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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ABA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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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16. 2018

BABA PROJECT – 야딩, 청두, 충칭

# 야딩(YADING)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야딩으로 갔다. 어제는 예행연습이었다면 이번엔 본격적인 야딩의 고산 트레킹이다. 정상의 높이는 무려 4600m, 얼마 전에 올랐던 스위스 마테호른의 높이(4,478m)와 비교해서 큰 차이는 없지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마테호른까지는 기차를 타고 올라가 걸어 내려오는 코스였다면 이곳은 걸어서 오르내리는 코스이다. 아무리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고산병 약과 산소를 챙겨 가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입구에서 산소는 살 수도 있었으나 내가 고산에서 얼마나 잘 버티는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나는 티베트의 고산지대와 네팔의 히말라야에 등반할 예정이기 때문에 나의 정도를 알아야만 했다. 특히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는 해발 5,416m로 일반인에게 허용된 가장 높은 지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금 나에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걱정 없이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러 번 차를 갈아타고 트레킹의 시발점까지 들어갔다.  


 고산지대를 등반한다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내내 숨을 헐떡인다고 봐도 좋다. 쉴 때 조차도 말이다. 나는 다소 괜찮았는데, 친구들은 걸음을 시작하자마자 모두 숨을 헐떡였다. 다 같이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조금씩 올라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쉬지는 않고 사진을 찍었다. 여자들이란 정말이지 사진을 찍는 데는 열정적이었다. 그러면서 내 사진도 많이 찍어주었다. 혼자 여행하면서는 매우 갖기 어려운 것, 그것은 그곳에 어울려 있던 나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다. 그곳에 있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언제나 궁금하고 갖고 싶은 기록이다. 내가 있던 순간을 관찰하고 기록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혼자서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여행의 1%를 채워주어, 온전한 100%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친구들과 함께 쉬며 보폭을 맞추었다. 무리하지 말고 충분히 쉬며 가자고 마음을 덜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왔을까, 첫날 고산병 때문에 고생한 친구가 중도에 산행을 포기했다.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고 먼저 내려가서 쉬고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판단이 되었다면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우리는 그 친구를 먼저 내려 보냈다.  



 몸은 무거웠지만 눈은 가벼웠다. 열 걸음 가다가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면 그때마다 다른 풍경이 매번 다른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런 대자연을 품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부럽기까지 했다. 각각의 산 봉우리는 저마다의 색으로 빛을 바랬다. 어떤 산은 눈으로 뒤덮여 온통 하얀빛을 띠었고, 어떤 산은 그저 어두운 빛을 내보였다. 어떤 산은 아직 겨울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여전히 가을의 색을 간직하고 있었고 어떤 산은 짧은 노란 머리가 빛났다. 목장에선 야크, 말, 그리고 당나귀가 풀을 뜯고 있었고, 산속에서 야생 산양 무리와 고산 닭이 숲을 헤치고 다녔다.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충분히 불릴 만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산의 경사가 가파르면서 결국 한 계단 오르고 쉬고, 한 계단 오르고 쉬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친구들은 비틀거릴 정도로 숨을 몰아 쉬며 쉰 소리를 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차가워지는 공기를 동반한 바람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세게 불었다. 길은 온통 얼어 미끄러웠고, 로프나 어떤 안전장치도 없어 바로 옆으로 낭떠러지가 보였다. 우리는 내가 먼저 안전한 길을 찾아 오르고, 친구들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천천히 조금씩 올라갔다. 내가 정말 놀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힘들어서 더 이상 못 오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한 걸음씩이라도 천천히 내디뎠다. 이곳은 성수기에 비교적 날이 따듯한 때에도 힘든 곳인데, 여자 넷이 겨울의 한가운데 고지대 설산을 등반했다. 다들 대단한 끈기였다. 이윽고 우리는 해발 4,600m 우유해(Milk Lake)에 이르렀다. 그리고 굉장한 풍경을 손에 넣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한 것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 친구들은 겨울의 만년설산 야딩의 정상에 올랐고 또 하나의 세상을 손에 거머쥐었다.

  


 다른 계절에 올랐다면 맑은 우유해 호수에 산 봉우리가 비치는 절경을 볼 수 있었겠지만, 겨울에 본 우유해는 꽁꽁 얼어있었다. 사실 야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유해에서 100m 정도 더 올라가면 오색해(Five Colour Lake)가 있지만, 이 구간은 굉장히 가파르기도 하고 친구들도 더 이상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그래서 나도 오색해는 포기하기로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산했다. 하산은 비교적 수월했지만 이따금 있던 얼음바닥이 내려갈 때는 거의 지뢰나 다름없었다. 올라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리고 나는 이때 조금 재미있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산을 편히 오르내리도록 만들어놓은 길이 있음에도, 나는 산길 옆으로 난 샛길이 눈에 거슬렸다. 저 샛길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 너무도 궁금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저 길로 가면 보기 어려운 동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관리자들만 알고 있는 비밀의 풍경이 있진 않을까?”같은 엉뚱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지금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락하고 편한 길을 걷고 있자면, 다른 길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나는 그곳에도 분명 내가 기대한, 혹은 그 이상으로 나를 만족시켜 줄 무언가 있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 해도 상관없다. 다음부터 나는 샛길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 않을 테니까. 우리의 삶은 모험이다. 여행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모험이므로, 자기를 찾는 일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관찰’과 ‘고찰’인 것 같다.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 지에 대해 고찰해 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여행이 아니라 식당에 가서 밥을 시키면서도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산을 빠져나오는 막차 버스가 혹시 먼저 출발해 버릴 까 봐 가장 먼저 하산하고 버스를 잡아두었다. 그리고 녹초가 되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마구 씹어 먹었다. 그리고 이내 친구들도 한 명씩 도착했는데, 정말 나는 모두에게 서서 박수를 쳐주었다. 대단한 친구들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오늘의 산행을 마친 마지막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따듯한 버스 안에서 깊고 달콤한 잠에 빠졌다. 


 야딩에 이르기까지 나는 예상했던 대로 정말 많은 문제에 닥쳤다. 너무도 외롭고 쓸쓸해서, 춥고 괴로워서 그대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그렇게까지 여행을 할 필요가 있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못 갈 수도 있는 거지”라고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앞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내 인생의 작은 부분이었다. 작은 것부터 끝까지 해내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행에 도전한 것이기에, 무엇 하나 소홀하게 여길 수 없었다. 내게 고난과 시련 없는 여행은, 퇴사의 찬란한 빛을 충분히 발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안락한 여행을 하고 있다면, 나는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질 것이다. 걱정은 모르는 것에 대한 과한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면, 모든 감각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을 즐긴다. 인생은 결국 내가 만들어 가는 것, 누구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가능한 세상의 모든 경험을 손에 넣고 싶다. 


# 돌아와서 

 여섯 명이었던 우리 일행 중 영어를 하지 못하던 두 친구는 먼저 그들의 보금자리로 떠났고, 먼저 하산한 친구와 우리 셋은 다오청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이 고용한 차에 한 자리가 남아 공짜로 얻어 탈 수 있었다. 출발할 때 썼던 200위안은 전혀 아깝지도,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차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혼자였으면 오지 못했을 곳들이었다. 동티베트 현지인들의 성지, 역사가 깊은 라마교 사원, 그리고 밤에는 별이 은하수를 이루는 굉장히 멋진 곳을 여행했다. 나는 정말이지 눈으로 은하수가 보일 정도로 맑은 하늘에 별이 가득한 것은 처음 봤다. 마을 자체가 워낙 고산지대이고 밤에는 불빛이 거의 없어, 이런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넋을 잃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별로 가득 찬 하늘의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사진으로 담아내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눈으로 보는 것만큼 담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편이 더 좋다. 만약 카메라로 모든 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담아낼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욱 여행을 갈망하지 않을 테니까. 다음날 우리는 아침 11시 청두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8:50분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에 알림을 맞추고 잠이 들었다. 



 ‘똑똑’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뭐지?”하는 생각과 동시에 스치는 불길한 예감, 나는 문으로 뛰어가서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친구들이었다. “50분인데 안 나오길래 와봤어” 나는 다시 침대로 뛰어가 핸드폰의 버튼을 눌러보았다. 방전이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5분 안에 로비로 뛰어 나갈게” 나는 몹시 흥분해서 말을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풀어헤쳐진 짐을 가방에 모조리 쑤셔 넣고 나왔다. 친구들이 생겼다고 긴장이 풀어져서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버린 것이다. 나는 5분이 조금 더 지나고 뛰어나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친구들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고마움과 미안함에,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여행에서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긴장이라는 끈을 잠시 놓아버린 나를 그저 끊임없이 자책하고 질타하고 있었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해서 늦지 않게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정말이지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번 더 큰 시련에 닥쳤을 것이었다.  


# 다시 청두로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청두로 돌아왔다. 갈 때는 버스로 이틀이나 걸렸는데 돌아오는 데는 고작 50분 남짓 걸렸을 뿐이었다. 우리는 저녁에 다시 만나 식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각자 숙소로 향했다. 나는 전에 일주일간 지냈던, 까만 커튼이 있는 숙소로 갔다. 직원에게 “또 보자”라고 인사를 하고 떠났었기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직원들은 나를 기억하고 매우 반겨주었다. 나도 그동안 야딩에서 있던 일들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지금 야딩에는 정말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너무 아름다웠다는 이야기, 야딩의 호수들은 지금 전부 꽁꽁 얼어붙었다는 이야기 등 내가 본 것들을 전해주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나는 방으로 찾아가 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 두 명의 서양인이 짐을 풀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간단한 호구조사를 했는데, 이 친구들은 뉴질랜드에서 방금 도착한 커플로, 여자는 뉴질랜드인, 남자는 스리랑카인이었다. 우리는 간략한 인사를 마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씻었다고 할 수 있는 샤워를 하고 산행으로 더러워진 옷가지를 세탁하는 등 며칠간 찌든 것들을 벗겨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도시에 도착하면 치르는 나만의 의식인 스타벅스로 찾아가 익숙한 커피를 마셨다. 


 야딩에 떠나기 전 청두와, 다녀온 후의 청두를 비교해보자면 나에게는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친구는 또 다른 친구를 낳고 커뮤니티는 더욱 넓어진다. 저녁이 되고 나는 친구들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이제 내게 중국에서 길 찾기란, 식당에서 메뉴 고르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 혼자서도 잘 찾아갈 수 있었다. 그때 뉴질랜드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너희 식사 자리에, 우리도 끼어도 될까?” 나는 중국 친구들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하고 괜찮겠냐고 묻자 “청두 음식은 많은 사람이 먹을수록 좋지!”라고 대답했다. 좋다, 오늘 밤은 파티겠구나.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뉴질랜드 친구 두 명, 중국 친구 세 명 이렇게 여섯 명이 모여 ‘훠궈(Hotpot)’파티를 했다. 훠궈는 충칭 특산 음식으로 우리나라의 샤부샤부와 비슷하다. 이것은 혼자 먹기에는 한 번에 시켜야 하는 양이 많아, 그동안 혼자 지냈던 나는 먹지 못했었다. 식당에 들어가면 원형 테이블의 가운데 커다란 가마솥이 올라오고, 위로는 고추기름 아래로는 매운 국물로 가득 차있다. 고추기름 위로는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빨간 고추와 동그란 화자오가 둥둥 떠다니는데, 이 화자오는 혀를 마비시키는 묘한 기능을 한다. 충칭 사람들은 고추의 매운맛과 화자오의 혀를 마비시키는 느낌을 매우 좋아한다는데, 나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름이 끓기 시작하면 소고기, 양고기, 천엽, 감자, 마, 메추리 알, 돼지 뇌 등 정말 오만 가지 것을 넣었다 빼며 먹는다. 맵고 혀는 얼얼해져 고통스럽지만 묘하게 자꾸 들어가는 매력이 있다. 중국 친구들이 이건 뭐고 이렇게 먹고, 저건 뭐고 저렇게 먹는 것이라고 알려주면, 나와 뉴질랜드 친구들은 하나하나 신기해하며 맛을 음미했다. 우리는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세 명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됐다. 그동안 챙겨주어서 정말 고마웠다고,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는 인사를 나누었다.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나를 끝까지 챙겨준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은 어디에 있든 여행하다 가끔 사진을 꼭 보내달라고, 약속하자고 했다. 물론, 나는 어디를 가든 나는 내가 본 세상을 너희에게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 최악의 시련 

 나는 이틀 후 만의를 만나러 충칭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23일, 금단의 도시 티베트로 여행을 떠나 나의 중국 여행은 여기서 막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문득 티베트에 가기 전에 그들의 역사적인 배경과 종교에 대해 알고 싶어 졌다. 그래서 친구가 감명 깊게 봤다고 소개해준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을 봤다. 궁금한 것이 꼬리를 물어 티베트에 관련된 정보를 찾다 보니 어느덧 새벽 세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침대 구석으로 치워두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다리에 무언가 계속 걸려 잠에서 깨었다. 왼쪽 다리는 노트북 위로 올려져 있었고, 노트북은 완전히 닫힌 상태가 아니었으며 스프링처럼 튕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심코 나는 노트북을 열어보았는데 스크린이 말도 못 하게 산산조각이 나있었고, 그 사이에는 이어폰이 끼어있었다. 그러니까 어두워서 노트북 사이에 이어폰이 끼어 들어간 것을 보지 못한 채 닫아 버렸고, 잠결에 다리로 노트북을 눌러버려 스크린이 깨진 것이었다. 잠결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정말 큰 충격을 받으면, 이것이 정말로 꿈 이길 바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곤 한다. 또 다른 잔인하고 무자비한 시련. 내게 노트북이 없다는 것은, 단지 비싼 노트북이 고장 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여행을 하는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잠깐 잠든 세 시간 사이, 나는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몇 시간이고 핸드폰을 잡고 해가 뜰 때까지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았다. 몇 가지 방법이 있긴 했지만 가격 부담이 엄청났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았다. 수중에는 그만한 돈도 없고, 당장 티베트에 가야 했기 때문에 시간도 없었다. 중국에서 노트북을 사자니 한국 자판이 없을 것이고, 티베트를 포기하고 한국에 가서 고쳐와야 하나, 아니면 한국에서 노트북을 사서 중국으로 보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결국은 언어의 무능함에 좌절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만의에게 도움을 청한 뒤 잠에 들었다. 원래 청두에서 남은 하루의 계획은, 하루 종일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트북이 이렇게 된 나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해야 할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따금 잠에서 깨긴 했지만, 무기력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며, 눈을 뜨면 노트북밖에 떠오르지 않아 다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 편했다. 그렇게 시간은 오후 5시를 넘겼다. 나는 그동안의 모든 일이 꿈이었기를,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허상이었기를 기대하며 노트북을 다시 열어보았지만, 처참한 모습은 어김없이 나를 좌절시켰다. 그제야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만의에게 연락했던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도 만의의 답장은 긍정적이었다. 내일 충칭으로 가면 만의의 친구를 한 명 만날 텐데, 그 친구가 노트북 수리업자를 안다는 것이었다. 만의는 내가 도착한 다음날 오기로 했으니, 나 먼저 그 친구를 만나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수리업자는 내 노트북 사진을 보고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내가 쓰는 노트북은 삼성, 중국에는 없는 모델이었다. 호환되는 스크린을 구할 수 없다면, 중국에서는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저 징징대는 어린아이였다. “그 친구가 고쳐줄 수 있겠지?”, “만약에 스크린 없으면 어떻게 하지?”같은 한심한 질문을 쏟아냈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도 큰 좌절과 충격에 어떻게든 위안을 받아야만 했다.  


 나는 아무래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노트북을 수리할 수 있는 방법 하나는 확보해둔 상태였다. 만약 여기서 수리가 불가하다면 이후로는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수리업자로부터 ‘안돼, 이건 중국에서 못 고쳐’라는 말을 듣고 다시 좌절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적어도 한 가지 방법을 더 확보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동 루트를 고려해, 네팔 카트만두에서 수리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한국의 사이트에는 정보가 없었고, Google에서 혹시 다른 외국인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우연찮게 찾게 된 한 사이트, 네팔의 노트북 수리 전문업체를 찾았다. 나는 메일을 보내, 27일에 카트만두에 도착할 것인데 내 노트북을 고쳐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답장이 왔다. ‘Yes, we can help you” 좋다, 이로서 나는 두 번째 방법도 확보했고, 중국에서 안 된다 하더라도 크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중국에서 고쳐지길 정말 간절히 바랬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충칭으로 갔고, 바로 만의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는 여자였다. 키도 작고 체구도 아담한 여자였다. 그러나 옷 차림새, 머리스타일, 목소리, 말투, 행동 모든 것이 남자에 가까웠다. 그렇다, 레즈비언이었다. 충칭에는 한눈에 봐도 동성애자로 보이는 사람이 매우 많이 보였다. 이 친구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별명은 ‘왕자’였고, 나도 그냥 왕자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내게 중요한 것은 노트북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수리업자에게 갔다. 다행스럽게도 그 둘은 꽤 친해 보였다. 미리 이야기가 다 되어 있는 듯 바로 노트북을 보여주고 그는 능숙하게 모니터를 뜯어냈다. 나는 그가 하는 손짓, 눈빛, 말투 사소한 모든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했다. 왕자와 그는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웃어댔는데, 나는 왠지 그 말이 “이거 중국에서 못 고쳐”라고 들리는 듯했다. 노트북을 어느 정도 다 둘러본 그는 스크린을 먼저 찾아보고 우리에게 두 시간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픈 아이를 병원에 두고 나오는 심정으로 그곳을 나왔다. 



 고작 30분 남짓 지났을까, 그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까지 고쳐줄 수 있고, 660위안!” 순간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여행을 떠나 와서 나를 가장 큰 좌절로 몰아넣은 이 문제는 이렇게 종결된 것이다. 나에게는 기분 좋게 출근한 어느 날 아침,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그리운 아이콘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놓였다. 왕자는 기쁜 소식을 내게 전해주고, 소개하여주고 싶은 한국인 친구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카페로 갔다. 카페에는 한 부부가 앉아 있었다. 나는 진귀한 보물을 찾은 듯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한국사람들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꽤나 젊어 보이던 이 부부의 나이는 30대 후반, 아이까지 있는 부모였다. 이들이 중국에서 산지는 벌써 10년도 넘었고, 충칭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누님은 내게 커피 한잔을 사주고 다시 일하러 올라갔고, 형님은 내게 소주를 한잔 사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와 형님, 왕자 이렇게 셋이 한국 식당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게 됐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깨어나기 싫을 정도의 지옥이었는데, 고작 몇 시간이 지나 밤이 되어서는 천국에 와있는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노트북도 간단하게 해결됐고, 모든 감각기관이 호사를 누렸다. 한국에서 먹던 그런 좋은 삼겹살은 아니었지만, 소풍에서 먹는 도시락처럼 특별했다. 이건 어떻게 먹는 건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쯤은 내가 직원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중국에서 마시는 소주는 한국의 소주보다 조금 약했지만, 한 손에 딱 쥐어지는 초록색 유리병을 잡고 중지, 검지, 엄지 세 손가락으로 딱 쥐어지는 아담한 유리잔에 맑은 소주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오랜만에 한국말을 분수처럼 쏟아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머릿속에 계산기를 없애고 대화한 것이.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같이 사용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 내가 돌아갈 나라가 있다는 것,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여행자라 불리지 못할 것이며, 난민인 것이다. 내 언어, 내 국가, 내 역사가 있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나는 형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편안하게 잠들었다. 


 다음날 오후, 나는 노트북을 찾으러 갔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은 밝았고 내게 노트북을 열어 보여 주었다. 깨끗하고 맑은 화면에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배경화면과 아이콘이 인사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이어 “핸드폰도 문제라며, 줘봐”라고 했다. 맞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핸드폰. 그의 손에 맡겨진 나의 애물단지 핸드폰은 사정없이 분해되어 순식간에 배터리가 갈아 끼워졌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이제 문제없을 것이라며 내게 핸드폰을 다시 주었다. 핸드폰 배터리 교체 비용 80위안, 노트북 교체 비용 660위안, 나는 총 740위안으로 중국을 떠나기 전에 이 지긋지긋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나는 그에게 수십 번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그것도 부족해 악수를 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의 의미를 되찾았고, 앞으로의 모든 여정이 다시 기대되고 설렜다. 


# 몸살 

 밤이 되고 나는, 만의와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중국인의 권유 문화, 나는 이제 이것이 무섭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잘못 인식된 것인지, 나의 생각은 묻지도 않은 채 그저 권유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게 끊임없이 술과 담배를 권했고, 가까스로 담배는 피할 수 있었지만 술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이 날도 기억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호텔방이었다. 차를 타고 만의의 집으로 가는 내내 구토를 했고, 그 상태로 만의의 부모님을 뵈었다. 힘껏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예정된 점심을 함께했다. 속이 뒤집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너무도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억지로 몇 개를 집어먹고 다시 구토가 밀려왔다.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만의가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나는 만의 방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렸다.  


 그리고 저녁, 만의가 저녁식사를 먹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몸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집에서 지내기를 허락해주신 만의 부모님과 티베트 보증까지 서주신 어머님께 대한 감사함, 그리고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만의와 한국인 친구를 위해 마련된 저녁 만찬에 내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3층으로 내려가 친한 이웃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만의 부모님, 할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이웃 분들, 우리를 포함해 10명 정도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점심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진 테이블 위의 음식은 얼핏 보아도 10가지는 넘어 보였다. 그중 중국에서 고량주 양조공장을 매우 크게 한다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중국에서도 구하기 어렵고 귀한 술이라며 무려 65도짜리 고량주를 가지고 왔다. 저것을 마신다면 나는 위에 구멍이 뚫려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는 술이라기보단 발화물질을 내 잔에 가득 따르고는 마시라고 줄곧 권유, 아니 강요했다. 나는 정말이지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에 한 모금 조금 마셨음에도 위장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느껴졌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 후로도 끊임없이 정말 귀한 술이라 귀한 손님에게 꼭 마시게 하고 싶다며 권유했는데, 내게는 그저 자신의 과시와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비싸고 좋은 담배라며 내게 담배도 권했다. 피지 않는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음에도, 자신이 필 때마다 권해 매번 거절해야만 했다. 위에 구멍이 뚫린 듯 속은 몹시도 쓰렸고, 옆에서는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나는 결국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몸에서 열이 나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구토가 밀려오고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해버렸다. 더 이상 내게 예의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앉아 고개를 숙이고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너무 힘들어서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결국 만의에게 먼저 올라가자고 했다. 도저히 몸이 버틸 수가 없었다. 우리는 결국 먼저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왔다. 만의 부모님께, 너무도 죄송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막혀있던 문제가 해결된 기쁨은 잠시 뿐이었고, 다음 내게 찾아온 고난은 몸살이라는 아주 지독한 놈이었다. 나는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아 잠들기 전 약을 먹고 잤으나 결국 밤새 앓았다. 몸이 조금 나을라 치면 만의 친구들을 만났고, 또다시 내게 음식과 술을 권해 나는 억지로 먹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밤에는 설사를 하고 열이 났다. 심지어 이들은 좋은 곳이 있다며 나를 노래방에 데려가서 한국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나는 몸 상태도 좋지 않은 데다가 굉장히 예민해있던 터라, 결국 만의에게 화를 내고 먼저 숙소로 들어왔다. 그날 밤도 역시 밤새 열이 많이 났다. 그렇게 나는 티베트로 떠나는 날까지 충칭에서 줄곧 앓았다. 그렇게 고대하던 티베트로 떠나는 기차를 타러 가면서도, 몸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걱정이었다. 이 상태로 고산지대로 들어가게 된다면, 정말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나는 티베트에 도착하기 전에 꼭 나아야 했기에, 건강관리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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