 장거리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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